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65화 (165/963)

165화. 암투(暗鬪)의 본질 (5)

다음 날 아침.

부우웅!

공기를 가르는 광룡부가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흐음.”

땀으로 흠뻑 젖은 연호정의 몸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후, 처음으로 전력을 다한 수련이었다. 파괴력 넘치는 수법을 발산할 순 없었기에 섬세한 내력 조절로 주변 기물이 파괴되는 걸 막았다.

‘아직 조절이 잘 안 되는군.’

오히려 얼마 전에 익힌 청룡공(靑龍功)을 펼치는 게 더 수월했다. 청룡공 자체가 회피와 반격에 중점을 두고 있어 힘의 낭비가 최소화되기 때문이었다.

반면 주작공은 악랄한 살법이고, 백호공은 후퇴를 모르는 전진형 공격기다. 현무공은 무엇도 뚫을 수 없는 방어기지만, 힘을 제어하지 못하면 빈틈이 생기는 건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청룡보다 다른 삼신기(三神氣)가 공력 제어에 어렵다고 한들 한참이나 먼저 익혔는데도 이런 차이가 나다니.’

연호정은 내심 혀를 찼다.

‘벽라진결 때문이군.’

청룡을 익히며 사신기(四神氣)가 완성되었고, 완성된 사신기는 상생의 효과로 한 차원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갔다.

문제는 벽라진결이다. 사신의 토대가 되는 벽라진결은 고농도의 기운에 어울리는 격(格)을 갖추고자 스스로 성장하여 십 성 대성을 이루었다.

‘벽라진결부터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든 후에 사신무를 건드려야 해. 사신무는 어디까지나 가지의 역할일 뿐이야.’

벽라진결은 홍천기와도 달랐다. 한없이 내공 증폭만을 노리는 홍천기라면 오히려 이런 문제가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홍천기로는 그 이상을 넘볼 수 없지. 이러나저러나 다 내가 부족한 탓이다.’

문제가 나오면 핑계를 찾지 않고 진지하게 책임질 줄 안다. 연호정의 장점 중 하나였다.

‘이참에 벽라진결을 다듬어서 오대신공을 전부 녹여 버린다면…….’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오늘 밤에라도 아버지께 여쭤봐야겠군.’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현재 거처에 계시지 않았다.

같은 봉공이지만 하는 일까지 같진 않다. 연위는 상업(商業)에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었고, 무림맹의 자금을 운용하는 데에 잠시지간 고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제갈문호와 함께 봉공 중 가장 바쁜 사람이 바로 연위였다.

“수련 끝났어요?”

“음?”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묵비도 어느새 땀에 푹 절어 있었다. 연호정이 후원에 나오기도 전에 수련 중이었으니 그녀도 무척 힘들 것이다.

“진척은 좀 있어?”

묵비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하긴 그녀 역시 무종지벽을 코앞에 둔 고수였다. 그 깨달음의 벽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수련 외에 깊은 참오도 필요할 것이다.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널널하군.’

광룡부를 고쳐잡은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어때? 한 방 쏴 보는 건.”

“네?”

“더 높은 경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이 중요하다고들 하지. 하지만 깨달음이라는 게 의외로 별거 아니야.”

묵비의 얼굴에 호기심이 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의 말이다. 친분을 떠나 들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럼요?”

“그 전에, 깨달음이 뭐라고 생각해?”

“깨달음은 말 그대로 깨달음이죠.”

연호정이 혀를 찼다.

“네가 그 경지를 어떻게 이뤘지? 뭔가가 번뜩하고 깨달아진 건가?”

“아…….”

“아니지?”

묵비가 떨떠름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저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새…….”

“그거야. 열심히 하는 거. 다만 그건 기본이고, 중요한 건 얼마나 쓸모 있는 노력을 하느냐는 거지.”

“쓸모 있는 노력이요?”

“내가 너한테 홍천기를 가르친 이유를 기억해?”

묵비의 눈이 반짝였다.

“기억해요.”

“홍천기를 익혔다고 너의 구룡궁술이 성장하진 않았어. 하지만 홍천기와 박투 훈련을 통해 궁술에 감각적인 사격술을 덧씌울 수 있었지.”

“……!”

“더 높은 곳을 노려야 하는 건 맞지만,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걸 충분히 얻었느냐도 중요해.”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두들겼다.

