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매듭을 짓다 (4)
사흘 뒤.
“무어라?”
모용군의 표정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탕마멸사군의 출정을 미룬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그렇습니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따위 망발을 뱉었단 말인가?”
모용군은 드물게 화를 냈다.
그럴 만도 했다. 탕마멸사 합군(合軍)의 출정 시기는 물론, 표적까지도 정해 놓은 상태였다.
특히나 그 표적은 무림에서도 골치 아프기로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지만, 믿을 만한 정보원에게 그들의 이동 경로와 한 달 동안 머물 곳까지 들었다.
딱 그곳만 타격하면 끝난다. 어차피 멸사군이 선봉에 설 것이고, 화려하게 해치우고 나면 그 공은 전부 합군의 대수인 모용우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걸 시작으로 차근차근 탕마군의 위용과 모용우의 가치를 알릴 생각이었거늘, 출정 시기를 늦추다니?
“그것이…….”
모용군의 제일 심복, 호경(豪耿)이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일단 그 얘기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아미파(蛾眉派)의 장문인이라고 합니다.”
“복호사태가?!”
“그렇습니다.”
치솟던 분노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무림맹의 수뇌부에는 봉공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능력과 명성에 따른 인선 배치로 각 조직의 수장을 정했고, 그중엔 봉공들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고아한 명성을 떨친 자들도 꽤 있었다.
얘기가 나왔다면 아마 그들에게서 나왔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아미파 장문인이라니?
‘뭔가 있다.’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은 그였다. 지금의 그를 있도록 만들어 준 날카로운 지략이 불길함을 감지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모용군이 말했다.
“봉공회의를 거치지도 않은 문제이거늘 그런 중차대한 얘기가 돌았을 리는 없네. 누군가가 일부러 퍼트린 것이 아닌가?”
“그게…….”
호경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멸사군 소속 군병 중 아미의 속가제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식당에서 대화하는 소리를 우리 측 사람이 들었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애송이들이라?’
멸사군 소속 군병 중 제대로 된 연륜을 쌓은 자는 하나도 없다고 알고 있었다.
“가서 아미파 속가제자들의 신상 명세를 받아 오게.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났다.
“가주님.”
호경이 문서 몇 장을 건넸다.
송연경을 시작으로, 아미파 속가제자들의 신상 명세가 적힌 문서였다. 그들의 무공 수위, 성격, 문파에서의 위치 등이 자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한참이나 문서를 살펴보던 모용군의 손에서 일순 시퍼런 기운이 일었다.
팍! 화르르르.
위협적인 전광(電光)이 일더니 문서들이 한 줌의 재로 변해 사라졌다.
“봉공회의가 언제라고 했지?”
“이틀 뒤 정오입니다.”
그 회의에서 탕마멸사군의 출정 준비 사항을 재검토한 후, 정확히 닷새 뒤에 출정시킬 예정이었다.
‘애송이들의 위치나 성격만 보고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모용군은 한옆에 쌓인 서류를 보았다. 출정 전 마지막 봉공회의 때 건의할 안건들이 적힌 문서들이었다.
“공공대사는?”
“현재 거처에 있습니다.”
“가서 전하게. 화급을 다투는 사항이 있으니 내일 아침으로 당기자고.”
* * *
다음 날 아침, 무성전 회의실에 봉공들이 모였다.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모용 봉공께서는 어인 일로 우리를 소집하셨습니까?”
대답에 앞서 모용군이 봉공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복호사태에게 멈추었다.
‘…….’
복호사태는 상당히 평온한 기색이었다. 갑작스레 앞당겨진 회의에도 그리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알고 있었군.’
자신이 어떻게 나올 건지 이미 알고 있다.
‘복호사태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평생을 정도(正道)와 협행(俠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야.’
여러 봉공들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한 봉공이 총 셋이 있다.
바로 소림(少林)과 무당(武當), 그리고 아미(蛾眉)였다.
이 세 문파의 수장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그래서 신중을 기했거늘,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만약 이 일이 복호사태가 의도한 게 아니라면.’
그의 눈이 연위에게로 향했다.
‘연가주는 아니고.’
어떤 의미로는 복호사태보다도 더 딱딱한 인간이다. 게다가 그는 멸사군장 연호정의 아버지였다. 법도와 체면 때문에라도 멸사군에 관한 일은 쉽게 언급하지 못한다.
‘팽가주일 가능성도 희박할 것이며.’
그의 눈이 최종적으로 제갈문호에게 향했다.
느릿한 동작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그의 자태는 실로 제갈공명의 환생과도 같았다.
‘군사로군.’
공공대사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모용 봉공?”
“……말씀드리겠습니다.”
모용군이 다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최근 산동 쪽에 불법적인…….”
그는 가지고 온 서류들에 적힌 내용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전달했다.
양이 제법 많았고, 그중엔 심각한 사안들도 있었다. 당장 민생에 악영향이 가는 사안도 있었기에 회의장의 분위기는 상당히 무거워졌다.
하지만 봉공들은 알고 있었다. 모용군이 회의를 앞당긴 이유가 저 서류에 적힌 내용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정치에 능하지 않아도 수개월 동안의 회의를 거치며 이해한 분위기가 있다. 봉공들은 모용군의 본심이 나올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잠시 후.
