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탕마멸사(蕩魔滅邪) (1)
거처로 들어온 모용군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호경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가주…….”
그때, 모용군이 손을 들었다.
냉정한 손짓에선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호경은 고개를 꾸벅 숙이곤 방을 나섰다.
그렇게 방에는 모용군 혼자 남았다.
척 하니 다리를 꼬곤 검지로 탁자를 툭툭 두들기는 그의 모습에는 묘한 위화감이 가득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순 모용군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모를 줄 알았더냐?”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용군의 눈빛은 짐승처럼 매서웠고,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만큼이나 깊고 지혜로웠다.
“제갈가주를 앞에 내세우면, 네놈이 뒤에서 조종했다는 사실을 내 모를 줄 알았더냐?”
싸늘한 미소와 그보다 천배는 더 차가운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던 모용군.
이내 그가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하!!”
방 전체가 떠나가라 터져 나오는 웃음에 속 시원한 감정이 깃들었다.
“정말이지 네놈의 수완은 못 당해 내겠구나. 과연, 이 모용군이 손에 넣고 싶어 할 만한 인재로다. 창설식에서 쫓아내 버렸더니, 대뜸 머리채를 쥐어뜯어 버리는군.”
대단한 놈이다.
출중한 지략에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갖춘 것도 모자라, 이제는 무림맹의 정점, 맹주부까지 건드려 버린다.
세상에 이런 놈이 있나 싶었다. 이건 능력의 여부를 떠나서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 수 있는 놈이 아니면, 감히 시도해 볼 엄두조차 못 낼 방법이다.
이건 배포도 뭣도 아니다. 그냥 미친 거다.
‘미쳤지만, 그 광기를 감당할 정도의 그릇이 된다는 게 더 문제지.’
어지간한 천재도 자신보다 배분 높은 육대세가의 가주들을 방패 삼아 대국을 휘어잡겠다는 생각은 감히 못 할 것이다.
‘한데 그놈은 그걸 한다.’
그게 연호정이다.
열혈의 무장(武將)이라는 거죽을 뒤집어쓴 음험한 전사. 어떤 의미로 그 독함은, 사천당가보다도 더한 것 같다.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이 모용군이 상대의 함정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적이.’
연호정에게 한 방 먹고 독립 유군의 대장으로 만든 것?
그런 건 별 게 아니다. 오히려 유군 부대를 두 개로 만들어 모용우의 자리까지 만들지 않았나.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은 정치가에게 필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법이 없다.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고 했지만, 이미 봉공 과반수가 찬성하는 듯했다.’
얘기가 나온 이상, 부맹주 직책은 어떻게든 밀어붙여질 것이다.
자리를 분산한다는 것은 권력을 나누겠다는 뜻. 백도 정파에서 권력 밀집을 반기는 문파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시간은 다소 걸리겠지만, 분명 통과될 것이다. 다만 부맹주직 두 개는 과하니, 하나로 줄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겠지.
‘중요한 건 맹주의 독재를 방지하는 부맹주라는 직책 자체에 있다. 일부러 두 자리나 제안한 것은 부맹주라는 위치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겠지.’
모용군의 볼이 씰룩였다.
‘이건 연호정이 아니라 제갈가주의 꾀인가?’
제갈문호는 여우다.
과거 맹법 운운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 제갈문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엄한 출정 시기를 들먹이며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각기 다른 사안이라도 두 번이나 연달아 부정하기란 힘들 테니까.
심지어 그 사안을 낸 사람이 맹의 중요 인사인 군사라면 더더욱.
“끝내주는군.”
모용군이 고소를 지었다.
“불세출의 천재와 노회한 지략가가 손을 잡으니 참으로 무섭군. 제대로 한 방 먹었어.”
다만 여태 의문이 사라지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었다.
“왜 서둘렀을까?”
분명 제갈문호는 자신이 봉공회의를 앞당길 것을 예측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부맹주직에 관한 사항을 터트리려 했다.
‘굳이?’
빠르든 늦든 결국 하루 차이다. 회의가 제때 열렸더라도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시기를 앞당겨 방심을 유도하고, 결정적인 한 수로 부맹주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끝일까? 굳이 아미의 속가제자들까지 동원해서 이쪽을 안달 나게 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
순간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너……?”
연호정이 떠올랐다.
문사처럼 선이 얇은 얼굴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천재의 표정이.
“아미파 장문사태를 완벽히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날 이용한 거냐?!”
복호사태는 소림, 무당의 장문인과 더불어 의협에 큰 가치를 두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려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명백한 적을 만들고, 그 적의 악랄함을 부각시키지 않는다면 절대 아군으로 만들 수 없다.
“허! 이거 이중, 삼중으로 당해 버렸구나.”
복호사태가 저쪽 편으로 넘어갔다는 건 알았지만,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복호사태의 협의와 도덕은 봉공들도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목소리에 그만한 힘이 있다는 뜻이다.
착한 사람이 힘을 쥐고 있을 때, 진정 무서워질 수 있는 순간은 바로 악(惡)이 나타났을 때다.
연호정과 제갈문호는 복호사태에게 모용군을 악(惡)이라고 각인시킨 것이다.
“당파 싸움……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었던가.”
모용군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들었다.
