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악명과 협명 (2)
“후우.”
연호정이 자세를 풀었다. 그러자 묵비도 활을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털썩.
광룡부를 내려놓자마자 그대로 주저앉는다. 체력 하나만큼은 괴물처럼 막강한 연호정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묵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응, 괜찮아.”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다.
연호정의 낯빛은 아직도 창백했다. 아직 내상이 다 낫지 않은 것이다.
“요 며칠은 쉬는 게 좋겠어요.”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상태 좀 보고.”
묵비는 내심 안타까웠다.
홍요회의 기습으로 멸사군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들은 지금껏 선제공격을 취한 적은 있어도 습격을 당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 습격으로 인해 열 명이 넘는 중상자가 나왔다.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때, 연호정은 돌변했다.
최대한 차분하게 중상자를 수습하고 의방을 수배, 조치를 취한 연호정은 곧장 묵비와 병력 일부를 데리고 홍요회를 쳤다.
당시를 떠올린 묵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렇게까지 무서워질 수도 있구나.’
연호정은 마귀가 되어 날뛰었다.
필설로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광기였다. 목표물을 위해선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암살자들이 겁에 질려 도망칠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나.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연호정은 멸사군의 군병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거의 자식 대하듯 했다.
‘놈들의 수법 때문에 더 화가 났겠지.’
부대에 사상자가 나오는 것은 숙명이다. 적이 어떤 수를 쓰든 당한 놈이 바보인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묵비가 보기에 멸사군은 자칫 개죽음을 당할 뻔했다.
말은 더 긴장하라고 했지만, 연호정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었으리라.
‘응?’
착잡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던 묵비는 문득 그의 손에 피가 나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연 공자. 손에 피가…….”
“응?”
오른손을 내려다본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좀 찡하더라니.”
“네?”
“중병(重兵)을 다루는 자의 숙명이지. 육체가 극한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상, 까딱 잘못하면 손이 뭉개질 수도 있거든.”
연호정이 오른손을 주물렀다.
“뼈나 관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살짝 밀려서 찢어진 것뿐이다. 며칠 쉬면 나아.”
한숨을 푹 내쉰 묵비가 품에서 깨끗한 천을 꺼냈다. 누가 언제 어떤 상처를 입을지 몰라 항상 가지고 다니는 의료용 천이었다.
“손 내놔 봐요.”
“괜찮아.”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내놔요.”
“아, 괜찮다고. 내버려 둬도 돼.”
“미간에 구멍 내 버리기 전에 내놔요.”
“여기.”
연호정이 손을 뻗었다. 묵비가 익숙한 동작으로 그의 손에 천을 감았다.
“야.”
“왜요.”
“근데 너 손가락은 괜찮냐? 홍련궁 시위 당겨 보니까 그거 장난 없더만.”
묵비는 담담한 목소리로 비수를 날렸다.
“괜찮아요. 저는 누구처럼 제 몸 상태도 못 살피는 바보는 아니거든요.”
물끄러미 묵비를 보던 연호정이 냅다 이마를 박았다.
빡!
“악!”
묵비가 벌러덩 주저앉았다.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한순간 정신이 날아갈 뻔했다.
“무, 무슨 짓이에요!”
“킁. 그냥 얄미워서.”
“이게 진짜……!”
묵비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사람이 걱정이라는 걸 해 주면 얌전히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참 알다가도 모를 양반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치료해욧!”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어휴! 저러다 한번 된통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씩씩대며 자리를 벗어나는 묵비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그러다 묵비가 사라지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오, 저 돌대가리 새끼. 이마에다 한철을 둘러 놨나. 정체가 뭐야?”
혹시라도 나중에 저놈과 싸우게 되면 박치기만은 절대 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래도 머리가 찡 울리는 고통을 겪고 나니 잡생각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연호정이 이마를 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또 내상이 안 낫네.”
이번 내상은 홍요회 본진이 폭발하면서 입은 내상이었다.
낌새를 눈치채고 곧장 회피하려 했지만 옥청이 너무 깊이 파고들었다.
극한의 내공을 소모하며 혈익휘천을 펼쳤다. 대체 몇 번이나 펼쳤는지 기억조차 안 날 정도였다.
