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암투(暗鬪)의 본질 (3)
모용우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당신은?”
“……하, 하하하.”
극도로 당황했던 당상아는 결국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런 웃음 한 자락으로 이 상황을 타파할 수는 없었다.
연호정이 힐끔 모용우를 보았다.
“댁이 아는 사람?”
“…….”
“이보쇼.”
“헉! 으응?”
“댁이 아는 사람이냐고.”
어느새 모용우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가득했다.
“아, 이분은…… 그게…….”
이분? 흐음?
‘확실히.’
연호정은 당상아의 차림새를 훑었다.
묵비가 궁장을 입은 것처럼 신경 쓴 차림새는 아니다. 하지만 질 좋은 비단에 섬세하고 고풍스러운 침선을 보면 좋은 집안 출신일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이 깊고도 묘하게 날이 선 내력은 제법 낯이 익은데?’
놀랍게도, 내공의 수준이 거의 모용우에 육박했다. 모용우 역시 모용가의 가주지학을 익히며 내공이 크게 성장했거늘, 그에 비견될 정도로 내력 수준이 높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은 흔치 않다. 무림맹 안이라도.
‘이십 대 초반처럼 보이지만 눈빛에 관록이 엿보인다. 서른 전후의 연배가 아닐까.’
그때였다.
당상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거의 경건하다시피 한 자세로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몰래 들어와서 폐를 끼쳤어요. 진심으로 사죄드려요.”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해야지? 그래서 댁 정체가 뭐요?”
크게 거칠진 않는데, 묘하게 껄렁껄렁한 파락호 같은 느낌을 준다.
당상아는 연호정의 말투에 당황했지만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저는 상아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입니다. 에, 그러니까…….”
“……?”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호기심이 동해 모용 군장님의 뒤를 따라왔는데, 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습니다.”
당상아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흐음.”
묘하게 재미있는 사람일세?
연호정은 상대의 언행에 흥미를 느꼈다.
‘적어도 나쁜 의도는 없는 것 같군.’
워낙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니, 이제는 눈빛만 봐도 얼추 그 사람의 성품을 알겠다.
나아가 무종지벽을 돌파하며 내공의 질적 향상을 이루니, 정(精), 기(氣), 신(神)이 일치하며 실질적인 육감이 발달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이 상아라는 여인은 거창한 야망이 있거나 타인의 뒤를 캘 만큼 음침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느낌은 그러했다.
‘음? 근데 상아라고?’
분명 어디서 들어 봤는데?
그때, 모용우가 말했다.
“당 소저.”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당씨? 당상아? 그럼 암천신녀?!’
일룡삼봉의 일인이자, 당가주가 아들보다도 아낀다는 소문이 났던 사천당가의 장녀.
그리고 어제 모용우와 만났을 것이 분명한 당문의 장녀였다.
‘어쩐지.’
내공의 질이나 색(色)이 당양선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과거 흑암제 시절의 당관과 비슷했다. 당연히 그보다는 훨씬 부족했지만, 그 흐름과 강력함만큼은 제 아비를 쏙 빼다 박았다.
연호정이 홀린 듯 당상아를 보고 있을 때였다.
“내 뒤를 따랐다고 했소?”
“네?”
모용우의 얼굴은 다소 굳어져 있었다.
당상아의 얼굴에도 그늘이 졌다.
“……네. 죄송합니다.”
“어째서?”
“아, 그게…….”
그때였다.
“묵비.”
“네?”
연호정이 음침하게 웃었다.
“차 좀 부탁해도 될까?”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냐고 물으려던 묵비는 순간 흠칫했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이 인간의 표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거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건가?’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시간 많아. 천천히 내줘도 돼.”
“킁. 어련하시겠어.”
몸을 돌리던 묵비가 힐끔 당상아를 보았다.
당상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행동에 미안함이 가득했다.
묵비가 입맛을 다시곤 방을 나섰다.
연호정이 손뼉을 쳤다.
“자, 일단 앉읍시다.”
“네?”
