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사신완성(四神完成) (4)
“걸물은 걸물이구나.”
“…….”
“아니, 걸물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하지.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이 벌써 초월자의 무도(武道)에 몸을 실었다니, 참으로 대단하다.”
노도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내 일찍이 무수히 많은 영걸을 만나 보았다만, 그처럼 무(武)에 특화된 자는 본 적이 없다. 네가 그의 밑에서 가르침을 청할 만하구나.”
“예에.”
옥청은 유독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하지만 할 말은 한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말입니다.”
“음?”
“지난 몇 달간 연 군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제가 봤을 때…….”
굳이 이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옥청은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면 행동으로 옮기길 주저하지 않았다.
부드럽고 순한 성격 속에 그러한 강단도 있었다.
“사실,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게…….”
옥청의 얼굴에 난처함이 일었다.
“재능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경험으로 쌓아 올린 무(武)라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경험?”
“그냥 느낌이 그렇습니다. 재능으로 강해졌다기보다 예전에 익혀 왔던, 이미 알고 있는 경지를 다시 손에 넣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노도인, 무당 장문인 승현진인(乘賢眞人)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다면 연 군장이 이보다 더 어렸을 때 무종지벽을 깨부순 괴물이란 말이냐?”
옥청이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아니겠지요. 그래서 느낌이라고 말씀드린 겁니다.”
“뭐가 되었든, 진정 놀라운 인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열혈의 협심(俠心)으로 큰 공을 세웠으니, 차세대 무림은 연 군장을 중심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
“그럴 확률이 높을 겁니다.”
승현진인이 빙긋 웃었다.
“욕심이 나지는 않더냐?”
“예?”
“사백 어른은 검선(劍仙)이라 불리며,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분이다. 그분의 제자이니, 마땅히 최고가 되고 싶지는 않냐는 말이다.”
옥청이 순하게 웃었다.
“농담이시지요? 저는 제 무공의 완성을 바랄 뿐, 누군가와 경쟁하고 싶다거나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허허.”
“하긴, 그래서 이 모양일 수도 있죠. 전에 연 군장이 그랬거든요. 경쟁심도 성장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맞는 말이다. 하나 그것이 발전의 절대적 요소는 아니니라.”
“알고 있습니다. 연 군장도 그걸 인정했고요.”
“허허허.”
연신 웃고는 있었지만, 승현진인은 내심 옥청의 반응에 놀랐다.
‘사제도 많이 변했구나.’
과거 옥청은 무인이 아닌 구도자와 같았다. 그것은 무당의 제자로서 참으로 기특한 일이었다.
무당파는 소림을 따라 태산북두라 불리고 있지만, 엄연히 도(道)를 좇는 도사들의 문파였다. 검(劍)이 살생의 수단이 아닌 수련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옥청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위해 무공을 익혔다.
그런 옥청이 지금은 무공의 완성을 바라고 있다.
‘구도자의 길에서 잠시 벗어났지만, 이 또한 좋은 일이지.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노라.’
승현진인이 물었다.
“해서, 멸사군의 다음 출정 예정은 언제라고 하더냐?”
“아직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음, 적어도 며칠의 시간은 있다는 뜻이렷다?”
“그것도 확신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전에 보셨잖아요? 모이자마자 바로 출정해 버리는 거. 이번에도 그리 빠르게 나설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그래?”
승현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해서 좋을 게 없다지만, 시간이 많지 않다고 하니 당장 시작하는 것이 좋겠구나.”
“예? 뭘요?”
“뭐긴, 나이 어린 사제의 무공을 봐주려고 그러는 게지.”
옥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장문 사형께서 직접이요?”
“왜? 안 될 이유라도 있더냐?”
“아, 아니요! 좋죠! 저야 영광입니다.”
“싱겁기는.”
승현진인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너라. 바뀐 너의 무공을 보며, 채워 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채워 줄 것이다.”
* * *
아버지와의 술자리는 생각보다 일찍 끝이 났다.
연호정은 아버지께서 술을 그리 급하게 드실 줄은 몰랐다. 그 많은 양을 드시고도 자세가 꼿꼿하셨지만, 거의 폭음에 가까운 음주였다.
그렇게 오전부터 시작된 음주는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후우우우.”
우우웅.
숨을 내쉬니 알아서 주기(酒氣)가 배출되었다.
연호정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조절은 안 되는군.’
청룡기.
간장 능력을 극도로 활성화시킨 청룡기는 삼신기와의 상생으로 한순간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물론 그것은 다른 세 가지 기운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가 너무도 심해서, 제대로 운용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적어도 지금 수준으로는 그러했다.
그래서일까? 이번만큼은 연호정도 취하고 싶었지만, 청룡기가 들어오는 주기를 매 순간 흩어 버리는 통에 취할 수가 없었다.
내공을 자유자재로 제어하지 못한 적은 참 오랜만이지 싶었다. 물론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긴 하지만.
‘금방 익숙해지겠지.’
제어할 수 없는 힘은 필연코 문제를 일으킨다.
신병이기를 쥐었다고 해서 백정이 무사가 되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을 제대로 다루는 건 물론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응변의 기지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이로써 진정한 사신무가 시작되었다.’
얼마 만인가.
회귀하기 직전까지 사신무와 함께하고 있었으니 얼추 이 년 정도 되었다.
하지만 왜일까?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반가움이 컸다.
그는 다시 한번 청룡기를 더듬어 보았다.
‘잘 왔다, 청룡.’
청룡(靑龍).
