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탕마멸사(蕩魔滅邪) (2)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창창한 검기(劍氣)가 느껴지기에 혹시나 했거늘, 연가주께서도 계셨구려.”
사석이라 그런지 회의 때와는 말투가 달랐다.
연위가 포권을 취했다.
“방장 대사.”
소림 방장, 공공대사가 반장(半掌)으로 인사를 받았다.
연위가 연호정에게 눈짓했다.
연호정이 정중하게 포권했다.
“연가의 연호정입니다. 방장 대사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나 역시 영광일세. 이렇게 사석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지?”
“그렇습니다.”
고개를 든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역시.’
평범한 체구.
회색빛 승복에 붉은 가사를 걸친 공공대사의 외양은 그야말로 법력 높은 승려의 정석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 두고 있는 묵직한 힘은 마치 황금빛으로 가득한 바다와도 같았다.
‘크다.’
불어오는 강풍에도 잔물결조차 일지 않는 밀도 높은 해수(海水)가 공공대사의 삼단전(三丹田)을 빈틈 하나 없이 꽉 채우고 있었다.
그것도 그저 추측에 불과할 뿐이었다. 지금 연호정의 경지에선 공공대사가 품고 있는 힘의 총량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태산북두.’
과거 흑암제 시절에는 만나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러나 소림의 무승들과는 몇 번이나 공동 전선을 펼치며 적도들을 격파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함께 싸웠던 이들 대다수는 일대제자로, 그 연배는 연호정보다 비슷하거나 아래가 많았다.
그런 그들의 무공은 하나같이 놀랍도록 대단했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夫出少林). 천하 모든 공부가 소림에서 나왔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나아가 흑암제 시절에 이루었던 무공의 경지는 지금의 공공대사를 압도했다. 그런데도 연호정은 공공대사가 품고 있는 힘의 밀도에 깜짝 놀랐다.
‘무슨 놈의 내공이 이렇게 무지막지한지.’
연위가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수행원 하나 없이 예까진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천하의 연위도 공공대사 앞에서는 깍듯했다. 연배의 차이도 있었고, 소림 방장이라는 특출난 무게감 때문이기도 했다.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가주.”
“말씀하십시오, 대사님.”
“내, 잠시 가주의 장자와 얘기 좀 나누어도 되겠소이까?”
연위가 놀란 눈으로 공공대사를 보았다.
‘…….’
공공대사의 눈은 맑았다.
그 눈빛이 얼마나 깊고 맑은지, 보다 보면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어중간한 수행으로는 보여 줄 수 없는 깨달은 자의 혜안(慧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처럼 놀라운 내공과 막강한 무공을 연성했음에도 얼굴에는 잔주름이 가득했다.
밀도 높은 기(氣)를 품고도 외양은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순리를 역행하지 않는 힘, 천년을 이어져 내려온 소림의 신공(神功)은 그처럼 자연스러운 강함을 추구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고맙소.”
연위가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때, 공공대사가 말했다.
“자네, 팔십 근이 넘는 중병을 쓴다고 했던가?”
“예? 아, 예.”
“이왕이면 그것도 들고 오시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연호정은 전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 광룡부를 들었다. 혹시 몰라서 교룡쇄까지 챙겼다.
교룡쇄를 본 공공대사의 얼굴에 은근한 흥미가 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자, 가세나.”
공공대사가 연호정을 데리고 향한 곳은 맹내 깊숙한 곳에 있는 숲속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공공대사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수풀을 헤치며 걷던 두 사람의 눈 앞에 마침내 큼직한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라…….’
그 너비가 굉장했다. 아버지와 비무를 벌였던 내성 연무장보다 세 배는 더 넓은 듯했다.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저곳일세.”
“예.”
이윽고 두 사람이 공터 중앙에 섰다.
연호정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대놓고 싸우라고 만들어 놓은 장소 같군.’
실제로 최근에 누군가가 이곳에서 과격한 수련을 한 모양이었다. 땅 여기저기에 긁히고 터진 자국이 잔뜩 남아 있었다.