“내 무공, 사신무는 네 가지 무공을 전부 익히고 나서가 진정한 시작이야. 말하자면, 난 청룡공을 얻기 전에도 무종지벽을 돌파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거다.”

“그, 그렇군요.”

“위만 보지 말고 옆도 둘러봐. 여기저기 둘러보고 더듬다 보면, 어느새 예전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선 스스로를 체감할 수 있을 거야.”

깨달음도 결국 말장난에 불과하다. 사고의 전환, 고정 관념을 타파하는 것만으로도 무공은 성장한다. 그게 바로 깨달음이다.

말로도, 글로도 형용할 수 없는 깨달음은, 적어도 지금 그들 수준에서 논할 만한 게 아니었다.

“너는 궁사야. 궁사는 권사(拳士)나 검사(劍士)보다 생사의 치열함을 느끼기가 힘들어. 그것은 무공의 수준 때문이 아닌 병장기의 특성 때문이지.”

“그 이유도 있었죠. 내게 박투술을 가르쳐 준 이유 말이에요.”

“그래. 그래서 사람을 상대해 봐야 해. 결국 무(武)라는 것은 상대가 없으면 발전하기 어려운 학문이니까.”

묵비가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도대체 그런 지식은 어디서 얻은 거예요?”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경험이다.”

“그런 경험을 쌓았을 만한 연배가 아니잖아요?”

“경험은 무공 경지와 비슷해. 나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거다. 당장 너보다도 못한 중장년층 고수가 수두룩하잖냐.”

“하긴.”

쿵.

연호정이 광룡부로 땅에 금을 그었다.

“딱 여기에 서 있을 테니까 한 방 날려 봐. 진짜 날 죽일 기세로.”

묵비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괜찮겠어요?”

“누가 누굴 걱정해?”

연호정의 장난기 어린 말에 묵비가 피식 웃었다.

“머리에 구멍 나고 후회해 봤자 늦어요.”

“킁.”

우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푸른 진기가 일었다. 벽라진기였다.

“한 발이야. 그 한 발로 날 잡지 못하면 네가 죽는 거다. 그런 생각으로 쏴 봐.”

“……좋아요.”

터엉.

묵비가 거리를 벌렸다.

너무 가까운 거리는 오히려 읽히기가 쉽다. 궁술이든 암기든, 적당히 거리를 벌려야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는 것이다.

“준비됐나?”

까드드득.

묵비가 홍련궁에 철전을 걸었다.

대답은 없었다. 이미 그녀의 두 눈은 연호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연호정은 속으로 웃었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너도 보통 살벌한 놈은 아냐.’

무인이라기보다는 사냥꾼이다. 적과 호쾌하게 손속을 나누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상대를 죽이기 위한 무공을 닦았다.

과거, 흑암제와 신궁이 나서면 고금제일인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흑암제는 전사(戰士)였고, 신궁은 엽사(獵師)였다. 적을 죽이려 할 때 이만한 조합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과거이자 미래로 돌아온 지금, 두 사람은 그때의 서슬 퍼런 영광을 되찾기 위해 하루하루 연마되고 있었다.

후우우우웅.

대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홍련궁의 한 점을 향해 휘어져 들어가는 공기의 흐름부터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좋아.’

제아무리 그가 초절정의 영역에 올랐다 한들 아차 하면 죽는 건 똑같다.

하물며 묵비는 궁술의 고수였다. 연호정은 그녀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묵비의 궁술은 그 누구에게나 위협적이었다.

방심하면 죽는다. 목숨을 건 일격을 퍼부어 준다면, 이쪽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츠츠츠츠.

연호정이 광룡부로 묵비를 겨누었다.

길고 무거운 도끼를 들어 올려 상대에게 겨누는 것 자체가 무지막지한 완력을 필요로 했다.

예전에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또 달랐다. 광룡부를 들어 상대를 똑바로 겨누는 연호정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으면서도 유연했다.

상반된 이치를 한 몸에 담을 수 있는 경지.

초절정고수, 벽산호장 연호정을 보는 묵비의 이마에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

휘이잉.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보이지 않아.’

이미 상대를 사냥감으로 인식한 묵비. 그녀는 오로지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 가기 위한 사신(死神)으로 돌변했다.

