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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77화 (177/963)

177화. 운명 (2)

화르르르!

타오르는 불꽃이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으아아악!”

“도, 도망가! 어서!”

“도망치지 마! 놈들을 막…… 크아악!”

푸화악!

섬뜩한 파육음과 거친 비명, 쏟아지는 선혈이 대지를 적시는 소리까지.

크고 작은 온갖 끔찍한 소음이 팔방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지옥 같은 소리는, 하나같이 한 상단의 몰락을 알려 주고 있었다.

콰아앙!

놀랍게도 수백의 습격자들은 거대한 돌담까지 통째로 무너트리며 전진했다.

신묘한 무공이나 대단한 전술도 없다. 끄트머리가 사람 머리통만 한 철추(鐵鎚)를 든 거한들이 마구잡이로 벽을 깨부쉈고, 무너진 벽 안으로 화살처럼 빠른 마적들이 침투했다.

단순하지만 손발이 척척 맞는다. 방어막을 부수는 자, 침투하는 자, 원거리 공격에 능한 자 등등 제각기 자신이 나서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습격이 일상인 마적단이라지만 너무나도 체계적이다. 단순한 전술로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는 숙련된 전사들이다.

그것이 회랑단이었다.

퍼어억!

“꺄아아악!”

“아아악!”

모조리 쓸어 버릴 기세다.

경계병은 물론 애어른 할 것 없이 눈에 보이는 족족 다 죽이고 있다.

해룡상단은 저자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그 장소가 그들의 존재감을 한층 특별하게 만들었지만,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공격을 당하게 되면 주변에 알리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물론 상단이 외부의 침략으로 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단은 무림 문파가 아니니까.

“저놈들은 대체 뭐냐!”

영천향은 극도로 분노했다.

“감히 흑도의 무리가 겁도 없이 우리를……!”

그때였다.

펄럭!

저 멀리서 거대한 깃발 여러 개가 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게 보였다.

회색빛 깃발에는 랑(狼)과 적(賊)이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적? 설마 저들이 마적이라고?!’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천지 어떤 마적단이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게다가 그 숫자가 오백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순간 영천향의 눈이 부릅 뜨였다.

“서, 설마 회랑단?!”

회색빛 깃발에 적힌 랑과 적이라는 글자.

새외제일의 마적단이라는 회랑단이 아니고서야 누가 저런 깃발을 휘날리겠는가. 마적단 주제에 저리 고풍스러운 깃발을 들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이었다.

콰아앙!

서쪽 벽이 무너진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북쪽 벽까지 무너졌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머릿수도 많은 데다가 사람 죽이는 일을 예사로 안다. 산동에서 손에 꼽히는 해룡상단이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미 삼백이 넘는 마적들이 외단에 들어와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으며, 몇십은 내단까지 치고 들어왔다.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구효! 퇴로를 확보하고 사람들을 내보내라!”

“다, 단주님! 창고의 재물은……?”

“다 죽게 생겼는데 그깟 재물이 무슨 소용이냐! 당장 사람들을 인도해!”

“알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영천향은 상당량의 재보를 외부에 보관해 둔 상태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에 창고부터 정리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상단원이 비밀 통로를 이용, 샛길을 통한 퇴로로 이동할 때였다.

퍼어어억!

피투성이가 된 사람 셋이 하늘을 날았다.

“헉!”

“마, 마적이다!”

놀랍게도 상단의 수뇌부만이 아는 퇴로 끝에 삼백이 넘는 마적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항춘이 싸늘하게 외쳤다.

“뭣들 하는 거냐? 다 찢어 죽여!”

“으아아아!”

마적들이 괴이한 기합을 내지르며 병장기를 휘둘렀다.

생존의 희망에 부풀었던 이들이 절망을 안고 죽어 갔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따로 없었다.

공포에 질린 것은 영천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무공을 익히고 있었지만, 어디 가서 자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였다.

영천향의 눈에, 돌진하는 마적단 후방에 선 한 남자가 보였다.

“너!”

그 멀리서도 사람을 정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이유.

그것은 그가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이었다.

“고위! 네놈이 왜 거기에 있느냐!”

영고위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영천향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그 고갯짓만으로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마적 놈들과 손을 잡고 가족을 죽이려 들어?!”