“인내심이 좋구먼.”
연호정이 공공대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공대사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예까지 오면서 입 한번 떼지 않다니,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참을성이 좋아.”
“생각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인내심이 뛰어난 게 아닙니다.”
“허허허.”
공공대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정식으로 인사함세. 숭산 소림의 주지승방에 틀어박혀 소일거리로 시간 죽이는 땡중일세.”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상당히 인상적인 자기소개였다. 보통 소림사 방장이라 하면 자비롭고도 무게감 있는 인상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공공대사는 달랐다.
아마 공석과 사석에서 보여 주는 모습도 다를 것이다.
“가족들 가슴에 대못 박다가 얼마 전에야 정신 차린 연가의 머저리입니다.”
공공대사가 재차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무슨 해괴한 소개인가?”
“대사님만 하겠습니까.”
초면인데도 꽤 친숙한 말투였다.
공공대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소문과는 다르구먼.”
“예?”
“타고난 재능이 오로지 무공에만 집중된 다혈질 청년이라고들 하더니만, 세간의 소문과는 전혀 다른 것 같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호장(虎將)은 호장인데, 여우의 꾀와 뱀의 지혜는 물론 용과 같은 천변만화의 얼굴까지 지닌 인재로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칭찬이 과하시군요.”
“그런가? 허허, 과하면 또 어떠한가. 꾸짖음이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좋은 말은 과해도 문제 될 게 없을 듯하네.”
“칭찬이 과하면 사람이 오만해집니다.”
“자네, 그런 사람인가?”
“그럴 수도 있죠.”
“우리끼리 있어서 하는 얘긴데, 자네 연배에 그만한 무위면 조금 오만해져도 괜찮을 것 같네.”
묘하다.
분명 불법(佛法)을 깊이 익힌 소림의 방장인데, 지금의 대화는 마치 범인(凡人)들끼리의 대화 같다.
‘승려의 입에서 오만해져도 괜찮다는 소리가 나온다?’
독특하다.
진심임이 분명한데, 그게 또 달리 보면 오묘하다. 정말 그럴 생각인지 돌려서 묻는 것 같기도 했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뭐가 됐든,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야.’
공공대사가 물었다.
“왜? 소림 방장답지 않은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귀신이 따로 없으십니다.”
“떽! 땡중이라도 불법을 좇는 사람한테 귀신이라니?”
“……이상한 데서 발끈하십니다.”
“허허, 해서 대답은?”
“방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다?”
“사람 성격은 제각기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승려든 도사든 결국엔 같은 사람인데, 깨달음을 좇는다고 하여 천성까지 비슷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허허허!”
공공대사는 크게 웃었다.
호탕하게까지 들리는 그 웃음소리에 유쾌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연호정의 말이 제법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나는 확실한 것 같네. 이제껏 소림 방장 앞에서, 그것도 초면에 자네처럼 당차게 말한 사람은 없었네.”
“당차지 못할 이유도 없지요.”
“그렇지.”
공공대사가 눈을 빛냈다.
“바로 그걸세. 속세의 예법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필요 이상으로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지.”
“마음에 드셨습니까?”
“충분히.”
연호정이 표정을 굳혔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저를 이곳에 부른 이유를.”
“이유?”
공공대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는 이 장소가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냥 비무입니까?”
“비무가 아니면 굳이 자네에게 그 무거운 도끼까지 챙기라고 했겠는가?”
연호정은 조금 당황했다.
“그렇습니까……?”
“허허허. 자네의 그 얼굴, 이제야 제 나이대의 청년처럼 보이는군. 안심했네.”
안심이라?
공공대사가 합장하듯 손뼉을 마주하곤 서서히 펼쳤다.
“말이 너무 길었구먼. 자, 슬슬 시작해 보세.”
연호정은 말없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비무라?’
첫인상, 그리고 약간의 대화면 얼추 상대의 성격이나 반응이 어떨지 감이 잡힌다.