결국 모두를 구할 수 있었지만, 그가 입은 내상은 꽤 심했다.
‘뭐, 사망자 안 낸 걸 생각하면 거저나 다름없지만.’
가부좌를 튼 연호정은 벽라진결을 운용했다.
우우웅.
보기만 해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듯한 푸른 진기가 전신 가득 맴돌았다.
어느새 벽라진결도 십 성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십 성으로 올라서면, 이제는 심법 자체에 더 올라갈 곳은 없다.
그때부터는 한없이 깊어지는 시간이 찾아온다. 말하자면 벽라진기를 어떻게 가꾸느냐의 싸움이지, 성취를 올리는 싸움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길을 완벽하게 닦아 놓는 그 순간.
바로 그때 무공의 경지가 십이 성(十二成) 극성(極成)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었다.
“후우.”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 이제 좀 알겠네.”
과거 흑암제 시절보다 내상 치료가 늦는 이유.
명천과의 싸움을 끝낸 직후 그는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내상을 치료하기까지 생각보다 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화약의 폭발로 입은 내상은 꽤 심했지만, 본래라면 지금쯤 구 할 이상 회복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리고 연호정은, 흑암제 시절보다 내상이 늦게 회복되는 이유를 지금에야 깨달았다.
“내공 때문이었군.”
삼신기(三神氣)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청룡기(靑龍氣)의 부재 때문도 아니었다.
벽라진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사신기의 바탕이 될 내공량이 예전보다 훨씬 적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연호정은 내공의 양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인식이었다.
내공은 양보다 질이다. 질 좋은 내공은 한 푼의 힘으로 타 내공의 열 배의 효율을 낸다.
그것은 상식이자 진리였다. 정파의 무공도, 사파의 무공도 그 기본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사신무는 그 이상을 원했다.
‘애초에 사신기 자체가 어떤 내공심법의 진기보다도 고차원적인 힘을 낸다. 그런 특성이 있으니, 바탕이 되는 심법의 질만큼이나 양도 중요했던 거야.’
사신기가 거하는 장소는 단전이 아니라 담당하는 장기다. 즉 사신기가 깊어진다는 것은 담당 장기의 능력이 예전보다 활성화됨을 뜻했다.
장기가 활성화되니 신체 역시 끊임없는 변화를 이룬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길, 대대로 사신무장의 육체는 금강석(金剛石)만큼 튼튼하다고 하였다.
‘나도 그랬지.’
흑암제 시절 그의 육체는 흉기나 다름이 없었다. 내공을 싣지 않고도 강철 철판을 손쉽게 우그러트릴 정도였다.
‘그래서 사부님은 내게 홍천기를 전수해 주신 것이로군.’
홍천기 자체는 결코 천하를 논할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능히 일류라 불릴 만하지만, 신공(神功)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다.
그런 홍천기의 가장 큰 장점이 축기(畜氣)의 양과 속도였다.
‘홍천기로 누구보다 많은 양의 내공을 쌓았으니 사신기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던 거야. 내상을 입었다고 움츠러들 이유가 없었던 거지.’
즉, 회복 속도가 예전만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바탕이 되는 내공량을 증폭해야 한다는 뜻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소천기단을 취해 볼까.’
제갈아연이 줬던 소천기단은 아직도 먹지 않았다.
강호는 위험하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당장 큰 문제가 될 것도 아니라서 훗날을 위해 아껴 두고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건 나중에 지평한테 줘야겠어.’
내공량을 늘리려고 영약을 취하는 것보다, 내공심법의 성취를 끌어올려 전반적인 기량을 상승시킨다.
조금은 돌아가는 길이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이게 낫다.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왕 사신무를 익힌 거, 과거보다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야 마땅하다. 예전처럼 단순한 접근으로 황룡(黃龍)을 넘볼 순 없을 테지.’
소천기단 하나 먹는다고 무공 성장에 이상이 생기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더 좋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놔둔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왔던 길, 깨달았던 무공의 이치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일단 벽라진결을 십 성 대성한다. 이후 점진적인 내공 증폭으로 십이 성 극성을 이룬 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오대신공을 섭렵해야겠군.’
