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사신완성(四神完成) (2)
“엄청나군요.”
멀찍이 떨어져 연무장을 보는 남궁표의 표정은 실로 묘했다.
감탄, 호승심, 질투, 부러움 등으로 점철된 그 얼굴은 하나의 혼란으로 묶여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굉장한 비무입니다. 그것도 단순한 비무가 아니라 생사를 도외시한 비무라니.”
꽈앙!
폭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열풍이 이곳까지 번져 나왔다.
그것은 주작의 화기(火氣)였고, 충돌의 광기(狂氣)였으며, 부자지간의 비무에서 나와선 안 될 살기(殺氣)였다.
“연가의 장남이 일룡삼봉, 그 이상의 강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보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감이…….”
말을 하던 남궁표가 입을 다물었다.
연무장을 보는 남궁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어떤 순간에도 여유 가득한 표정을 보여 주던 그가 아니었다.
‘…….’
남궁표는 왠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연호정을 보는 것처럼, 아버지는 연가주를 보고 계신 것일까.’
정확했다.
남궁인은 연위의 정석적이고도 막강한 검도(劍道)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연위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환희와 긴장, 호승심과 뿌듯함으로 가득한 그 얼굴이.
‘언제 저렇게 강해진 것인가?’
남궁세가는 검중제일(劍中第一)이라는 명성으로 강호를 위진시킨 최고의 무가였다.
천하제일검가인 만큼 당연히 남궁가주의 무공도 세가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야만 했다. 실제로 남궁인의 실력 역시 육가의 가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연위는 그 이상이었다.
‘어찌 저런 유연함을…….’
무서운 검이다.
기본 골조는 강검(强劍)이지만, 때에 따라서 무수히 많은 검결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유연함의 정도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언제 저러한 변화를 일으켰는지 보고도 쉬이 알아채기 힘들었다.
백검만무의 달인.
천하 모든 검학(劍學)을 집대성한 것 같다. 그야말로 하늘의 점지를 받은 이 시대 최고 검인(劍人) 중 하나라는 평가가 아깝지 않다.
물론 연가의 검법이 정통 중의 정통이라는 사실은 남궁인 역시 알고 있었다. 극에 이르도록 익히면 저처럼 놀라운 검결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도.
즉, 남궁인이 이토록 크게 놀란 것은 단순히 연위의 무공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사아아아악!
일자(一字)로 가르는 장검의 검파(劍波)가 대기를 들끓게 한다.
보이지 않는 화염이 검날에 맺혀 있는 것 같다. 그 화염은 연위의 검에 무서운 위엄과 태산 같은 무거움을 실어 주고 있었다.
공기를 장악한다.
연위의 검이, 그의 존재감이 연무장을 넘어 광장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남궁인으로 하여금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하였다.
‘아버지?!’
검제 남궁승.
검을 쥐고 살아가는 당대 무림인 중 최강의 칭호를 받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제왕이다. 검선(劍仙) 탁무자와 함께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을 다툰다는 무적 검사의 그림자가 연위에게서도 보이고 있었다.
주르륵.
저도 모르게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이놈.’
검의 재능은 있었지만 아버지만큼은 아니었다.
해서 남궁인은 검으로 최고가 될 생각을 버렸다. 대신 술수와 책략에 눈을 돌렸다. 검으로 최고가 못 된다면, 가문의 위상만큼은 최고로 끌어올리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일까?
진즉 포기해 버린 최강 검호의 꿈이 연위의 무서운 검력을 보며 꿈틀대고 있었다. 자신의 재능으로는 저 건방진 검인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더욱 화가 났다.
그리고 두근거렸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저 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같은 육가의 가주이기에 더더욱 그런 욕망이 들끓었다.
불처럼 뜨거웠던 남궁인의 눈빛이 점차 싸늘하게 식었다.
‘너희는 절대 검중제일이 될 수 없다.’
연 부자의 무시무시한 대결에 충격을 받은 것은 남궁 부자만이 아니었다.
“강아.”
“예, 사숙님.”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멸사군이 적도들을 휩쓸 때 연호정도, 아니 연 군장도 전투에 참여했느냐?”
홀린 듯 연무장을 바라보면서도 척강의 대답은 공손했다.
“그럴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냐?”
“예. 진짜 위험한 순간이 아니면 나서지 않으셨죠. 귀신처럼 아시더군요. 우리가 위험해질 순간을.”
“……그렇겠지.”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팔십 근이 넘는 엄청난 중병을 회초리 휘두르듯 움직이며 파멸적인 공세를 이어 가는 연호정의 무공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약해졌던 것인가? 아니면 감각이 무뎌졌던 건가?’
무림맹 청룡대문에서 연호정을 봤을 때.
패율은 연호정의 사납고도 맑은 기도 속에서 빈틈을 보았다.
그것은 그 정도 되는 고수가 보여선 안 되는 빈틈이었다. 그래서 그는 연호정이 크게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이렇게 보니 알겠다. 연호정은 설령 몸이 정상이 아니더라도 빈틈을 보일 만한 무인이 아니었다.
‘실전의 부재. 아랫사람을 신경 쓰느라 감각이 죽었던 것인가.’
패율의 눈에 은근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순수한 호승심이었다.
‘달아올랐구나, 연호정.’
꽈앙!
폭음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간 연호정이 몸을 휘돌리며 광룡부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광룡부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연위에게 날아갔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막강한 진기를 담았는지, 회전하는 광룡부가 거대한 불 바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연위의 대응은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이었다.
콰앙!
산 정상에서부터 굴러떨어진 바위를 쳐 내는 심정과 비슷할까.
하단에서 상단으로 검을 휘둘러 광룡부를 올려 친 연위의 몸이 움찔했다. 검에 남은 충격이 너무 강했던 것이다.