청룡은 갑인(甲寅)의 목신(木神)으로 봄을 상징하며, 오장육부 중 간장을 담당한다.
진기 자체가 회복과 해독, 나아가 불침(不侵)을 지향하며, 청룡기로 펼치는 술(術)은 회피와 보신(保身)에 중점을 둔 무공이었다.
‘한바탕 뛰어 보고 싶기는 한데.’
현무를 시작으로 백호, 주작의 기예들은 모두 실전에서 얻어 냈다.
청룡은 달랐다. 삼신기를 연마한 시점에서 이미 그는 청룡기를 자력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잘 되겠지.’
연호정 정도의 무공을 연성한 자라면, 머리로 아는 무공을 즉각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다. 하물며 과거 숱하게 펼쳐 봤던 무공이니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나도 오늘은 좀 쉴까.”
지금쯤 모용우가 당가의 여식, 암천신녀와 만나고 있을 것이다.
그 외에 딱히 신경 쓸 일은 없다. 무공 상승에 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겠지만, 오늘 하루 파군각은 외인의 출입을 금한다고 문지기까지 세워 두었다.
쉬자. 쉴 만하다.
그렇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음?’
누군가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일 층에서 묵비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이제 일어났냐?”
묵비의 눈이 곧장 살쾡이처럼 변했다.
“아까는 신세 많이 졌네요.”
“음? 아하, 아버지 때문에?”
묵비는 울컥한 표정으로 외쳤다.
“연 공자 있는 데서 다시는 술 안 마실 거……!!”
그때였다.
“……어?”
묵비가 정신없이 눈을 끔뻑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냐?”
“뭐예요?”
“뭐가?”
“…….”
“뭔데?”
“…….”
“뭐냐고?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묵비가 멍한 눈으로 연호정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연호정이 인상을 썼다.
“뭐 볼 게 있다고 그렇게 훑어봐?”
“어, 어떻게 그래요?”
“사람 이해하기 쉽게 말해라.”
“강해졌어요?!”
정말 직관적인 단어 선택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세상에……!”
잠기운이 확 달아나 버린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묵비가 보는 연호정의 변화는 그야말로 변신(變身)이라는 말을 써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였다.
묵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엄청나다!’
나른한 얼굴로 서 있는 연호정.
심지어 자세도 조금 바뀌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탄탄하고 빈틈 하나 없는 자세로 서 있었는데, 지금은 어딘지 헐렁하고 유연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유연함에서 오는 허술함을 다른 말로 자연스럽다고도 표현한다.
깨달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연호정의 몸에 깃든 기(氣)가 저절로 그러한 자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진기가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될 수 있는 자세.
“대체 무슨 방법을 썼길래…….”
“방법이 어디 있어. 그간 열심히 수련한 게 마침내 꽃을 피운 거지.”
“…….”
“마침 너 말 잘했다. 괜히 아연이한테 엮여서 술이나 퍼마시지 말고, 그 시간에 열심히 시위나 당겨라. 나는 네가 하루라도 빨리 내가 서 있는 이곳으로 올라왔으면 좋겠어.”
묵비가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어, 너도. 조바심만 안 내면.”
“……과연 그럴까요?”
물론이다.
“나는 널 믿는다. 나도 한 걸 네가 못할 리가 없어.”
자신감을 심어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애초에 재능의 수준이 다르다. 게다가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그녀를 도와줄 사람도 많지 않은가.
더 빨리, 더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쳇.”
묵비가 평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가 김이 새네요.”
“응?”
묵비가 피식 웃었다.
“뭐 하나라도 연 공자를 이겨 보고 싶었거든요. 이왕이면 무공으로 이기고 싶었는데.”
“나 같은 쭉정이 이겨서 뭐 하시게?”
“진심이에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뭐든 날 넘어서려면 멀었다, 이놈아.”
“흥.”
“이젠 콧방귀도 뀔 줄 알고, 진짜 다 컸구만.”
“누누이 말하지만 내가 연상이에요. 그리고 콧방귀 뀌는 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에요?”
“그냥 해 본 말이야.”
결국 묵비의 얼굴에도 유쾌한 웃음이 어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 근데요.”
“왜?”
“아직 남들은 모르죠?”
“뭘?”
“연 공자가 그렇게 강해진 거요.”
“아, 이거는…….”
“전에 모용가주인가? 그 사람이랑 비무했다가 온갖 사람들이 다 달려들었잖아요.”
“……?!”
“하긴, 그러진 않았겠죠. 한 번 된통 당했으면서 또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
“……남들 다 알아요?”
“그, 그게…….”
연호정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예전하고는 다르지 않겠냐? 야, 나 이래 봬도 무종지벽을 넘었어. 너 무종지벽 알아? 그 벽을 넘어야 초절정고수라고 불리는 거거든. 아직 초입이기는 하지만 나름 수준이 높은 경지의…….”
“아냐고요.”
“…….”
“아네. 이미 맹 전체에 퍼졌겠네.”
“허허.”
연호정이 묵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이 친구야.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요. 그때야 뭐 넘치는 호승심에 붙어 볼 만하겠다고 달려들었겠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니지. 나랑 손속을 나눠 볼 정도의 사람은 그리 많지…….”
그때였다.
“연 군장!”
우렁찬 목소리에 태극의 진기가 어려 있었다.
“연 군장, 게 안에 있는가? 빈도는 무당의 승현이라 하네. 괜찮으면 얼굴 좀 보세!”
묵비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언제나 시작은 무당이네요?”
“…….”
“뭐 해요? 얼른 대답해요. 어른이 부르는데.”
끝내주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