소설리스트

흑백무제-181화 (181/963)

181화. 운명 (6)

퍼어엉!

뒤로 튕겨 나간 파사륵의 눈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뭐야, 이놈?!’

파악!

가볍게 땅을 박차더니 어느새 코앞까지 따라붙었다. 속도가 엄청 빠른 것도 아닌데 묘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부우웅! 콰앙!

묵직하다.

수미역불공의 호신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려 막았는데도 허리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막강한 위력이었다.

“이 새끼가!”

적광(赤光)이 피어오르는 거권(巨拳)이 대기를 불태우며 모용우의 머리를 노렸다.

빠르고도 날카롭다. 모용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온몸을 한계 이상으로 발달된 근육으로 무장했으면서도 굉장히 유연하고 빠른 무공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작정하고 상대에게 집중한 모용우의 무공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퍼퍼펑!

파사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영신권(佛嶺神拳)의 힘을 담은 주먹이 대번에 위로 튕겨 나갔다. 첩첩이 밀고 들어온 장력이 권로(拳路)를 방해한 것이다.

빠각!

파사륵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젠장.’

휘돌아 후려친 각법에 복부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도검불침(刀劍不侵)의 육신을 이루었는데도 통증을 느낀다? 상대의 공격력이 자신의 방어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었다.

“개자식!”

구파일방의 산중 고수나 육대세가의 수뇌부급 무공이 아니면 절대로 망가지지 않을 거라 믿었던 육체의 배신이다.

파사륵이 강하게 진각을 밟았다.

쿠궁!

대지에 강력한 진동이 일었다.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파악!

치고 들어오는 진동을 피해 허공으로 도약한 모용우가 양손으로 탕마대검을 쥐었다.

‘참(斬).’

번쩍!

묵직한 검날이 파사륵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격에 머리통을 날려 버릴 생각으로 내친 검결이었다. 파사륵의 유연한 회피 능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제대로 가다듬었군.’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둔할 것만 같은 몸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잘 발달된 근육에서 나오는 힘은 강했고, 관절의 유연함은 중원의 어떤 고수 못지않았으며, 재빠른 몸놀림은 제비처럼 날렵했다.

양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마적단의 두목이지만 무공 하나만큼은 제대로 단련했다. 강유의 조화가 무척이나 잘 이루어진 몸이요, 무공이었다.

쩌저정!

쏟아지는 권법을 대검의 검면으로 막아 냈다.

무공을 제대로 익힌 자는 공격과 회피, 방어의 시기를 정확하게 안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자는 두 가지, 세 가지 방식을 동시에 구현해 낸다. 회피와 공격을 한 호흡으로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사륵이 그러했다.

병장기를 든 상대를 맨손으로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훅!

모용우의 신형이 파사륵의 후방 좌측에서 나타났다.

파사륵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뿐이다.’

꽈앙!

“큭!”

파사륵이 비틀거렸다.

어떻게든 몸을 돌려 권격을 내쳤지만, 모용우의 탕마대검엔 태산 같은 힘이 실려 있었다.

파앙!

거리를 좁힌 모용우가 일순 엄청난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파바바바박!

“크윽!”

파사륵의 몸 곳곳에 십여 개의 검상이 났다.

이번 공격 역시 피육만을 베었을 뿐이다. 근육을 가르고 뼈를 끊어 내진 못했다.

하지만 파사륵은 깨달았다.

‘깊어졌어?!’

검상이 미세하게 깊어졌다.

기겁하여 물러나려는 순간, 대검이 쭉 늘어나면서 그의 흉근을 파고들었다.

“헉!”

따앙!

주먹으로 대검을 내치고 상체를 수그렸다.

주르륵.

파사륵의 눈이 흔들렸다.

이번 검격은 살을 베어 내고 근육까지 갈랐다. 재빨리 진기로 근육을 조여 지혈했지만, 한순간 뿜어진 피의 양이 상당했다.

“이제 좀 익숙해지는군.”

파사륵이 모용우를 보았다.

번쩍!

