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악명과 협명 (5)
달빛 좋은 밤.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후원의 평상에 술자리를 벌인 두 사람의 얼굴은 상당히 밝아 보였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일단 한잔하세나.”
“좋지.”
째앵.
잔과 잔이 부딪치며 맑고 고운 소리를 냈다.
연호정은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캬아!”
시원하다.
어깨에 두른 짐을 잠시 내려놓고 쌓인 피로까지 싹 풀었다. 몸도 가볍고 달빛도 좋다. 거기에 술 한 잔까지 걸치니 세상 나른하다.
모용우가 빙긋 웃었다.
“호쾌하게도 마시는구먼.”
“술 마시다가 암습 당할 일은 없으니까.”
웃는 얼굴로 살벌한 얘기를 잘도 한다. 모용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힘들었나?”
“그냥 그렇지.”
사실 흑암제 시절을 생각하면 크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싸움이야 다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다만 싸우는 내내 군병들의 안전에 신경을 쏟아야 했고, 나아가 흑도 무리에 과거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일일이 살펴보았다.
그래서일까? 매 순간 심력 소모가 컸다. 실제로 육체가 받은 피로보다는 정신적 피로가 큰 일정이었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다 털어 버려도 될 것 같으니까.”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아주 좋아 보이는군. 그래, 그거면 되었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쪽이 한 일이야 뻔하지만, 그쪽은 어떻게 버텨 왔는지 잘 상상이 안 가는데?”
“…….”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나 얘기해 줘 봐. 마땅한 안주도 없는데, 그거라도 안주 삼아 술을 퍼야겠어.”
모용우가 맑은 웃음을 지었다.
여전하다. 동시에 미묘하게 뭔가가 달라졌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모용우는 그런 연호정의 변화가 좋았다.
연호정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없지만,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모용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의지가 되는 동생이야.’
나쁜 사람이 아니라서? 그게 아니었다.
설령 연호정이 극악무도한 악인이라도 한 번씩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왜일까? 웅크리고 있던 자신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야.’
모용우의 맑은 눈에 반짝이는 별빛이 담겼다.
‘연제에겐 보는 이로 하여금 동경심을 갖게 하는 뭔가가 있다.’
연호정은 법도와 협의로 명성 높은 연가의 장자답지 않았다. 때로는 거칠고 파격적이었으며, 때로는 부드럽고 인간적이었다.
그 상반되는 성격들이 모여 연호정의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치 날개라도 달린 사람처럼, 한번 움직이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닐세.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참 의지 되는 동생이다 싶어서 말이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싱겁긴.”
“이왕이면 조금 더 마음 놓고 마시고 싶지만, 일 얘기부터 끝내는 게 좋겠지?”
“그렇지.”
모용우는 지난 세월 어떻게 지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당가?”
“그렇다네.”
“중원전장은 어디로 가고 갑자기 당가야?”
“중원전장보다는 당가가 더 낫다고 생각하셨겠지.”
“흐음.”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세력전을 상정한다면 중원전장보다는 당가가 낫지. 게다가 당가주는 같은 봉공이기도 하니까 봉공회의 때 무언가를 추진하기도 좋을 거고.”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다만…….”
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 혼인하는 게 좀 그래서?”
“그렇다네.”
모용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금 세상에 연정(戀情)부터 쌓고 혼인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 역시 그러한 딱딱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네. 하지만…….”
“모용군 때문에?”
“……그렇다네.”
두 사람은 훗날 모용군을 축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용군은 당가주 당관과 손을 잡으려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당가와 정치적 공동체가 될 거란 뜻이다.
만일 모용군을 몰아내는 데 있어 당가를 배제할 수 없다면?
모용우는 자신의 형은 물론 처가까지 쳐 내야만 하는 것이다.
“고민할 만하군.”
연호정은 모용우의 결심이 어중간하다고,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나와 손을 잡았냐고 말하지 않았다.
충분히 고민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용우에게 그런 인간미가 있기에 그를 무림맹주로 세우기로 생각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중원전장의 장녀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도 놀랐네. 나를 통해 새로운 세력과 손을 잡으려 하실 거란 생각은 못 했어.”
“세도가끼리의 혼인으로 권력 기반을 탄탄히 하는 건 고래로 자주 써먹던 방법이야.”
“아네. 알지만 그 대상이 내가 되니 고민이 심할 수밖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대놓고 말하지. 쓸데없는 걱정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니?”
“아직 당가의 여식과 만난 적도 없다면서?”
모용우가 당혹스럽다는 듯 말했다.
“물론 그렇다네. 하지만 형님과 당가주께서는 어떻게든 밀어붙일…….”
“그럴 리가 없어.”
“음?”
모용우의 별빛 같은 눈빛과 달리 연호정의 눈빛은 태양처럼 강렬했다.
“내가 아는 모용군은 양자택일의 상황이 왔을 때, 절대 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
“모용군의 말은 진심이야. 당신이 당가의 여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사를 파하겠다는 말.”
“물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그럼 고민할 거 없잖아?”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일단 만나 봐.”
“…….”
“아닌 말로 둘이 만났다고 해서 양가에서 바로 혼인시키자고 밀어붙일 것도 아니잖아? 말 그대로 만나 보는 것에 불과해.”
“그, 그건 그렇지만…….”
“왜? 만나자마자 진도 확 빼 버리고 싶어?”
“여, 연제!”
모용우의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순진한 양반 같으니.
“부담 갖지 마.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거다. 거기에 이런저런 의미 따위 붙여 봤자 탁상공론에 불과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잖아.”
