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매듭을 짓다 (2)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디서 지진이라도 났나? 눈빛이 그렇게 흔들려서야.”
솔직함은 당관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은 그 솔직함이 지독한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물끄러미 당관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다리를 꼬았다.
방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다. 하지만 당관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처음에는 홍요회, 이놈들이 미쳤나 싶었더랬지. 창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무림맹의 유군을 묻으려 들어? 천하의 이목이 집중될 게 뻔한데? 와, 이놈들 정말 소문대로 막 나가는 집단이구나 싶었어.”
“…….”
“한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되더라, 이 말이야. 그 짧은 시간에 흑도의 저명한 문파를 몇이나 박살 냈으니 흑도 놈들도 위기감을 느끼기야 했겠지. 하지만 홍요회에 의뢰해 봤자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를 게 그놈들 아닌가?”
“…….”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그런 짓 못 하지. 그럼 과연 누가 홍요회에 의뢰를 했을까? 정말 흑도일까? 아니면…….”
“…….”
“멸사군을, 정확히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누군가일까?”
“…….”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모용가주였어. 그 양반치고도 지나치게 과격한 방법이지만, 작정하면 못 할 것도 없으니까. 그런데…….”
연호정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탕마군을 이용해서 짓눌러야 가장 예쁜 그림이 나오는 걸 빤히 알 텐데도 그랬을까? 아니지. 모용가주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당관은 신기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그저 연호정을 죽일 듯 노려볼 뿐이었다.
연호정이 발끝으로 당관을 가리켰다.
“모용가주와 손을 잡았다는 얘기는 그 일이 터지기 전에 이미 들었어. 답이 자연스럽게 도출되더군.”
“……재미있는 놈이군.”
“음?”
당관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증거는 있느냐?”
“증거라?”
“그렇다, 증거.”
연호정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증거는 없어. 증거를 찾기도 전에 본진을 날려 버리더군. 제법 독한 칼을 샀더구만.”
“결국 이거로군. 주제도 모르는 연가의 장남 따위가 증거도 없이 사천의 주인을 핍박하고자 모용가주에게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한 것.”
“그게 그렇게 되나?”
당관의 눈이 서늘해졌다.
“차라리 거기서 죽지 그랬더냐. 그때 죽었다면 고통이나마 적었을 것을.”
우우우웅.
당관의 양손에서 재차 독기가 피어올랐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왜? 증거도 없으니 한 대 갈기고 시작해 보게?”
“…….”
“그것도 좋지. 사천당가의 주인이 연가의 장남에게 살수를 쓴다……. 뭐, 그것도 그런대로 흥미로운 그림이겠어.”
“……뭐냐?”
“뭘?”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뭔데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연호정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당관은 오만한 성품이지만 눈치가 빠르고 대국을 읽을 줄 안다. 그가 진심으로 연호정을 박살 내려 했던 것은, 어떤 식으로든 수습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적이 많았다. 연가의 인망은 무척 뛰어났지만, 당가의 역사와 영향력은 그보다 더 대단했다.
정 안 되면 무림맹에서 탈퇴해 버릴 생각도 했을 것이다. 사천당가는, 당관은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이놈…….’
모용군이 왜 이놈더러 괴물이라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를 놈은 아니다.
물론 뭘 준비했든 당가의 힘이라면 충분히 무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그 찝찝함이, 폭발 직전의 당관을 막고 있었다.
번쩍!
연호정의 동공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르르륵.
주작기가 타오르며 살기를 일으켰다.
“뭐 해?”
“…….”
“칼을 뽑았으면 장작이라도 패야지. 그 손 계속 놔둘 거야?”
“…….”
“김새는군.”
연호정이 자세를 풀었다.
“충고 하나 하지. 물어뜯지도 못할 거면서 함부로 아가리 벌리지 마라. 애송이 같으니까.”
당관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폭언이었다. 천하의 누가 있어 당가주에게 저런 폭언을 뱉을 수 있겠는가.
우우우우웅.
독기가 크게 꿈틀거렸다.
“……이번 한 번뿐이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스르륵.
당관이 손을 내렸다. 그러자 화염처럼 타오르던 독기도 숨을 죽였다.
“천운인 줄 알거라. 너처럼 건방을 떤 놈을 살려 준 적은 일찍이 없었어. 하늘에 감사하도록.”
연호정은 더 이상 당관을 자극하지 않았다.
진심으로 덤볐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다. 사고를 크게 낸 후, 아버지와 제갈문호 등을 모아 당가를 몰아세울 기회이기 때문이다.
홍요회 건의 증거가 없듯, 당관을 모욕했다는 증거도 없다. 중요한 것은, 사천당가의 주인씩이나 되는 자가 한참이나 어린 후배에게 살수를 썼다는 사실뿐이다.
당가를 박살 낼 수는 없다. 하지만 당관의 영향력을 축소할 수는 있다. 잘만 하면 무림맹에서 쫓아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관은 분노보다 인내를 택했다.
‘여기서 한 수 접는다라…….’
상당하다.
과거 무림맹 부맹주 시절에도 결정적인 순간에 올바른 판단을 내렸던 그였다. 그 정도 안목도 없이 부맹주가 될 수는 없다.
‘더 자극해 봤자 얻을 건 없겠어.’
모용군과 당관은 다른 식으로 상대해야 한다.
모용군은 장기를 두는 것처럼 몇 수를 내다보아야 한다. 그래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반면 당관은 기세로 밀어붙여야 한다. 그래야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한다.
“썩 꺼져라.”
“그럴 순 없지.”
당관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정녕 관짝에 실려 나가고 싶은 게냐?”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그럴 리가. 받을 거 받고 나면 나갈 거야.”
“……혹시라도 술을 달라는 거면, 진짜로 죽이겠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술 말고. 나한테 줄 게 있잖아.”
