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탕마멸사(蕩魔滅邪) (5)
“호오.”
“어떻습니까?”
“멋진 홍옥(紅玉)이군. 이 정도면 최상품이야.”
“역시 알아봐 주시는군요.”
“최상품 홍옥이 두 포대라…… 이번엔 제법 신경을 썼구만?”
“하하, 발품을 제법 팔았습니다.”
연신 손바닥을 비비며 고개를 숙이는 중년 사내를 내려다보는 항춘(杭椿)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가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주님께서 아주 흡족해하실 거야. 잠시만 기다리게. 물품부터 보여 드리고 돌아오겠네.”
“아무렴요.”
항춘이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펄럭!
거대한 막사 입구가 열리더니,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 사내의 얼굴에 두려움이 일었다.
알몸으로 나온 거구 사내의 몸은 엄청난 근육으로 가득했다. 그가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전신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거렸다.
장관이라면 장관이지만, 문제는 그 몸에 묻은 피였다.
피를 본 지 얼마 안 된 듯, 어깨와 쇄골을 타고 흐르는 선혈이 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살벌한 공포심을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중원인도 아니었다. 서역의 피가 섞인 듯, 이국적인 생김새에 눈도 파랬다.
중년 사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 저 사람이 회랑단주(灰狼團主)?!’
거구의 사내, 파사륵(巴査勒)이 좌우로 목을 꺾었다.
우두둑! 우둑!
뼈마디가 어긋난 것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중년 사내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끄응! 벌써부터 뻐근하구먼.”
항춘이 공손하게 말했다.
“단주님, 저자입니다.”
“음?”
파사륵이 나른한 눈빛으로 중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중년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파사륵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홍옥?”
항춘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자들을 바친 사람입니다.”
“하하, 그래?”
파사륵이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마치 고래가 웃는 것처럼 우렁찼다. 낮고 무거운 웃음소리엔 사람의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더는 못 쓰겠지만 말이야.”
중년 사내는 파사륵의 몸에 묻은 피가 어제 바친 여인들의 피라는 걸 깨달았다.
부르르.
그의 몸이 떨려 왔다.
쿵!
파사륵이 맨땅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인가?”
“그, 그렇습니다.”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군. 피붙이의 상단을 털어먹는 놈이라기에 쥐새끼처럼 생겼을 줄 알았더니.”
파사륵이 재차 웃음을 터트렸다.
부아가 치미는 발언이었지만, 중년 사내는 감히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스으, 스으.
보이지 않는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와 사지를 묶는 듯했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생애 처음 포식자와 마주친 새끼 사슴처럼 몸도, 마음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사고가 정지된다. 지독한 공포와 알 수 없는 압박감에 시야마저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오묘한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던 파사륵이 항춘에게 물었다.
“그동안 얼마나 떼어 줬지?”
“이 할입니다.”
“이 할?”
“그렇습니다.”
파사륵이 나직이 휘파람을 불었다.
“엄청나구먼. 평균치가 일 할이지 않았나? 한데 이놈에게는 이 할이나 떼어 줬단 말이야?”
“이자가 가져오는 물품들이 하나같이 괜찮았습니다. 해서 이 할의 값을 쳐주었지요.”
“내가 허락했던가?”
“예.”
“술에 잔뜩 취해 있었나? 기억이 안 나는걸?”
항춘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라도 그간 받아먹은 돈의 절반을 가져올까요?”
무서운 발언이었다.
파사륵이 크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지. 이미 준 돈을 다시 받아 챙기는 건 꼴이 좀 우습잖나.”
한참을 웃던 그가 사내에게 말했다.
“고개 들어라.”
중년 사내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번쩍!
‘헉!’
파사륵의 푸른 눈동자를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파사륵이 물었다.
“네놈, 수완이 제법이더구나.”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히려 우리가 감사해야지. 수수료만 팔 할씩이나 챙겨 가는데.”
“영광입…….”
“됐고, 하나만 묻자고.”
“예, 예?”
파사륵이 음침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 홍옥도 네 형제의 상단에서 공수해 온 거냐?”
“……그렇습니다.”
“상단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항춘이 답했다.
“해룡상단(海龍商團)이라고, 이곳 산동성에서 손에 꼽히는 상단입니다. 벌써 오대(五代)째 내려온 유서 깊은 상단이라더군요.”
“오대? 굉장하군. 우리 같은 마적단과는 태생부터가 다르구만.”
파사륵이 웃자 항춘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중년 사내는 웃지 못했다.
“네놈 이름이 뭐라고?”
“영고위(瑩膏謂)라 합니다.”
“그래, 영고위.”
스륵.
영고위가 움찔했다.
솥뚜껑만 한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 크고 두꺼운 손이 당장이라도 어깨와 빗장뼈를 으스러트릴 것 같았다.
“매번 몰래 떼 오는 것도 귀찮지 않나?”
“……예?”
“우리가 한 달쯤 산동에 있어야 해서 말이지. 돈도 못 벌고 살풀이도 못 해. 얌전히 지내야 할 사정이 있거든.”
파사륵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그전에 크게 재미 한번 보려는데 어떻게, 해룡상단인지 뭔지로 안내 좀 해 줄래?”
“……!!”
영고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해, 해룡상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네놈의 형제들이 운영한다는 그 상단 말이야.”
묻지 않아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작자들은 해룡상단을 아예 와해시켜 버릴 생각인 듯했다. 상단의 재물을 몽땅 집어삼킬 속셈이 분명했다.
‘이, 이런!’
절대 안 된다.
해룡상단은 크다. 그래서 물품을 빼돌리는 게 가능했다. 애초에 형제들이 운영하는 만큼, 자신을 향한 일말의 신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룡상단을 무너트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미워도 피를 나눈 형제들의 터전이었다. 그런 곳에 새외 제일의 마적단이라는 회랑단을 끌어들이는 건 명백한 패륜(悖倫)이었다.