“앉자고. 계속 서 있기는 뭐하잖소.”
모용우가 당황하여 연호정을 보았다.
‘연제?’
연호정은 그의 눈빛을 본체만체했다.
“당 소저라 했소?”
“네? 아, 그렇습니다.”
“앉으시오.”
연호정의 목소리에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당상아는 주춤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세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연호정이 물었다.
“한데, 모용 군장과는 무슨 사이길래 몰래 뒤를 밟았소?”
“헉!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뱉은 말에 오히려 스스로 당황한 것 같았다. 당상아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그게! 아무 사이도 아니기는 한데 이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러니까…….”
“아하? 혹시?”
연호정의 눈빛은 대놓고 음험했다. 콧구멍을 씰룩이며 묘한 미소를 짓는 표정에 당상아가 서둘러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절대로요! 저는 그냥……!”
“내가 뭐라고 했는데?”
“네?”
“아무 말도 안 했소이다.”
“으윽.”
당상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호정이 유쾌하다는 기색으로 말했다.
“아! 계절은 가을로 접어드는데, 불어오는 바람은 따스한 봄의 햇살을 담았구먼. 헐헐, 가슴 뜨뜻하니 좋구먼!”
모용우가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연 군장. 너무 놀리지 말게.”
“놀리다니? 댁이랑 나랑 무슨 친분이 있다고 놀려?”
“나를 말하는 게 아닐세.”
“그럼?”
모용우는 당황했다.
“자꾸 왜 이러시는가. 어찌 되었든, 달리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자리를 파하도록 하세.”
파하긴 뭘 파해, 한참 재미있어지려고 하는 판에.
어쨌든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는 있겠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당 소저.”
“네?”
“혹시 동생 때문에 오셨소?”
동생?
순간 당상아의 눈이 깊어졌다.
“양선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연호정의 표정은 어느새 담담해졌다.
“당신도 들어서 아실 거요. 그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놈을 박살 낸 사람이 누구인지도.”
“……벽산호장 연호정. 바로 연 군장님이지요.”
“그렇소.”
연호정의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일었다.
“먼저 잘못한 것은 분명 그놈이었소. 기분 나쁘다고 살수까지 펼친 적을 죽이지 않고 보낸 것만으로도 나름의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오. 그것도 두 번이나.”
“…….”
“하지만 혈육으로서, 인과 관계가 어떻든 동생을 망가트린 사람에게 충분히 적의를 보일 수 있소. 아마 나라도 그랬을 테지.”
당상아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연 군장님 말씀은, 제가 모용 군장님이 아닌 연 군장님을 목표로 왔을 거란 뜻인가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당가는 독과 암기의 명문이오. 사람 하나 죽이는 데에 어지간한 암살자보다도 낫지 않겠소?”
무척이나 자극적인 언사였다.
제아무리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지만, 명가의 후손으로서 쉬이 받아넘길 만한 말이 아니었다. 가문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벌컥 화를 내도 무방할 말이었다.
과연 당상아의 반응은 어떨까?
“양선의 잘못은 명확해요.”
“음?”
“당한 상대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과 같죠. 연 군장님 말마따나 죽이지 않고 살려 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에요.”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당상아의 담담한 표정은 진짜였다. 그렇다고 동생을 증오하거나 경멸하는 것도 아닌 듯했다.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날 죽이려고 온 게 아니오?”
당상아가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강동의 젊은 호랑이. 홀로 천하제일가를 상대하려 했던 열혈남아이자 무림맹의 멸사군장이며, 당대 무림 최연소로 무종지벽을 돌파한 천재 고수.”
“…….”
“나 정도 실력으로는 당신을 건드릴 수 없어요. 오히려 동생과 똑같은 꼴이 되겠지요.”
잘못을 청할 때는 진지했고, 자극적인 언사에도 쉬이 경동하지 않는다. 공격적으로 나오는 상대를 달래며 본인의 무고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지혜가 있다.
명확하게 선을 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남녀를 불문, 무림에 이런 사람은 흔치 않다.
