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암투(暗鬪)의 본질 (4)
탕마군의 창설식은 생각보다 훨씬 거창하게 진행되었다.
멸사군과는 시작부터가 다르다. 탕마군장 모용우는 물론, 휘하 오백의 무사들도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경갑주 차림에 제식용 병장기까지 들었다.
창설식에 참관한 사람들은 탕마군의 뛰어난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직 훈련다운 훈련을 한 적은 없는 탓인지 저마다 개성이 넘쳤지만, 그들이 내뿜는 엄정한 기세는 정예군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선 모용우는, 단연 그중 백미였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용우의 자태와 서늘한 기백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탕마군의 창설식이 끝났다.
물론, 이날은 탕마군의 창설식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뒤로 무림맹 산하 조직들의 창설식이 이어졌고, 정오에 시작되었던 행사는 석양이 질 때가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었다.
기나긴 창설식이 끝나자 곧바로 축제가 벌어졌다. 무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술과 고기를 먹었다.
그 화기애애한 자리에, 멸사군은 없었다.
* * *
“허허허!”
거처로 돌아오는 길.
모용군은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다. 참으로 잘했어. 네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만, 그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네 존재감을 제대로 각인시켰더구나.”
모용우가 고소를 지었다.
“보여 주기식이었습니다.”
“그 보여 주는 걸 못 해서 뒤처지는 사람이 많다. 네 담백한 성품에 오죽 고생했겠느냐마는, 그것도 다 필요한 일이니라.”
“알고 있습니다.”
“허허허!”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무성전에서부터 이곳까지 걸어오는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하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음? 어딜 갈 생각이냐? 오늘만큼은 나와 취하도록 마셔 보자꾸나.”
“탕마군은 대단한 전력입니다. 하지만 한데 뭉치지 못한 부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지요.”
“허어, 오늘은 쉬어도 괜찮지 않겠느냐?”
“군병들은 쉬게 둘 생각입니다만, 저는 그래선 안 되지요. 제가 일을 제대로 해야 탕마군도 빛이 납니다. 또한 하루라도 빨리 그들을 제어해야 형님의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라? 하하하!”
모용군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까지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느냐?”
“모두가 들떴을 때 긴장을 풀면 꼭 문제가 터졌습니다.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혼자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모용우가 옳다. 적은 언제나 상대가 긴장을 풀 때를 노리기 마련이다. 물론 무림맹에 적이라 할 만한 자가 있겠느냐마는, 저런 긴장은 나쁘지 않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좋다. 동생이 열심히 해 보겠다는데, 형이 되어 막아서는 안 되겠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전에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모용군이 은근슬쩍 물었다.
“당가주의 딸과 함께할 생각이냐?”
그가 유독 기분이 좋은 이유 중 하나였다.
모용우는 당상아를 탕마군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조직도 마찬가지지만, 유군의 특성상 군장의 명은 절대적이다. 모용우가 원치 않았다면 그녀가 탕마군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모용우는 입맛을 다셨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왕 그녀를 받아들였으니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한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도 한 번 보고 그이의 진면목을 알기는 힘듭니다. 다만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그녀의 능력 역시 출중하니, 탕마군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크하하하! 잘했다, 참으로 잘했어.”
이로써 당관에게도 할 말이 생겼다. 그간 이 문제를 꽤 오랫동안 끌고 오지 않았던가.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 자신의 처가 될 사람이라도 이득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저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았지.’
좋다. 아주 좋다. 그간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 주지 않던 모용우가, 근래 들어 본격적으로 능력을 입증하고 있었다.
모용군은 그런 동생의 모습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밤이 깊었구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하면 푹 쉬십시오, 형님.”
“오냐. 내일 점심이나 한 끼 하도록 하자.”
“예.”
그렇게 모용우를 보낸 모용군은 웃으며 거처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거처의 대문이 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
‘…….’
미소 가득하던 모용군의 얼굴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츠츠츠츠.
은근하게 풍겨 나오는 존재감이 그의 오감을 자극했다.
무섭도록 깊어진 기운. 어떻게든 수습하고 있지만,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이 담벼락을 넘어 이곳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절정고수라도 쉬이 느끼기 힘든 기운이다. 초절정, 무종지벽을 넘어, 육감이 발달하고 기(氣)의 밀도가 상승해야만 느낄 수 있는 존재감이었다.
‘재미있군.’
모용군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이 시간에 찾아오다니.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는구나.’
잠시 후, 모용군이 대문 앞에 도착했다.
동시에 대문 안쪽, 음영이 진 곳에서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간 잘 지냈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싸늘한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만면에 여유가 가득했다.
“자네는 잘 지냈나?”
“보다시피.”
연호정이 양손을 펼쳤다. 펄럭이는 장포 자락이 마치 날개처럼 보였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난놈은 난놈이야.’
언뜻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은 극도로 압축된 근육으로 잘 짜여 있을 것이다. 하나 저리 고급스러운 장포를 걸치니, 이전과는 분위기가 또 달랐다.
고고한 이상을 지닌 학자 같다고나 할까. 저 모습만 보면, 팔십 근이 넘는 무지막지한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은 좀처럼 상상할 수가 없다.
“야심한 시각에 여기는 어인 일이신고?”
“이 시간이 아니면 남들의 시선이 많이 쏠릴 거 아니겠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거창하게 축제라고 했지만, 아직 술 한 모금 입에 안 댔소이다. 창설식에서 멸사군의 자리를 빼 버린 분께서 위로주나 한 잔 주면 고맙겠소만.”
모용군은 딱 잘라 말했다.
“자네에게 줄 위로주는 없다네.”
