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운명 (5)
“뭐, 뭐야?!”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시뻘건 피 보라가 일었다.
살점이 흩어지고 부서진 뼈가 하늘을 날았다. 사람의 몸뚱이가 육편(肉片)으로 박살 나 버린 것이다.
부우우웅! 퍼어어엉!
무지막지한 위력이었다.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누군가로 인해 남쪽에 배치된 회랑단 병력이 우수수 쓰러지고 있었다. 마치 수십 필의 군마가 이끄는 공성추가 모든 걸 박살 내며 돌진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공성추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흑색의 창대, 백색의 도끼날.
흑백의 신병이기 위, 포효하는 용이 새겨진 파괴의 병기가 마적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콰아앙! 콰앙!
누구도 막을 수 없다.
후퇴를 상정하지 않은 무한의 질주다. 서방대제, 바람의 지배자 백호의 질주가 눈앞에 있는 모든 적을 물어뜯고 후려쳐 날려 버린다.
“이, 이런!”
항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화아아아악!
아직 상대가 누구인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사방으로 찢겨 날아가는 아군의 시체 조각뿐이었다.
그리고 살기(殺氣).
이곳에 있는 모든 마적을 분쇄해 버리겠다는 듯 파멸적인 살기가 해일처럼 덮쳐 오고 있었다.
“후퇴! 후퇴해! 안쪽으로 더 들어와라!”
그때였다.
티이이이잉! 퍼어억!
“큭!”
본능적으로 상체를 틀었지만 좌측 어깨 근육이 한 움큼이나 떨어져 나갔다.
‘궁수?!’
그렇다. 인질 주변에 다가갔던 마적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궁수가 이제 전투에도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항춘이 외쳤다.
“인질들부터 잡아라! 완전히 쓸어 버려!”
쿠르르릉!
마적 수십 명이 여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수로 접근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하나가 되어 달려드는 이상 제아무리 신기(神技)의 궁술을 지녔다 해도 다 막을 순 없다.
실제로 묵비는 깜짝 놀랐다. 충분히 겁을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나 막무가내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익!’
티티티티팅!
내공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 속사를 날렸지만, 열댓 명이 쓰러졌을 뿐이었다. 남은 서른 명가량의 마적들은 어느새 여인들의 코앞에 다다라 있었다.
다 죽일 수 없다 한들 멈출 순 없다. 묵비가 재빨리 화살통에 손을 넣었다.
‘……?!’
화살이 없었다.
인질을 지키는 데에 몰두하느라 화살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쏴 댔던 것이다. 묵비 인생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안 돼!”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촤르르르르륵!
길다란 흑회색 사슬이 꿈틀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콰아앙!
미친 용이라는 이명을 지닌 흑백의 도끼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전방의 적을 무차별로 쪼개 버리고는 땅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타아아아아앙!
공기가 폭발한다.
단거리를 초고속으로 주파하는 불꽃의 보법.
태양신(太陽神)으로 숭배받는 전설의 신수(神獸), 남천의 지배자 주작의 힘이 쇠사슬을 잡은 청년의 몸 주변에 돌풍을 일으켰다.
치이이이익! 치리리링!
화기(火氣)를 받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사슬이 쭉 늘어나며 마적들의 목을 휘감았다.
청년, 연호정이 교룡쇄를 힘차게 당겼다.
퍼어어어억!
교룡쇄에 감긴 선두의 마적 다섯의 목이 날아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목을 날리자마자 불가사의한 몸놀림으로 재가속한 그가 어느새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치리리링!
양손으로 교룡쇄를 잡은 연호정의 두 눈이 화광(火光)을 뿜었다.
퍼버버버벅!
짧게 회전하며 사위를 휩쓰는 교룡쇄가 마적들의 육신을 부수고 터트렸다.
연호정이 기합을 내질렀다.
“으압!”
콰아앙!
천근추다.
엄청난 속도로 땅에 떨어진 그가 몸을 빠르게 틀며 교룡쇄를 휘둘렀다.
퍼버버벅!
그걸로 끝이었다.
마치 광룡부를 휘두르듯 횡으로 휘둘러진 교룡쇄가 남은 마적의 몸을 상하로 찢어발겼다.
촤르르르륵!