그런 사신의 눈으로도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빈틈이 너무 많아서 문제다.

어느 곳을 노려도 맞을 것 같다. 한데, 어느 곳을 노려도 실패할 것 같기도 하다.

‘자연스럽다.’

자신을 향해 광룡부를 겨누며 자세를 살짝 틀었다.

피격 반경을 좁힌 것이다. 궁사를 상대할 때 이상적인 자세였다.

‘어중간하게 쏘면 분명 빗나갈 테고,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와 머리통을 날려 버리겠지.’

그림이 그려졌다.

연호정 특유의 폭발적인 공격력과 자비 없는 살수가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는 그림이.

‘그렇다면…….’

우웅! 우웅! 우웅!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홍련궁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였다. 사구(射口)를 움직여 방향과 사격 시기를 교란하는 것이다.

정석적인 대응이다. 그 기묘한 움직임만으로도 방어와 회피가 두 배는 더 어려워졌다.

휘이이이이잉!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졌다.

묵비는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쇠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텁텁한 냄새가 긴장감을 끌어올려 주었다.

‘백호기(白虎氣)다.’

발밑에서부터 뿜어져 올라오는 백색의 진기가 공격 시기를 가늠하는 듯하다.

그 백호의 바람이 경고하고 있었다.

빗나가면 즉각 공격한다고. 그 공격 한 방에 넌 죽는다고.

주르륵.

식은땀이 또 한 줄기 흘러내렸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딜 노려야 잡을 수 있지? 용아포(龍牙砲)는 강하지만, 연 공자라면 힘들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을 텐데.’

그때였다.

‘어?’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왜 용아포를 써야 하지?’

용아포는 구룡파천궁에서 가장 자신 있게 쏠 수 있는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 파괴력 넘치는 힘은 상대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끝까지 용아포를 고수해야 할까?

순간 연호정의 말이 떠올랐다.

‘중요한 건 얼마나 쓸모 있는 노력을 하느냐는 거지.’

용아포로는 연호정을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후우우우우웅!!

묵비의 발밑에서 회색빛 기묘한 진기가 솟구쳤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홍천기?!’

그때,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타아아아아앙!

회색빛 안개에 휩싸인 철전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무종지벽을 돌파해 오감과 내력의 질이 극대화된 연호정으로서도 느리게 인식할 수 없는 속도였다.

‘하체라.’

찰나의 찰나를 쪼갠 그 순간.

연호정은 묵비의 화살이 자신의 허벅지를 노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듯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단으로 휘어지는 단거리 곡사(曲射)를 쏜 것이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그러면서도 이미 연호정의 손은 하단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그의 육감이 살기를 읽고 손의 위치를 이동시킨 것이다.

‘어쨌든 실패로군.’

그렇기 연호정의 좌수가 회색빛 철전을 잡아채려 할 때였다.

퍼엉!

연호정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쏘아진 철전이 순간 세로로 쪼개지며 다섯 개로 늘어났다.

‘유룡산전탄(遊龍散電彈)?!’

파바바바박!

연호정이 주춤거렸다.

다섯 개로 갈라진 화살 중 네 개가 땅에 박히고, 하나는 연호정의 손에 잡혔다. 그 하나의 화살 끝이 허벅지를 살짝 파고들었다.

제때 잡지 못했다면 그대로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허어.”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유룡산전탄은 이 거리에서 쓸 수 없는 궁술 아니었나?”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

“헉헉!”

숨을 헐떡이던 묵비가 화살 없이 시위를 당긴 채 그의 후방을 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광룡부 역시 그녀의 쇄골에 닿아 있었다.

묵비가 헐떡이며 말했다.

“허억! 허억! 지, 진기를 억지로 역류시켰는데, 역시 안 통했나요?”

“아쉽지. 아쉽긴 하다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목숨 걸고 한 방 갈겼구나.”

묵비가 씨익 웃었다.

미소 짓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이내 파랗게 변했다. 진기를 역류시키고 호흡을 강하게 수축한 탓에 내상이 심해진 것이다.

티이잉!

장력을 이기지 못한 홍련궁이 바닥에 떨어졌다. 묵비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연호정이 재빨리 그녀를 받아 들었다.

그의 얼굴에 대견하다는 빛이 어렸다.

“잘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