“딱딱하게 나오시는군.”
“허허, 우리가 웃으면서 술잔을 나눌 만한 사이라고 생각하진 않네만?”
“그렇다고 술 한 잔 못 따라 줄 만큼 매정한 사이도 아니잖소?”
묘한 말이로군.
모용군은 연호정의 언행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딱히 무슨 수작을 부리러 온 것 같지는 않은데.’
멸사군을 만들고 몽의라는 패를 쓴 시점에서, 더는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었다. 서로가 각자의 위치에서 욕망을 위해 힘쓰면 그뿐이다.
‘그건 네 녀석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연호정은 싸움의 천재다.
무공이든 정치든, 능수능란한 수법으로 승리를 거머쥐는 놈이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대범해서 사소한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창설식에서 제외되었다고 따지러 올 만한 그릇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이지만 모용군은 연호정을 인정하고 있었다.
‘하면 뭔가를 요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면 들어갑시다.”
마치 생각을 읽고 있었던 것 같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멸사군의 수장씩이나 되는 이에게 흔한 술을 대접할 수는 없지. 들어가세. 위로주는 없지만 향 좋은 술은 있다네. 근래 괜찮은 술을 얻었거든.”
“좋소.”
잠시 후.
“호오, 향이 제법 묵직한데?”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사천의 오량액일세. 묵직한 와중에 뒤끝은 묘하게 가볍더군.”
“사천의 명주라?”
“당가주에게 받았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다 이거요?”
모용군은 아무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을 터인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겠나?”
“예전보다 더 대범해지셨소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저 자네를 향한 내 평가가 달라졌을 뿐이지.”
“평가가 좀 올라갔소?”
“상향 조정했네.”
“영광이구려.”
모용군이 웃으며 잔을 들었다.
“한잔하세.”
칭!
잔과 잔이 부딪치며 맑고 고운 소리를 냈다.
시원하게 잔을 비운 연호정이 밭은기침을 뱉었다.
“생각보다 세군.”
“마시다 보면 센 줄도 모를 걸세. 오히려 이 정도면 평균이지.”
“왜 명주라고 하는지는 알겠소.”
“그렇지? 내 그간 술을 즐기지는 않았네만, 이런 술만 마신다면야 금세 주당이 될 것 같다네.”
“넉넉하게 있소? 좀 많이 마시고 싶은데.”
“크하하! 걱정하지 말게. 자네 취하게 할 정도는 있다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간만에 목구멍에 때 좀 벗기겠구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놀랍게도 둘은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정치적인 얘기는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소소한 일상의 주제나 서로에게 몰랐던 부분들에 관한 대화가 주를 이루었다.
평화로운 술자리였다. 마치 일가를 이룬 무림의 선배가 재능 넘치는 후배에게 술을 대접해 주는 것 같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거 아는가?”
“무엇을 말이오?”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했었다네. 아! 이놈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내 밑에 두고 싶구나, 하는 생각 말이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와 당신은 종(種)이 달라.”
“그렇게 생각하나? 의외로군. 나는 우리가 같은 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소?”
“그렇다네. 당대 무림에 우리처럼 사나운 사람을 찾기는 힘들어. 자네나 나나, 살코기 한 점 뜯어먹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짐승이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짐승이란 말에는 공감이 간다.
연호정과 모용군의 치열한 정쟁(政爭)은 맹수끼리의 싸움이다. 얼핏 고급스러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파멸시키고 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저열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생(生)을 불태우는 것은 옳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싸울 필요는 없기도 하다.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짐승의 싸움.
연호정에게도, 모용군에게도 정도(正道)는 없다.
“해서 묻겠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는 않겠네. 자네는 누구 밑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니까. 다만, 나와 손을 잡는 것은 어떻겠나?”
“손을 잡자…….”
“그렇다네.”
굉장한 제안이었다.
모용군은 평생 스스로 선택했지, 누군가에게 제안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특히나 자신의 처지가 좋을 땐 더더욱 그러했다.
그만큼 연호정을 높이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는 연호정을 안타까워했다.
저 무시무시한 재능을 더 쉽고 빠르게 개화할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자신과 수 싸움을 한다. 조금만 더 무던하게 가면 누구보다도 빨리 정상에 이를 수 있을 텐데도.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혹시라도 말이오.”
“음?”
“훗날 내가 당신을 쓰러트렸을 때, 당신이 마음을 고쳐먹었으면 좋겠소. 나 역시 당신의 능력이 아쉽거든.”
“허허.”
“우리는 그냥 이렇게 살 운명인가 보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정말로 술이나 마시러 온 겐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안 그렇소?”
“그렇긴 하다만, 말했다시피 우리는 짐승이 아닌가. 목적 없이 찾아올 사이는 아니지.”
“하긴.”
“말씀해 보시게. 내게 원하는 게 있나?”
“좀 쉽게 가 보려고 말이오.”
“무슨 말인가?”
팅, 팅.
연호정이 검지 손톱으로 빈 잔을 두들겼다.
“이 술을 준 사람.”
“……?”
“그 사람과 자리 좀 만들어 주시오. 왠지 내가 찾아가면 문전박대할 것 같아서.”
“당가주?”
“그렇소.”
모용군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그 부탁을 들어주면, 자네는 내게 무엇을 해 줄 텐가?”
“탕마군장을 지켜 주겠소.”
“……?!”
“대수 자리를 양보했지만, 고민하고 있었소.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
“흐음.”
“칼이 아니라 방패가 되어 주지. 적어도 이번만큼은.”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참으로 연호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 기분이 좋은 게 자네에게는 이득이 되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