하지만 공공대사는 아니었다. 벽산호장의 눈으로도, 흑암제의 눈으로도 공공대사의 진짜 모습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의도를 읽기가 어려웠다.
‘…….’
한참이나 공공대사를 응시하던 연호정이 광룡부를 정면으로 세워 들었다.
공공대사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아까도 놀랐네만, 정말 가볍게 드는군.”
“주병기니까요.”
“그 쇠사슬도 보통 물건은 아니겠지?”
“혹시나 해서 챙겨 왔습니다.”
“허허허.”
공공대사가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까?”
“그러십시오.”
“자네를 부르기 전에, 모용 군장과도 한판 했다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탕마군장과 말입니까?”
“그렇다네. 대단하더군. 비무는 고작 일각에 불과했지만, 그 잠깐 새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네.”
“호오.”
연호정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드리워졌다.
공공대사의 눈이 반짝였다.
‘진심이로군.’
호승심이나 질투 따위의 감정이 보이지 않는 맑은 웃음이었다.
의외였다. 뛰어난 젊은이일수록 또 다른 천재의 성장에 조급해하기 마련인데, 연호정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었다.
‘자신감인가? 아니면 상대를 순수하게 인정하는 것일까?’
뭐가 되었든 확실히 범상치 않다.
연호정이 공공대사의 진면목을 읽지 못했듯, 공공대사 역시 연호정의 진면목을 읽지 못했다.
그것은 공공대사에게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에겐 연호정처럼 무지막지한 아수라장을 헤쳐 온 경험은 없었지만, 타고난 지혜와 소림의 신공, 그리고 수행으로 얻은 진안(眞眼)이 있었다.
‘역시 부르길 잘했구먼.’
공공대사가 물었다.
“이제 진짜 시작해 볼 텐가?”
“……좋습니다.”
쿠웅!
강력한 진각에 대지가 뒤흔들렸다.
공공대사의 눈이 반짝였다. 대지를 통해 전달되는 연호정의 각력(脚力)에 감탄한 것이다.
연호정의 웃음이 서늘해졌다.
“요새 하도 머리를 썼더니, 단순했던 때의 제 모습을 잠시 잊었지 뭡니까.”
“허허허.”
“알아서 다 받아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바로 소림 방장이라네.”
그때였다.
번쩍!
공공대사의 눈이 커졌다.
‘허어?!’
화르르르륵!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연호정이 일 장 거리 앞까지 도달했다.
‘빠르도다!’
거대한 불덩이가 쏘아진 것 같다. 전신 가득 피어오르는 시뻘건 진기의 광채가 마치 화신(火神)의 날갯짓 같았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번쩍! 콰르르릉!
무시무시한 난격(亂擊)이 땅거죽을 뒤집어 놓았다.
아주 약간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 진짜 공격이었다. 주작기(朱雀氣)에 살기를 담진 않았지만, 애초에 주작공 자체가 악랄한 살법이었다.
파라라라락!
허공으로 날아오른 공공대사의 가사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굉장하구나.’
일초 육식의 자비 없는 도끼질.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시작부터 이렇게 난폭한 공격을 퍼부어 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게다가 저 보법은……?’
파아아악!
공공대사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이번엔 보법이 아니라 신법이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날아오르는 연호정의 모습은 고고한 군자의 자태를 연상케 했다.
흉악한 도끼를 든 군자.
도무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울리는 그 모습에, 창천하는 투기(鬪氣)에 공공대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시작부터 이러긴가!”
“다 받아 주신다면서요!”
공공대사가 힘차게 손을 뻗었다.
퍼어어엉! 카앙!
부드러운 장력에 맞은 광룡부가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날아가 땅에 박혔다.
공공대사의 눈이 번뜩였다.
‘주병기를 놔?!’
파악.
어느새 연호정이 그의 좌측에서 나타났다.
공공대사는 내심 깜짝 놀랐다.
‘읽었다?’
연호정이 살벌하게 웃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대사님.”
그의 주먹에서 백호기(白虎氣)가 터져 나왔다.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