그때였다.

“시끄럽게 쫑알대는군.”

콰앙!

마치 거대한 바위가 들이닥친 것 같다.

거구의 몸 그대로 들이받아 십여 명이나 되는 무사들을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 자는 바로 파사륵이었다.

영천향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자신을 노려보는 파사륵의 눈동자는 덩치에 맞지 않게 뱀처럼 사이했다. 그 눈 앞에서, 영천향은 거대한 독사 앞에 선 쥐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네놈이 상단주냐?”

“이, 이놈!”

“이놈?”

파사륵이 커다란 주먹을 망치처럼 휘둘렀다.

콰득!

정수리를 부수고 수직으로 내려와 빗장뼈 사이까지 갈라 버린 주먹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생존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사람이 이렇게 끔찍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파사륵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리 일개 상단이라도 그렇지, 산동에서 손에 꼽힌다며? 근데 뭐가 이렇게 약해 빠졌어?”

충격적인 살인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은 파사륵이 외쳤다.

“남녀노소, 애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잡아 죽여라! 쓸 만한 계집 열만 남겨 둬!”

“우아아아!”

피 보라가 몰아치고, 뜯겨 나간 살점과 뼈마디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비규환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군장님!”

“…….”

“당장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탕마군 이 조장 규벽(叫璧)이 외쳤다.

모용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깊은 눈으로 불타는 해룡상단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규벽은 초조했다.

“군장님!”

그때, 일 조장 진패(秦貝)가 말했다.

“진정하게, 규 조장.”

“이런 시발!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형님!”

“공무 중이다. 사적 호칭은 삼가라.”

부들부들 떨던 규벽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외쳤다.

“군장님! 저희 이 조만이라도 보내 주십시오! 당장 놈들을 치겠습니다!”

그때,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일 개조로 습격해 봤자 의미가 없다.”

“군장님?!”

진패가 외쳤다.

“규 조장! 자네 눈에는 저 마적단의 무용이 보이지 않는 건가! 아무런 작전도 없이 부딪쳐 봤자, 양측 모두 극심한 피해를 볼 뿐이야!”

“……!”

“흥분을 가라앉히게. 자네는 군병 백을 책임지는 백인조장(百人組長)이야. 자네의 섣부른 판단으로 수하들이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걸 상기하게.”

규벽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라고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다만 저 마적 놈들은 무사뿐만이 아니라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범부까지 잔혹하게 죽이고 있었다.

누구라도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적어도 정도(正道)를 아는 사람이라면.

진패가 모용우를 보았다.

‘군장님.’

무표정한 얼굴, 맑고 깊은 눈으로 침공당하는 상단을 내려다보는 모용우.

하지만 진패는 그의 턱이 불거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모용우 역시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수장이 흔들리면 휘하 군병들이 위험해진다. 모용우는 그걸 본능으로 알고 있었다.

잠시 후, 모용우가 말했다.

“일단 싸움부터 멈추게 해야겠다.”

“예?”

모용우가 오 조장 계억(桂憶)에게 말했다.

“멸사군이 화운리를 정리하면 저쪽, 남쪽 계곡을 타고 올라올 거다. 오 조장은 휘하 군병을 이끌고 멸사군에게 가라.”

“멸사군에게 말입니까?”

“연 군장에게 전하라. 일차 기습에 멸사군이 필요하다고. 한 번의 기습으로 승부를 결정 짓겠다고 알려라.”

“……!”

“그렇게만 전하면 알 것이다.”

“존명!”

계억이 오 조 군병들을 이끌고 비탈길을 내려갔다.

모용우가 북서쪽 측후방을 바라보았다.

‘묵 부장.’

멸사군 소속 중 유일하게 남은 사람이 묵비였다. 연호정의 명령 때문이었다.

모용우가 힘차게 왼손을 들어 주먹을 들었다.

그걸로 끝이다. 묵비라면 분명히 그것을 보았을 것이며, 그 뜻도 이해했을 것이다.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전군(全軍).”

차아아앙!

그가 묵직한 대검(大劍)을 뽑아 들었다.

“진군(進軍).”

와아아아!

무서운 속도로 가파른 산길을 타 내려간 사백의 탕마군이 순식간에 해룡상단의 무너진 방벽 십 장 앞까지 도달했다.