무서운 안광을 뿜어내며 다가오는 모용우의 몸에서 하늘을 연상케 하는 푸른 진기가 솟아났다.

“너의 단단함에, 이제야 익숙해졌어.”

파사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익숙해져? 고작 익숙해진 것만으로 베지 못했던 걸 벨 수 있단 말인가?

“애송이 자식이 적당히 끝내려고 했더니만……!”

그때였다.

콰아아앙! 퍼어어엉!

“으아아악!”

“도, 도망쳐!”

“단주님! 단주님!”

“두목! 도망쳐야 합니다!”

콰르르르릉!

파사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단과 외단을 잇는 벽이 무너지며 수하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도망을 치는 게 아니다. 적의 압도적인 전력을 버티지 못하고 여기까지 밀려난 것이다.

화아아악!

밀려오는 부하들 너머, 폭발적인 기파를 발산하는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콰아앙!

추풍낙엽이 따로 없었다.

회흑색 쇠사슬이 꿈틀거리면 마적들의 목이 뜯겨 날아가고, 흑백의 용형대부가 휩쓸고 지나가면 몸통이 산산이 조각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삼두육비 괴물의 질주다. 마적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는 자의 살기가 불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가히 전신(戰神)이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그 전신 뒤에는, 날 듯이 허공을 오가며 시위를 당기는 신궁(神弓)까지 붙었다.

“……뭐야.”

파사륵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뭐야, 저 미친놈은!”

그때, 모용우가 말했다.

“멸사군장이다.”

“뭐?”

“멸사군의 수장이자 벽산호장(碧山虎將)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중원 최고의 후기지수, 연가의 장남이다. 그리고…….”

모용우가 탕마대검을 고쳐 잡았다.

“내 동생이지.”

콰아앙!

파사륵의 이마에 굵은 혈관이 도드라졌다.

“이익!”

무서운 힘이었다.

연호정의 광기 어린 활약을 본 모용우 역시 투지가 불타오른 모양이었다. 파사륵이 양팔을 교차해 검격을 막았지만, 괴력을 발휘하며 더욱 밀어붙이고 있었다.

주르륵.

대검이 점점 근육을 파고들었다.

‘안 돼!’

파사륵은 스스로의 상태를 정확하게 인지했다.

‘진다.’

지는 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러다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도주!’

파사륵에게 명예나 자존심 따위는 없었다. 모용우가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는 언제나 생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이 그러했다.

파사륵이 버럭 외쳤다.

“모두 흩어……!!”

퍼어어억!

“크아악!”

파사륵이 무릎을 꿇었다. 한 줄기 무형의 화살이 그의 등판에 작렬한 것이다.

진기의 화살, 무영탄이었다. 수십 장 밖에서 마적들을 학살하던 묵비가 분노의 일격을 날린 것이다.

무영탄이 아닌 철전이었다면, 그걸로 목숨이 날아갔을 것이다. 파사륵에게는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빠각!

파사륵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모용우의 무릎이 그의 턱에 작렬한 것이다.

퍼퍼퍼펑!

모용우의 눈이 반짝였다.

일격에 목을 날릴 생각이었는데, 와중에도 권장(拳掌)을 펼쳐 검격을 막았다. 끈질긴 놈이었다.

물론,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서걱!

파사륵의 왼손 검지와 중지, 약지가 잘려 나갔다.

“이익!”

콰아앙! 서걱!

파사륵이 좌측으로 몸을 날렸다. 모용우의 검이 그의 등을 베었지만, 어떻게든 빠져나가긴 한 것이다.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어딜!”

그때였다.

촤르르르르륵!

피 보라 가득한 허공을 꿰뚫고 쏘아진 쇠사슬이 파사륵의 목을 졸랐다.

“켁!”

연호정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리 와.”

차아아앙!

교룡쇄가 팽팽히 당겨지며 파사륵의 몸이 허공으로 떴다.

번쩍!

모용우의 대검이 섬광처럼 나아갔다.

서걱!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오는 대응이었다.