그대로 놔두면 교룡쇄가 후방으로 돌아가 인질의 몸까지 상케 할 것이다. 연호정은 절묘한 내공으로 교룡쇄를 경화하여 사슬의 끝이 하늘 높이 솟구치게 하였다.
그러고는 종(縱)으로 내리꽂았다.
푸화아악!
덩치 큰 마적의 몸이 세로로 쪼개졌다.
치리리리링!
단숨에 교룡쇄를 당겨 상반신에 사선으로 걸어 버리는 기술이 놀랍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쇠사슬을 다루는 기술이 알아서 손에 붙은 것이다.
연호정이 외쳤다.
“창병(槍兵)!!”
파라라라락!
죽립을 쓴 아미의 창수 열 명이, 상관이 뚫어 놓은 길을 질주하며 어느새 인질 주변에 섰다.
숱한 실전을 겪은 덕에 멸사군 전원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중에서도 송연경을 위시한 아미파 창수들은 진형(陣形)을 형성하는 데에 있어선 단연 최고였다.
창이라는 병기, 그리고 이심전심이 가능한 조합.
“인질을 보호해라!”
“네!”
탕마군의 군병들과는 반응 속도부터가 다르다.
연호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후속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이곳에 서서 인질을 보호할 것이다.
파아악!
연호정이 단숨에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퍼억! 퍼버버벅!
멸사군은 절대 요란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기합을 내지르지 않았다. 이러한 난전에서 목소리를 높여 봤자 혼란밖에 가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죽일 뿐이다.
눈앞에 있는 적을 죽이고, 대장인 연호정의 말에만 귀를 기울일 뿐이다.
상황에 따라 스스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무공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는데도 흑도의 온갖 문파들을 박살 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멸사군은 강하다.
그들의 조직력이, 경험이, 정신력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단련시킨 사람이 바로 연호정이었다.
“화산은 서쪽을 맡아! 곤륜은 중앙! 나머지 모두는 북쪽의 퇴로를 틀어막는다!”
작은 병력으로도 무공의 특질에 따라 전황을 뒤바꿀 수 있다.
연호정의 안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명령은 언제나 시기적절했으며, 본인의 행동력 또한 발군이었다.
“만호! 내가 좌측으로 간다! 도끼 던져!”
콰아앙!
폭발적인 도격(刀擊)에 마적 셋의 몸뚱이가 날아갔다. 팽만호가 구사하는 팽가도법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였다.
베는 게 아니라 날려 버린다. 약간의 내공을 더 소모하여 뒤에서 밀려드는 전력을 주춤하게 하는 것이다.
멸사군의 군병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적이라고 무조건 죽이지 않는다. 전세(戰勢)를 읽고, 구사하는 무공의 성질까지도 바꾸며 나아간다.
그야말로 백전노장(百戰老將)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판단 능력이었다. 그들의 실전 경험은 고작 수개월에 불과했지만, 단 하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싸우는 동안 이러한 생존 능력을 몸에 붙인 것이다.
퍼억! 퍼억!
거도(巨刀)로 마적을 날리고, 좌권(左拳)으로 근거리의 적을 쓰러트린다. 엄청난 돌파력으로 광룡부가 떨어진 곳까지 간 팽만호가 창대에 발을 걸쳤다.
그의 허벅지가 확 부풀었다.
“군장님!”
티이잉!
팔십 근 광룡부가 허공을 가르며 연호정이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퍼어어억!
교룡쇄를 휘둘러 화려하게 마적들을 물리친 연호정이 그대로 광룡부를 받아 들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치리링!
마침내 묶는다.
광룡부의 창대 끝, 큼직한 고리에 교룡쇄를 걸어 단단하게 고정한 그가 백호기를 있는 대로 끌어 올렸다.
연호정이 차갑게 읊조렸다.
“잘 걸렸어, 쌍노무 새끼들.”
항춘의 눈이 커졌다.
“피, 피해라!”
번쩍! 부아아아아아앙! 퍼버벅!
교룡쇄에 묶여 회전하는 광룡부가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엄청난 원심력을 기반으로 극치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백호기, 나아가 십 성에 이른 벽라진결이 신체를 안정적으로 잡아 둔다.
재앙이다.