파아악!
대체 언제 하늘로 날아올랐는지 모르겠다.
붉은 휘광을 드리우며 날아오른 연호정이 튕겨 나온 광룡부를 잡아 그대로 연위에게 휘둘렀다.
쾅! 콰지지지직!
연위의 두 발이 딛고 선 바닥이 미친 듯이 깨져 나갔다.
“저거 완전히 미친놈이군.”
연호정의 공격을 본 패율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거기서 도끼를 던질 생각을 해? 허!”
그런 식이다.
연호정의 무공은 지극히 파격적이지만, 놀라우리만치 실전적이기도 했다. 일격필살의 묘리를 담았음에도 연계기를 상정한 움직임으로, 재차 상대를 압박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는다.
‘한 분야에서 궁극의 경지를 엿보는 자들끼리의 싸움이라.’
검(劍)의 화신(化神), 연위.
실전(實戰)의 화신(化神), 연호정.
괴물 같은 부자지간이다. 전혀 닮지 않은 무공 속에서, 점점 서로의 경지를 닮아 가고 있었다.
‘이제 약점이 보이지 않아.’
연호정에게서 빈틈이 사라졌다.
느슨했던 분위기가 한순간 확 조여졌다. 지금 그의 눈에는 제 아비인 연위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사람이 연씨 부자의 비무를 지켜보았다.
누군가에게는 경악을, 누군가에게는 질투를,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부자의 살벌하기 짝이 없는 공방 속에서.
마침내 이 비무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쩌어어어엉!
귀청을 떨어 울리는 충돌음과 함께 두 사람이 뒤로 물러났다.
“후우.”
“헉헉!”
짧게 숨을 고르는 연위와 달리 연호정의 호흡은 굉장히 거칠었다.
상대를 죽이기 위해 극도로 몰입했던 그였다. 하나 연위는 철벽같은 무공으로 연호정의 모든 무공을 받아 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멋지구나.”
“후우, 후우.”
“지금껏 느껴 본 적 없던 고양감이다. 극도로 실전적인 네 무공이, 날 이렇게까지 벅차게 할 줄 몰랐다.”
한참 숨을 고르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는 전력을 내지 않으셨잖습니까.”
“당연하지. 내 전력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이놈아.”
“하하하!”
실제로 그렇다. 아직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연위가 진정 죽일 기세로 무공을 구사한다면, 지금 연호정의 실력으로는 채 삼십 합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실제로 붙어 봐야 알겠지만.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비무의 마무리는 네가 지어야 한다.”
“예?”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마무리를 지으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스륵.
연위가 자세를 낮추었다.
철검대연삼십육식(鐵劍大衍三十六式)의 초식, 전광일식(電光一息)의 기수식이었다.
“겁이 나느냐?”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의 무공이 점점 예리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응도 빨라졌고, 매 순간 사고를 확장하여 내 공격 하나하나에 대응하더구나.”
“……?”
“싸움 중에 성장한 것이 아니다. 이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은 반응 속도와 창의적인 실전 능력은, 네가 본래부터 갖고 있었던 재능이다.”
“예?”
“그 놀라운 감각이 어찌 그리 무너졌던 것이냐?”
“그건……?”
“그조차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번쩍!
연위의 두 눈에 엄기(嚴氣)가 서렸다.
“무엇이 두려우냐? 무엇이 그리 걱정스러웠느냐?”
“……?!”
“예전과 달라진 너의 모습이, 그 변화가 그리도 큰 부담이었느냐?”
순간 연호정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들의 표정을 본 연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상 만물 변하지 않는 사람도, 물체도, 사상도, 진리도 없다. 다만, 너의 주관이 흔들려서는 아니 되겠지.”
훅!
연위의 몸이 연호정의 일 장 거리 앞에서 나타났다.
스륵.
연호정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
우측 복부, 간장(肝臟)이 위치한 곳에 아버지의 검 끝이 닿아 있었다.
“네가 어떻게 변한다 한들 본가는 언제나 널 환영할 것이다. 그러니 마음에 자리 잡은 잔재 따위는 털어 버리고 다시 한번 날아올라라.”
연위가 미소 지었다.
“이런 빤히 보이는 약점 따위 내놓고 다니지 말고 말이다.”
투우웅!
연호정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쿨럭!”
쏟아지는 핏물이 유독 칙칙해 보였다.
놀랍게도 그 핏물에는 상당량의 탁기가 섞여 있었다. 연호정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던 탁기, 바로 심상(心傷)으로 얻은 탁기였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떠냐?”
연호정이 연위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꺼내 들지 않은 패가 남았음을 알고 있다. 내 예상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하면 그 패로, 이 화려한 비무를 마무리해 보는 것은 어떠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후웅!
연위의 검이 상단으로 향하며 하늘을 가리켰다.
내쉬는 숨결마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대로 검을 내리치면 연호정의 몸이 두 쪽이 날 것이다.
그때였다.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연위의 장검에서 무형의 전광(電光)이 이글거렸다.
연가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 검은 연위가 깨달음을 통해 얻은 새로운 무학이었다.
예전, 아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던 그 일검(一劍).
그 절대의 일검이 지금 이 순간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
잠시의 침묵이 일었다.
연씨 부자의 침묵은 이곳을 보는 모든 이에게 무서운 중압감을 안겨 주었다.
척강은 침을 꼴깍 삼켰다. 패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남궁인의 눈에 핏발이 섰고, 입을 앙다문 남궁표의 얼굴에 강한 긴장이 드리워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콰르르릉!
천둥소리와 함께 연위의 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바로 그 순간.
번쩍!
연호정의 두 눈에서 청록빛 광채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이내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연무장 전체가 짙은 먼지구름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우우웅.
청록빛 비늘을 번뜩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환상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