‘마음에 드는군.’
괜찮은 성품이다. 아니, 연호정이 보기에 당상아는 그 독하다는 사천당가 출신답지 않게 사람 냄새가 나는 이였다.
“즉, 내가 목적이었던 건 아니다?”
“네. 애초에 저는 다툼을 싫어해요.”
“천하의 암천신녀라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소.”
당상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죠? 다들 그렇게들 생각하더라고요.”
“역시 사람은 만나 봐야 아는 것 같소.”
고개를 끄덕이던 연호정이 또다시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모용 군장께는 무슨 볼일이 있어서 몰래 따라오셨나?”
“윽.”
당상아는 괜스레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 그게…….”
“그게?”
모용우도 내심 궁금했는지 은근슬쩍 당상아를 보았다.
당상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말씀하시오.”
“……심심해서.”
“……?”
연호정은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모용우는 허탈하다는 듯 멍하니 당상아를 보았다.
당상아의 낯빛이 더더욱 빨개졌다.
“제,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정말이에요. 진짜 심심했어요. 어쩌다가 모용 군장님을 봤는데, 표정을 보니까 좀 심각해 보이더라고요. 궁금하기도 하고 할 일도 없어서 그냥…….”
“그러다가 천장에 숨어들기까지 하셨다?”
“컥! 바로 나가려고 했어요! 이게요, 이것도 믿으실지 모르겠지만요. 제가 한번 꽂히면 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심각한 병이 있어서요. 저도 모르는 광기 어린 무의식이라는 게…….”
“믿소.”
“……네?”
“믿는다고.”
당상아의 눈이 퉁방울처럼 불거졌다.
“지, 진짜요?”
말해 놓고도 머저리 취급을 당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외려 당상아의 표정이 연호정이나 모용우보다 더 황당해 보였다.
연호정이 모용우에게 물었다.
“댁은 저 말 안 믿겨?”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안 믿을 이유는 없네.”
“그래?”
“그렇다네.”
모용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눈치가 빨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심심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도검이 난무하는 강호에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저렇게 진심을 가득 담아 말하는데 못 믿을 이유도 없잖은가.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저보다 더 이상한 사람도 많다. 그게 세상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당신에게 악의가 없는 것은 알겠소.”
“헉! 감사합니다! 정말 믿어 주시는군요!”
“믿소. 하지만 믿음과 용서는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오만.”
활짝 핀 꽃처럼 환해졌던 당상아의 표정이 한순간에 말라비틀어진 잡초처럼 변했다.
“그, 그렇죠. 어쨌든 제가 크게 잘못했으니까요.”
“그렇지.”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도의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연호정은 물론 모용우 역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이다.
독특하긴 하지만 사람이 진지할 줄도 알았고, 거짓말을 입에 담지도 않는다. 그렇게 굳어진 성격이었다.
연호정으로선 묵비나 연지평을 제외하곤 오랜만에 보는 유형의 순수함이었고, 모용우는 난생처음 보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용 군장.”
“음?”
“창설식 얼마나 남았소?”
“응? 헉!”
모용우가 냅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정오가 다 되어 가는군. 이제 일어나야겠네.”
“그러시구만.”
고개를 끄덕이던 연호정이 턱으로 당상아를 가리켰다.
“데리고 가쇼.”
“……어?”
“데리고 가시라고.”
“내, 내가?”
“그럼 내가 데리고 가? 나더러 오지 말라며?”
“그건 그렇지만, 당 소저가 굳이 창설식에 참관할 필요는…….”
“참관해야지. 오늘부터 탕마군 소속인데.”
모용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상아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가늠도 되지 않아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당 소저가 그러잖아. 대가를 치르겠다고. 당 소저 정도의 전력이면 탕마군에 큰 힘이 되지 않겠나?”
“어억?!”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잘못을 했으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래, 당 소저?”
“…….”
“심심하다며? 그럼 일을 해.”
당상아의 눈이 멍하니 풀렸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호기심을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