그때였다.

피이이이잉!

빠르게 쏘아진 화살 한 대가 모용우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타악!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 왼손으로 화살을 잡아챈 모용우가 그대로 깃대를 부러트렸다.

우우우우웅!

탕마군장으로 모용우를 앉힐 때, 모용군이 하남 최고의 명장(名匠)에게 직접 주문해 만들어 준 명검.

탕마대검(蕩魔大劍)에 건곤팔극진기(乾坤八極眞氣)가 쏟아졌다.

일순 모용우의 안광이 엄청난 살기를 뿜었다.

콰아앙!

마상(馬上)에서 휘두른 일검(一劍)에 타오르던 불길이 흩어지고, 가까이 있던 마적 셋의 몸이 갈려 나갔다.

“……!”

외단의 마적들이 놀라서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두목을 데려와라.”

* * *

“크아아악!”

“이, 이 미친! 너흰 뭐야!!”

퍼어억!

죽엽수 일격으로 마적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 동호가 싸늘하게 말했다.

“우리는 멸사군이다.”

쩌저저정! 퍼억! 서걱!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뒤로 사람 몸뚱이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멸사군은 강했다.

백도 무림의 기둥이라는 구대문파의 진산무공을 익힌 그들이, 무수한 실전과 죽음의 위기를 겪은 끝에 지닌바 무공의 위력을 십 할 이상 뽑아내고 있었다.

처음 전투를 벌였을 때와는 천양지차다.

당시보다 무공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는데도 차이가 엄청났다. 부산스럽던 움직임은 완전히 사라졌고, 군더더기 없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적을 섬멸하는 깔끔한 살검(殺劍)이 회랑단 백오십 마적들을 학살했다.

콰아앙!

그중 가장 튀는 사람은 팽만호였다.

그 역시 실전을 겪으며 예전과는 비교조차 못 할 만큼 강해졌지만, 다른 이들처럼 움직임이 깔끔하진 않았다.

팽만호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타고난 완력과 무공이 철저한 강공(强攻) 위주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전투가 벌어지면 팽만호는 꼭 선봉에 섰다. 초전 일격으로 적의 사기를 꺾어 버리는 데에 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투가 벌어진 지 일각 후.

사상자가 하나도 없는 멸사군과 달리 회랑단은 백오십 중 다섯만 남기고 모조리 죽음의 강을 건넜다.

“크윽!”

천귀(賤鬼)가 이를 갈았다. 그의 몸 전신에는 무수히 많은 칼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너희 뭐야? 설마 무림맹에서 나온 거냐?!”

멸사군병들은 말없이 다섯 마적을 내려다보았다.

천귀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멸사군에는 여인도 꽤 있었다. 평소의 천귀라면 온갖 욕설과 음담패설로 적을 농락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무표정한 얼굴로, 어떠한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눈으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멸사군.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다. 그 기묘한 위압감은 회랑단에서도 가장 독하다는 천귀의 입조차 막고 있었다.

그때였다.

“군장님 오신다.”

치리링!

일제히 병장기를 집어넣은 그들이 신속히 도열했다.

멸사군병 사이로 연호정이 나타났다. 의복 곳곳이 얼룩졌지만, 광룡부의 도끼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

천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지막지한 도끼를 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호정과 시선을 마주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듯했다.

연호정이 물었다.

“이놈들은 왜 살려 두었지?”

여국이 말했다.

“회랑단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일단 놔뒀습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수작인 걸 알기 때문이다.

그때, 땅으로 미세한 진동이 전달되었다.

찰칵!

군병들이 일제히 병장기에 손을 올렸다.

잠시 후, 탕마군의 오 조장 계억이 모습을 드러냈다.

“탕마군장님의 전언(傳言)입니다!”

계억의 말을 들은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기습이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움직이겠네.”

“알겠습니다.”

펄럭!

연호정이 군마에 올랐다.

“군장님. 이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정보를 주겠다는 말은 개수작에 불과하다.”

연호정이 싸늘한 얼굴로 덧붙였다.

“다 죽여라.”

“존명.”

천귀가 다급히 외쳤다.

“자, 잠깐……!”

퍼어억!

다섯 마적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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