“오늘 제시할 안건들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리고…….”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마지막으로, 탕마멸사 합군의 출정 시기에 대해 논해 보고자 합니다만.”
화산 장문인, 용화진인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합군의 출정 시기는 닷새 뒤로 정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하루라도 먼저 회의를 거치고, 이후 합군의 군병들에게 작전 사항을 전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으음.”
“멸사군은 수 개월간의 실전을 겪으며 손발을 맞춰 왔습니다. 그러나 탕마군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원도 많은 만큼, 하루라도 시간적 여유를 줄 필요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용화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기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우려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다만 창설식 때 본 모용 군장의 무공과 존재감이 실로 인상적이었기에, 그 부분은 안도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탕마군을 이루는 자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명성이 자자한 실력자들이 아닙니까. 모용 군장이 잘 이끈다면, 별다른 피해 없이 임무를 달성할 수 있을 겁니다.”
용화진인이 마주 웃었다.
“다만 하루의 시간 정도는 더 벌어 주는 것이 군(軍) 전체의 사기에 도움이 될 듯하군요. 저는 모용 봉공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감사합니다.”
정치적 동행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게다가 화산파는 고래로 무당파와 함께 천하제일검문(天下第一劍門)을 다투던 문파였다. 그런 문파의 장문인이 동조하니 여러 봉공이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그 부분에 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당신인가.’
제갈문호가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탕마멸사군의 출정 시기를 조금 늦추는 것은 어떻습니까?”
남궁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확정한 출정 시기를 왜 늦춘단 말입니까?”
제갈문호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사실, 예전부터 그 부분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멸사군 같은 경우, 창설식도 없이 출맹하여 무수한 공을 세웠습니다. 탕마군을 이루는 군병들의 면면 역시 뛰어나니, 그들이라고 못할 건 없겠지요.”
“옳은 말씀이오.”
“다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멸사군이 출정했을 때는 맹의 체계가 잡혀 있지 않았던 때였습니다만, 지금은 확실한 체계와 조직도가 잡혀 있지 않습니까.”
연위가 짧게 물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공동파 장문인 등천교(登踐郊)가 눈살을 찌푸렸다.
“탕마군장 모용우의 능력은 탁월합니다. 이미 정해진 출정 시기가 늦춰지면 달아오른 사기가 무너질 겁니다.”
“등 봉공님 말씀대로 모용 군장의 능력이 탁월하니, 무너진 사기를 잘 다독여 줄 수 있을 겁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상당히 거친 발언이었다. 거칠기로는 누구 못지않다는 공동파 장문인다운 말투였다.
무당 장문인 승현진인이 말했다.
“제갈 군사.”
“말씀하십시오.”
“부족한 이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출정 시기를 늦추는 것은 문제가 될 듯합니다. 물론 준비를 더 철저히 한다면 좋겠지만, 출정이 며칠 남지도 않았거늘 이제 와 시기를 조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는지요?”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긴, 저 역시 그 부분이 걸리기는 했습니다.”
제갈문호가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맹의 조직 체계가 잡힌 상황에서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저의 성급한 발언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깔끔한 사과였다.
봉공들 대부분이 웃으며 괜찮다 말했지만, 모용군은 그럴 수 없었다.
‘뭐지?’
모용군의 눈이 가늘어졌다.
‘벌써 포기한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복호사태의 표정을 보면 답이 나온다. 제갈문호는 자신이 회의를 앞당길 것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 마침 출정 시기에 관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참에 저도 건의할 게 하나 있습니다.”
모용군은 움찔했다.
‘건의?’
뭐지?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는 저 반응은?
순간 모용군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기다리고 있었나?!’
소문을 내서 회의를 앞당긴 것, 그리고 출정 시기에 관한 얘기까지 전부 미끼였단 말인가?
‘……대체 무엇을 위해?’
제갈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다름 아니라 맹주부(盟主部)에 관한 얘기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봉공들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논의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그래, 어떤 부분을 건의하실 생각이신지요?”
“맹주직은 참으로 영예로운 자리입니다. 하지만 체계가 잡혔다 한들, 어떤 분이 맹주가 되어도 초대 무림맹을 이끌어 가기에는 다소 힘이 드실 것이 분명합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적인 측면에서 말이지요.”
“그래서요?”
“해서 건의합니다.”
제갈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새로이 창설될 맹주부에 두 개의 부맹주(副盟主)직을 만드는 것은 어떨는지요?”
하나도 아니고 둘.
봉공들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걸 보며, 모용군은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당했다.
* * *
“부맹주라…… 이해는 가는데, 왜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민 거요?”
“권력 밀집을 경계하고자 함이오.”
“하지만 맹주라 해도 봉공들을 무시할 수는 없잖소?”
“그러나 봉공 중 맹주를 지지하는 이가 과반수가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소?”
“……!”
“견제 세력은 무조건 만들어야 하오. 권력 기관은 천하를 위해서만 존재해야 의미가 있소. 한 사람의 정치적 능력으로 좌우되어서는 안 된단 말이오.”
“허어.”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으며 창밖을 보았다.
햇살이 참 좋다.
“맹주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반대 당파도 끌어안을 수 있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