쇠사슬에 목이 졸린 채 허공을 날면서도 모용우의 빛살과도 같은 쾌검을 몸을 틀어 피했다. 등에 심각한 검상을 입었지만, 몸통이 반으로 쪼개지는 건 막은 것이다.

무시무시한 생존 욕구였다. 적의 살의를 읽는 능력이 상상을 초월했다.

“으아아압!”

콰아앙!

두 발로 바닥을 찍은 파사륵이 교룡쇄를 쥐어 당겼다. 천생신력을 타고난 몸에 수미역불공이 극한까지 담겼다. 거기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고 있으니,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나빴다.

우우우우우웅!

교룡쇄에 화천(火天)의 주작기가 담겼다.

“흡!”

콰앙!

파사륵의 몸이 재차 허공으로 떠올랐다.

‘뭐, 뭐?!’

폭발적인 힘으로 당겼는데도 다시 상대에게 끌려간다. 심지어 상대는 고작 한 손으로 잡아당기고 있는데도!

파사륵의 동공이 확 커졌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괴물이 거기에 있었다.

“으아아아아!”

퍼어어억!

파사륵이 두 다리가 무릎 밑에서부터 날아갔다.

콰앙!

두 다리를 잃은 파사륵이 땅에 처박혔다.

연호정이 파사륵의 얼굴을 밟았다.

퍼억!

코가 부러지고 이빨이 날아갔다. 우측 광대뼈가 으스러져 움푹 내려앉았다.

부르르 떨던 파사륵의 몸이 이내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것이다.

연호정이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모용우가 크게 외쳤다.

“모두 멈춰라!”

우우웅! 우우우웅!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음공을 연상케 할 정도로 요란하던 파사륵의 목소리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너희는 패배했다! 당장 병장기를 버려!”

마적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모용우의 옆, 파사륵의 목덜미를 잡아 올린 연호정이 살기 어린 눈으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싹!

남은 회랑단 전원이 두려움에 떨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도끼를 휘두른 괴물의 손에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났다. 그러고도 지치지 않았는지, 두목을 들어 올린 채 이쪽을 노려보는 그의 몸에서 파멸적인 기파가 넘실거렸다.

그의 눈빛이, 기파가 말해 주고 있었다.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철컹! 철컹!

마적들이 하나둘씩 병기를 내려놓았다.

단순한 만큼 기세를 타면 엄청난 사기를 보여 주지만, 한번 사기가 꺾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진다. 그들의 최고 장점이 최악의 단점으로 작용하는 순간이었다.

마적의 한계였다.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그들에게 옥쇄(玉碎)란 있을 수 없었다.

모용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는가.’

그때, 그의 시선이 연호정에게 향했다.

연호정은 느릿하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두 눈을 가득 채운 살기가 한층 거세게 불타올랐다.

모용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죽이자고?’

‘그래.’

‘이미 항복 선언을 받았다. 굳이 죽일 필요는…….’

‘병장기를 버렸으니 상대하기 더 쉽겠군.’

‘……!’

‘걱정하지 마. 악업은 내가 지고 간다.’

당황한 모용우의 눈에, 문득 멸사군과 탕마군의 진형이 보였다.

“……!!”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탕마군과 멸사군은 절묘하게 회랑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기습에 최적화된 배치였다.

순간 모용우는 깨달았다.

‘연제가?!’

그렇다.

전장에 돌입한 순간, 연호정은 상대의 파멸은 물론 아군 희생의 최소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곳을 뚫어 적을 완전히 분쇄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되면 적을 더 많이 죽일 수 있지만, 동시에 아군의 피해 역시 커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며 아군을 밀집한 연호정.

탕마군과 멸사군은 저희도 모르는 새 서서히 회랑단을 둘러싼 진형을 갖춘 것이다.

쾅!

파사륵을 아무렇게나 던진 연호정이 마적들을 노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이겼다고 생각해 긴장을 푼 탕마군과 달리, 멸사군 전원의 눈빛은 연호정과 비슷했다. 그들 역시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 봤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차갑게 말했다.

“멸사군에게 명한다.”

츠츠츠츠츠.

자욱한 살기가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깔끔하게 보내 줘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