“허허, 의심할 나위 없는 완벽한 패배로다.”
방심한 틈에 이런 역공을 맞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다.
여러모로 어지러운 날이었다. 모용군은 거처에 틀어박혀 한참이나 툴툴거렸다.
* * *
“그렇게 되었군요.”
“그렇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차를 마셨다.
표정에 어떠한 변화도 없는 아들을 물끄러미 보던 연위가 넌지시 물었다.
“당파 싸움으로 몰고 갈 생각이라 했더냐?”
“예?”
“이번에 복호사태를 끌어들인 것 말이다.”
“아,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얼굴이 진지해졌다.
“모용군과 손을 잡은 세력은 최소 넷입니다. 그만한 힘이라면, 봉공회의에서 나오는 안건들을 입맛대로 바꾸기에 충분할 테지요.”
“음.”
“그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림맹주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겠지요.”
“…….”
“그런 그의 앞길에 가장 방해가 될 사람이 저를 비롯한 몇몇입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는 봉공이고, 저는 일개 유군 대장이잖습니까.”
“그쪽은 머리에 있고 너는 신체 말단부에 있으니,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다는 뜻이냐?”
“그런 것도 있고요. 무엇보다 그자는 악랄한 정치에 능합니다. 봉공 중 모용군 같은 사람이 또 없으리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
“힘을 숭상하는 흑도 사파라면 모르되, 백도 정파에서 권력이 밀집되는 것은 여럿을 불행하게 만들 겁니다. 누가 맹주가 되었든, 맹주의 과격한 독재를 막을 수 있는 자리는 만들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연위는 기가 막힌다는 눈으로 아들을 보았다.
“정말이지 대단하구나.”
“예?”
“가끔 너와 대화하다 보면, 대체 어디서 그런 출중한 안목을 길렀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그런 놀라운 모습을 한두 번 보여 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사소한 재주에 불과합니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은 어디에도 있다.
연호정의 정재(政才)는 그러한 자들을 상대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흑도를 제패한 수단은 힘이었지만, 제패한 흑도를 다스리는 데에는 예민한 감각과 안목이 필수였다. 흑제성주라는 자리를 노리는 자들을 셀 수도 없이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본질을 보는 안목이 성장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었다. 결국 백도도 흑도와 다르지 않은 구정물 가득한 세상일 뿐이라는 걸.
“어찌 되었든, 이번 판에서 모용군은 어떠한 대항 수도 없이 제대로 한 방 먹었습니다. 당분간은 숨죽이며 지낼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외적으로는요.”
“음?”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같은 부류로 얽히고 싶진 않지만, 저나 모용군은 당한 건 반드시 갚아 주는 유형의 인간들입니다. 앞에서는 조용히 지내겠지만,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밀지 알 수 없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너와 모용군은 다르다.”
앞날을 조심하는 것 이전에, 그 부분을 분명하게 해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닮은 구석이 있으면 또 어떻습니까. 천성이 같아도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성인(聖人)이 될 수도, 악인(惡人)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위가 희미하게 웃었다.
“해서, 너는 어느 쪽인 것 같으냐?”
“적어도 성인은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천성이 제법 쪼잔하잖습니까.”
연호정의 얼굴이 재차 진지해졌다.
“어찌 되었든, 모용군이 작정하고 무언가를 몰래 꾸민다면 그걸 알아낼 방도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결국 조심,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요.”
물론 모용우를 통한다면 어떻게든 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탕마군과 멸사군은 함께 출정한다. 모용우를 통해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며, 설령 알아낸다 한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모용우라는 치명적인 패가 들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는 당해 줄 필요도 있다. 문제는 수위를 어떻게 조정하느냐다.’
잘 조정해야 한다. 이쪽의 의도가 들키지 않도록, 지금처럼 자신을 상대하기 쉽지 않은 젊은 난적(亂敵) 정도로 인식하도록.
연호정은 알지 못했다. 모용군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쪽에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그런 것은 제아무리 안목이 뛰어나도 알기 힘든 부분이었다. 연호정 자신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대응이었지만, 상대에게는 아니기 때문이다.
머리로 짐작은 하지만, 체감은 못 한다.
그게 연호정의 빈틈이라면 빈틈일 것이다.
“일단 이 정도까지 해 놨으니 예전처럼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그렇습니다.”
“이쪽 걱정은 하지 말고, 네 몸부터 잘 추스르도록 해라. 이제 출정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래도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능력과는 관계없는 문제였다.
연위에게 연호정은 아들이었다. 자식이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식일 뿐이었다.
“탕마군과는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마는, 괜스레 전공(戰功)을 세우겠다고 다투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비록 모용군의 사람이지만, 탕마군장의 인물됨이 몹시 뛰어나더구나. 적의 섬멸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몸 성히 돌아오는 것이니 서로 잘 도와 가면서 움직이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연위는 한참이나 연호정에게 애정 어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좋은 소리도 여러 번 듣다 보면 기분이 안 좋아지기 마련이라 했다. 그러나 연호정은 아버지의 잔소리가 마냥 좋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저 삼교의 난을 헤쳐 나간 이후에도 이렇게 잔소리를 듣고 싶었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 마지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
“…….”
부자의 눈매가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이 기운은?’
그때, 저 멀리 대문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연 군장 계신가?”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