연호정은 스스로 태풍의 눈이 되어, 교룡쇄에 연결된 광룡부를 휘둘러 피의 용권풍(龍捲風)을 만들어 냈다.
푸화아아아악!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광룡부에 걸린 마적들의 몸이 그대로 찢겨 날아갔다.
퍼버버버버벅!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그 무거운 도끼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두르는 연호정도 대단했지만, 무지막지한 무게와 완력을 버티는 교룡쇄도 대단했다.
공포에 질린 마적들이 사방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연호정은 그걸 두고 보지 않았다.
터어어엉!
혈익휘천의 보법으로 사방을 오가며 도끼의 폭풍을 일으킨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다. 엄청난 내공을 퍼부어 휘두르는 도끼는, 그 자체로 천하일절의 무공이 되어 적도들을 격파했다.
“이럴 수가!”
허공에 흩뿌려지던 수하들의 피가 바람을 따라 원을 형성하며 높이 솟구쳤다.
핏빛 용권풍이었다. 극한까지 발달한 내공의 힘이, 마적들의 피와 살점을 돌풍과 함께 하늘 높이 날려 버리고 있었다.
철컹!
회전을 멈춘 연호정이 광룡부의 창대를 쥐었다.
‘됐어.’
잠깐의 혈풍무(血風舞)로 마적 수십 명이 죽어 나갔다.
물론 연호정도 멀쩡할 순 없었다. 속전속결을 위해 대량의 내공을 한순간에 쏟아부었으니, 과도한 내공 소모로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니, 고작 그뿐이었다.
‘청룡!’
우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녹청빛 화려한 진기가 타올랐다.
청룡기(靑龍氣)였다. 다른 삼신기를 제쳐 두고 주기(主氣)로 올라온 청룡기는 신체가 받은 부담과 상처를 무서운 속도로 제어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
간장 능력이 활성화되며 탁기를 신장으로 몰았다. 신장에 탁기가 모이자 현무기가 저절로 발동되며 모든 탁기를 기화시켜 버렸다.
당장 입은 내상은 어쩔 수 없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을 내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몸 상태였다.
콰앙!
왼손에는 쇠사슬, 오른손에는 쇠사슬에 묶인 거대한 도끼를 들고 질주하는 연호정의 모습은 지옥을 관장하는 염왕(閻王)의 현신 그 자체였다.
“헉!”
깜짝 놀란 항춘이 등을 돌려 도주했다.
도끼와 쇠사슬로 믿기지 않는 피해를 일으킨 초고수였다. 정면 승부는 말할 것도 없고, 회랑단 수십을 이끌고 붙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죽는다! 무조건 죽을 거야!’
항춘은 있는 힘을 다해 내단으로 달렸다.
그때였다.
“머저리 같은 놈.”
우우우우웅!
우측에서 날아온 광룡부가 호선을 그리며 좌측으로 돌아갔다.
항춘의 눈이 커졌다. 어느새 흑회색 쇠사슬이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말도 안……!’
우두둑! 푸화악!
목이 부러지자마자 그대로 뜯겨 날아간다. 도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잔혹한 공격이었다. 그간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죽이고 능욕해 온 자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됐어.’
싸움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제 숫자가 비슷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과 멸사군의 등장으로 회랑단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끝을 낼 때가 왔다.
“탕마군!!”
연호정이 외쳤다.
“전원 재공격에 들어가! 이각 안에 다 잡는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멸사군장의 외침.
직속상관의 명이 아님에도 탕마군병들은 기다렸다는 듯 돌격했다. 연호정이, 멸사군이 보여 준 무시무시한 능력에 사기가 치솟은 것이다.
“다 죽여 버려!!”
“진격! 진격해라!”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재차 돌진하는 탕마군.
그리고 남은 세 사람 역시 곧바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파아아악!
태극의 진기를 뿜어내며 탕마군의 첨병을 보호하는 옥청.
실전적인 무공을 구사하며 정면으로 마적들을 쓰러트리는 척강.
나아가 신들린 신법으로 하늘을 날며 진기의 화살, 무영탄(無影彈)을 쏘아 대는 묵비까지.
탕마멸사의 합군이 비로소 최대치의 능력을 끌어내 회랑단을 섬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