연가의 오대신공을 전부 익히면 최고 비전 신공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때가 되면 내공의 양과 질,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연호정은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그간 너무 바쁘게 달려서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 어려웠는데, 차라리 잘 됐구나 싶었다.
그렇게 한참 홀로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형님?”
“엉?”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팽만호가 순진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어? 언제 왔냐?”
“일부러 쿵쾅쿵쾅 걸어왔는데도 모르시던데요?”
“아, 그래? 근데 무슨 일이야?”
“제갈 누님이 부르십니다.”
“어, 알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은 문득 드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야.”
“왜 그러세요?”
“근데 그 형님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되냐.”
“왜요? 듣기 싫으세요?”
“그런 건 아닌데, 나이도 같은데 왜 자꾸 형님이라고 불러?”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형님이라고 불러야죠. 관우가 유비보다 나이 많았던 건 아세요?”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연호정은 그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저었다.
“마음대로 해라.”
“예.”
“근데 내 어디가 존경스럽냐?”
“저보다 무거운 무기를 쓰시잖아요.”
“……고작 그거냐?”
“고작이라니요? 충분히 존경스럽죠, 그 정도면. 제가 어디 가서 힘으로는 안 밀리는데 형님 앞에서는 도저히…….”
“너,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지 마.”
“왜요?”
“부르지 말라면 부르지 마, 이 새꺄.”
척척 걸어가던 연호정은 괜스레 울컥하는 걸 느꼈다.
“시벌, 존경할 게 없어서 그런 걸 존경하냐!”
“왔어? 음?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내 표정이 왜.”
“그냥 떨떠름해 보여서. 이마는 또 왜 그렇게 빨개? 어디 돌에라도 찧었어?”
“돌보다 단단한 곳에 찧었다.”
대충 바닥에 퍼질러 앉은 연호정이 물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군사님?”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놀리지 마라.”
“놀리는 거 아니다. 군사 맞잖아?”
“됐고, 이거나 봐.”
제갈아연이 건넨 서신을 본 연호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귀맹(歸盟)……?”
“본군의 업적도 치하할 겸, 휴식 시간도 줄 겸 부른다고 하더라고. 적어도 명목은 그래.”
“명목은 그렇다라…… 또 뭐가 있나?”
제갈아연이 품에서 또 하나의 서신을 꺼내 들었다.
“그건 무림맹에서 보낸 거고, 이거는 후개가 따로 보낸 거야.”
연호정은 가득상이 보낸 서신도 읽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오호.”
“수상하지?”
제갈아연의 얼굴에 은근한 긴장이 떠올랐다.
“당가주는 절대 고민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아니면 아닌 거고, 맞으면 맞는 거지. 일단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보셨어.”
“그런데도 굳이 나서서 멸사군의 귀맹에 앞장섰다고?”
“냄새가 나지?”
“그래, 냄새가 나.”
연호정은 당관을 떠올렸다.
두 눈 가득 위험천만한 불길함을 담고 있던 고고한 늑대의 얼굴을.
“결국 모용군과 손을 잡았구만.”
“…….”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빠르군.”
제갈아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맹에서 정식 명령이 떨어졌는데.”
“찝찝하면 조금 더 시간을 끄는 것도…….”
연호정이 딱 잘라 말했다.
“안 돼. 멸사군은 독립 유군이야. 그만큼 자유롭지만, 윗선에서 내려온 명령은 철저하게 따라야 해. 적어도 그런 티는 내 줘야지. 그게 바로 책임이야.”
“후우, 어렵구나.”
“애들은?”
“거동에 큰 불편함은 없어. 그래도 며칠 더 안정을 취해야 뒤탈이 없겠지.”
“좋아.”
연호정은 내심 아쉬웠다.
‘바로 다음 목표지에 진양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진양.
흑제성 오대신장 중 하나이자, 유쾌한 성정만큼이나 유연한 무공으로 백도 무림에 공포를 흩뿌린 남자.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이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자신이나 멸사군이나 너무 급하게 달려왔다.
이번 기회에 부대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욕심을 낼 때가 아니었다.
“사흘 후 맹으로 복귀한다. 애들한테는 내가 직접 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