‘……!!’
하지만 영고위는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주르르륵.
그의 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어 들었다.
웃고 있음에도 흉흉한 살기로 가득한 파사륵의 눈빛은, 어떠한 무림 고수보다도 섬뜩한 공포를 자아냈다.
“……아, 안내하겠습니다.”
파사륵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 아주 좋아! 항 부단주, 내가 뭐라고 했어? 이 친구 괜찮을 것 같더라니까.”
“역시 단주님의 안목은 천하제일이십니다.”
“크하하!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 다행이구만. 좋아, 마음에 들었어. 해룡상단을 박살 내면, 그곳에 묻힌 재산의 일 푼은 너에게 주마.”
해룡상단이 보유한 재산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중 일 푼이라면 수 대(代)가 평생을 놀고먹어도 마르지 않을 재산이었다.
공포에 질렸던 영고위의 눈빛 속에 은근한 탐욕이 일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파사륵이 씨익 웃었다.
누런 송곳니가 짐승의 그것처럼 뾰족했다.
“말 나온 김에 밥 먹고 바로 출발하자고.”
* * *
“회랑단이라.”
모용우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장(西藏)과 청해 북부, 그리고 감숙 북부에 걸쳐 노략질을 한다는군.”
“활동 반경이 어마어마한데?”
“그렇지.”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전력이 얼마나 되지? 일단 마적단이라고 했으니 단순 전력은 그리 대단치 않을 것 같은데, 그런 상대 하나 잡자고 합군을 만들었을 리는 없고.”
모용우가 눈을 끔뻑였다.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이 사슴을 닮았다.
“한데 연제는 회랑단에 대해 들어 본 적 없나?”
“없어. 게다가 이번 작전의 주요 골자는 대수(大帥)인 당신에게만 보고됐잖아.”
“물론 그렇지만…… 연가주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시던가?”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시는 분이라. 봉공회의에서 나온 사항 중 당신께서 해도 될 얘기가 아닌 것들에 관해선 철저하게 입을 다무시지.”
모용우는 혀를 내둘렀다.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정말이지 칼 같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세인들이 괜히 판관검(判官劍)이라는 별호로 부르는 게 아니었다.
“말 좀 해 줘 봐. 회랑단이 그렇게 대단한가?”
“대단하지. 일단 회랑단의 단주 자체가 보통 인물이 아닐세.”
“누군데?”
“이름은 파사륵. 별호는 철골악불(鐵骨惡佛)일세.”
“유치함이 하늘을 찌르는 별호로군.”
“별호는 그렇지만, 놈의 무공은 그렇지 않네.”
“얼마나 강하길래?”
“정확히는 몰라도, 나에 비해 크게 모자라진 않을 거야.”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적단 두목의 무공이 그 정도라고?”
“과거 감숙에서 활동했을 당시, 옥문칠협(玉門七俠)이라는 협사들과 붙은 적이 있었다더군. 옥문칠협은 일곱 모두가 절정고수로, 감숙 북부에서는 움직이는 중소 문파라 불릴 정도로 혁혁한 무위를 자랑했던 모양이야.”
“설마?”
“그렇다네. 회랑단주 파사륵이 그들과 정면으로 붙어 모조리 참살했다고 하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상한 놈이군. 그 정도 무공을 연성했음에도 고작 마적단 두목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세상에는 여러 유형의 사람이 있다. 당장 당상아조차도 심심해서 모용우의 뒤를 밟지 않았던가. 그것도 무림맹에서.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혀도 천성이 지랄맞으면 산적질이나 하면서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결코 많지 않겠지만.
“그뿐만이 아니야. 회랑단을 이루는 마적의 수는 물경 일천에 달하네.”
“일천……?”
“인종과 나이 또한 다양하다고 하네. 괜히 새외 제일의 마적단이라 불리는 게 아니겠지. 심지어 그들 대부분이 상당한 무공까지 익혔다는군.”
연호정이 혀를 내둘렀다.
“마적단이 아니라 거의 문파라고 봐도 되겠군.”
“하는 짓은 전형적인 마적단의 그것이지만, 전력만큼은 누구도 무시 못 하지.”
“한데 그놈 말이야. 이름이 파…… 음.”
“파사륵.”
“그래, 파사륵. 그놈 별호에 왜 악불(惡佛)이 들어가는 거지? 뜬금없이 궁금하네.”
분위기나 풀 요량으로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뜻밖에도 모용우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그가 익힌 무공 때문이라고 하네.”
“무공?”
“파사륵은 서장 소뢰음사(小雷音寺) 출신일세.”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소뢰음사라?’
소뢰음사는 새외 무림의 절대강자 중 하나다.
‘새외…… 새외라.’
왜일까?
새외의 마적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마적단의 두목 놈이 소뢰음사 출신이라고 하니 문득 광신삼교가 떠올랐다.
‘후개가 조사하기로는 아직 새외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었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혹시 그놈, 그쪽과 연결된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과한 생각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냐고 묻는다면 쉬이 단정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삼교, 그 미친 개자식들이 침공하기 전에도 새외의 세력 중 일부가 중원을 들쑤셨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정도면 충분히 들었어. 그래서 출발은 언제 할 거야?”
“나한테 묻는 건가?”
“댁이 대수잖아.”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언제 출발하면 좋겠나?”
“꼴릴 때 가. 어차피 명령받는 처진데.”
“반나절 뒤에 다시 출발토록 하세.”
“그러지.”
“한데 왜 형이라고 안 부르시는가?”
연호정이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반나절 뒤에 보자고, 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