모용우가 한숨을 푹 쉬었다.
“연제 말이 맞네. 아마 내가 껄끄러운 것은 만남 자체에 순수한 의도가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겠네.”
“순수한 의도로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내가 댁을 찾아간 의도에 순수함이 있었나?”
“…….”
“다 그런 거야. 이건 다르다, 저건 그래도 된다 하는 생각은 어지간하면 버리는 게 좋아. 물론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있겠지만.”
“후우.”
좋은 자리라고 왔는데 어째 계속 한숨만 쉬게 된다. 모용우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어렸다.
연호정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정 그러면 생각을 바꿔.”
“음? 생각을 바꾸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당가의 여식이 마음에 안 들면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마음에 들면 어쩔 거야?”
모용우의 표정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그럼 더더욱 혼인을 해선 안 되네. 그 사람을 위해서도, 나아가 나를 위해서도.”
연호정이 묘한 웃음을 띠었다.
“올바르군. 낭만적이야. 하지만 사고를 조금 더 확장할 필요는 있겠어.”
“무슨 말인가?”
“그 사람을 완전히 댁의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생각은 왜 못 하나?”
“……!!”
“좋아하니까 포기한다? 웃기고 있네. 좋아하면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 그래서 혼사를 치르면? 그럼 좋은 거지.”
모용우가 입을 쩍 벌렸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 안 그래도 본심을 숨긴 채 형 밑에서 있느라 죽을 맛일 거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하며 피로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만약.”
“음?”
“만약 그 사람이 큰 충격을 받으면 어찌하나? 아니, 필시 그럴 텐데.”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때는 상대의 원망을 다 받아 줘야지.”
“…….”
“당신은 당가의 힘을 얻기 위해서, 모용세가를 위해서 그 사람과 만나는 게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됐으니 만나는 거지. 적어도 당신에게는 상대를 상처 입힐 의도가 전혀 없어.”
“…….”
“그런데도 마음에 걸린다면 내일 당가의 여식을 만나 본 후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면 돼. 그저 그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만나 보고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하네. 형이 되어 못난 모습을 보였어.”
“뭔 소리야?”
“응?”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는 댁을 내 형으로 인정한 적이 없는데? 나를 아우라고 칭한 것도 순전히 댁 마음대로 부르고 있는 거잖아?”
“뭐라?”
놀라서 연호정을 보던 모용우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청아한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메웠다.
문득 생각해 보니 이렇게 시원하게 웃어 본 적이 얼마 만인가 싶었다. 정말이지 가슴 속에 깃들어 있던 불안과 걱정이 싹 날아가는 듯했다.
한참을 웃던 모용우가 이내 담담하게 말했다.
“슬슬 호칭 정리할 때가 되었지. 형이라고 부르게.”
“싫어.”
“왜? 나 역시 내가 부족한 건 알지만, 적어도 연제의 우형으로 남을 자신은 있네만.”
“웃기지 마. 이성 문제로 끙끙대는 못난 사람을 형으로 둘 생각 없어.”
“누구에게나 처음은 어설픈 법일세.”
물끄러미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셨다.
“크허, 시원하다.”
모용우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냥 해 본 소리일세. 정 싫다면 나도 의형제지간을 강요할 생각은…….”
“내일 당가 여식이나 잘 만나고 와.”
“응?”
“오늘의 이 모습 잃지 말고 잘 만나 봐. 머저리처럼 어버버 말실수하지 말고.”
쏟아지는 달빛에 연호정의 눈이 신비롭게 빛났다.
“사내답게 잘 만나고 돌아오면, 그때는 형님이라고 불러 주지.”
모용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걱정하지 말게. 내 이래 봬도 나름 사내다운 면이…….”
“없지.”
“있네! 나를 뭘로 보는 겐가?”
“글쎄? 타고난 재능을 써먹을 줄 모르는 반편이?”
“어허, 형에게 말버릇이 그게 뭔가.”
“시끄러워.”
모용우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자리였다. 참으로 좋은 자리였다. 모용우는 오늘 밤 연호정을 찾아와서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몇 순배의 술이 돌았다.
“해서, 탕마군에 들어올 사람들은 다 봤나?”
“봤지.”
“어떻던가?”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하나같이 뛰어난 자들 뿐이더군.”
“그렇겠지. 모용군이 어지간히 신경을 썼을 테니.”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 논의할 게 하나 있네.”
“뭔데? 수하들 휘어잡는 법?”
“그건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런 부분에선 묘하게 박력이 있군. 그래, 어떤 걸 논의할 생각인가?”
모용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우의 기물 하나를 내가 따먹어야겠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한 수 물려라?”
“그래야 할 것 같네.”
“흠.”
“이쪽 상황에 대해서는…….”
“괜찮아. 그 얘기는 안 해도 돼.”
“그래도 들어 두는 게 좋지 않겠나?”
“모용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안 봐도 알아. 게다가 너무 상세하게 알고 있으면 도리어 혼란스러울 것 같아. 훗날 모용군을 만날 때 실수할 여지가 있어.”
“음, 알겠네.”
“잘하고 있지?”
“그렇다고 생각하네.”
“그럼 됐어. 지금까지처럼만 해.”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기물 하나를 가져가겠다…… 으흠, 어떤 걸 건네줘야 모용군이 좋아할꼬?”
“무리할 필요는 없네. 그저 형님께 내 존재감을 각인시켜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이왕 존재감을 드러내려면 의심하지 않는 선에서 제법 두툼한 놈을 건네주는 게 좋겠지.”
순간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탕마군의 출정 예정일이 언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