“개소리.”
“그럼 우리를 왜 불렀지?”
“……뭐?”
“봉공회의 때 그랬다더만. 멸사군에게 줄 것이 있다고. 그러니 부르라고.”
당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만히 놔뒀으면 우린 또 다른 공(功)을 세우러 갈 수 있었어. 한데 쓸데없이 불러서는 이게 뭐야? 창설식 참관조차 막아 버리고.”
“그게 내 탓이라는 거냐?”
“당신은 모용가주와 한배를 탔잖나? 좋은 것만 나누고, 나쁜 건 상대 책임으로 몰아 버리게?”
“…….”
“창설식 문제는 됐어. 다만 줄 게 있으면 줘. 그럴듯한 걸 주지 않으면 이 문제, 정식으로 봉공회의에 이의 제기를 하겠다.”
기가 막힌 놈이다. 대체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살려서 돌려보내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지 못할망정…….”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줄 게 없다는 말이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방문을 열기 전, 연호정이 말했다.
“치졸한 독사 같은 낯짝이나 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적어도 이무기는 되는 것 같군. 앞으로의 대결을 기대하지.”
덜컹!
연호정이 문을 열었다.
그때, 당관이 말했다.
“잠깐.”
“할 말 더 있나?”
당관은 내심 고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오늘 여러모로 수난을 겪는군.
“원하는 게 뭐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뭘 해 줄 수 있나?”
“빙빙 돌리지 말고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라.”
“제 말에 책임을 지는 태도. 아주 좋아. 모용가주가 당신을 보고 좀 배웠으면 좋겠는데.”
연호정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입을 열려던 당관은 순간 흠칫했다.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눈빛이 실로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부자한테는 돈을 받고, 거지한테는 감사 인사를 받는다. 무인이라면 칼을 받을 것이고, 문사에게는 좋은 글귀를 받겠지.”
“설마 본가의 독과 암기를 내어 달라는 것이냐?”
“우리 애들은 그런 거 쓰지도 못해.”
“그럼 뭘 달라는 거냐?”
연호정이 음험하게 웃었다.
“독과 암기를 척척 만들어 낸 그 실력을 받고 싶다.”
* * *
거처로 돌아오는 길.
여러 무인이 연호정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무림맹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연호정이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도 두 개밖에 없는 독립 유군의 대장. 약관의 나이로 무종지벽을 돌파, 초절정의 영역에 오른 희대의 천재 무사.
아마 근 몇 년간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없을 것이다. 한 개인의 명성이 모두를 놀라게 하는 건 드넓은 천하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문의 당사자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만만치가 않아.’
그는 당관을 떠올렸다.
지난날의 원한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이 당관이다. 물론 당관에게 명령을 내린 자는 모용군이지만, 자신을 죽인 당사자라는 점에서 살기를 참기가 힘들었다.
그런 그를,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부맹주 시절 때보다 더 거칠고 독하다. 그런데도 인내할 때는 인내할 줄 알아.’
어려운 상대다.
흑암제 시절, 그와 자주 부딪쳤던 사람은 당관보다는 모용군이었다. 그건 지금도 그러했다.
하지만 왠지 이번 생에선 모용군 못지않게 당관과도 자주 부딪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느낌만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무림에는 당가와 관련된 오래된 격언이 있다.
“사천당가가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그 즉시 목숨을 끊어라.”
당가의 지독함을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었다. 그들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로 잊지 않는 독종들이었다.
그리고 당관은, 그런 당가의 정점에서 군림하는 자였다.
‘당장 이빨을 들이대지는 않겠지. 어차피 모용군과 한배를 탔으니 어떤 식으로든 공격해 오겠지만…….’
예전에도 그랬지만 오늘의 만남으로 확신했다.
당관은 독사 중의 독사다.
그것도 탁월한 사냥 능력을 갖춘 독사다. 단 한 방으로 적의 숨통을 끊어 내지 못할 거라면, 확실한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홍요회를 보낸 것은, 말하자면 이쪽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려는 한 수라고 봐야 한다.
물론 당시에는 홍요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상대의 기량이 어떻든, 나는 외부로 도는 유군의 수장이고 상대는 중앙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수직 구조에 가까운 차이다. 모용군이나 당관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버지나 군사님만으로는 부족해. 이쪽에 힘을 실어 줄 사람이 더 필요한데.’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을 뿐, 현재 봉공들은 당파 싸움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상대에게 휘둘리지 않을 만한 당원을 배치해 줄 필요가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도, 협사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도.
‘역시 이 부분은 아버지와 얘기를 해 보는 게…….’
그때였다.
“여어, 연 군장 아니신가?”
“응?”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후개?”
가득상이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이, 어째 술이 필요한 것 같소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 마시오. 대낮부터 무슨.”
당관에게 뻔뻔하게 오량액을 내 달라 말했던 게 조금 전이었다.
“그나저나 정보부의 고문으로 계신 분이 이 시각에 웬 여유시오?”
“정보부 고문이면 쉬지도 못한대? 며칠 뼈 빠지게 일했더니 하루 푹 쉬라고 하더구만. 그래도 인간적이긴 해.”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가득상은 연신 낄낄거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은 참 변한 게 없어.’
모용군도, 당관도 달라졌다.
하지만 가득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 변하지 않은 성격이 무척이나 기꺼웠다.
‘…….’
연호정은 문득 눈을 빛냈다.
“오늘 하루 쉰다고 했소?”
“그렇수다.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우리 조촐하게 한잔 빨아 봅…….”
“거처로 갑시다. 상의할 게 있소.”
“상의?”
연호정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떨떠름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보던 가득상의 얼굴에 불안감이 드리워졌다.
“……아무리 망할 인간이라도 술은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