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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50화 (150/963)

150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무섭다 (5)

호북 북부에 자리 잡은 교구채(鮫口寨)는 산적 집단인 녹림채 중 가장 역사가 짧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십 년 역사도 되지 않는 교구채는 어느새 산군채(山君寨)와 함께 녹림제일을 다투는 산적 집단으로 컸다.

그것은 전적으로 교구채의 주인, 혈교사도(血鮫死刀) 도칠 덕분이었다.

혈교, 즉 피에 물든 상어다. 그는 본래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의 잘 나가는 수적 대장이었다.

그런 그가 왜 산적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의 무공이 뛰어나고, 수완도 대단하다는 게 중요했다.

심지어 그는 병법에도 능했다. 수적질로 먹고살았던 도적이 육지의 병법에 능통하긴 쉽지 않은데도, 그는 전술이라는 걸 구사할 줄 알았다.

녹림채 최고수이자 최고의 전략가라는 도칠.

그런 도칠에게 재앙이 떨어졌다.

쩌어어어엉!

“크윽!”

강력하게 몰아붙이는 폭풍 같은 검격(劍擊)에 도칠은 이를 악물고 물러서야 했다.

“이 애송이 놈이!”

“시끄럽다.”

냉혹한 한마디와 함께 곧바로 검격을 몰아치는 청년은 장산(張傘)이었다.

우우우웅!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우렁찬 검명과 함께 시원한 검풍(劍風)이 불어닥쳤다.

시원하게 느껴진다고 피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장산이 휘두르는 검은 송풍검(松風劍)이었고, 송풍검은 구대문파 중 청성파의 절기였다.

도칠의 직도(直刀)가 어지럽게 휘둘러졌다.

쩌저저정!

도검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놀랍게도 구파의 제자인 장산보다 도칠의 도격이 더 강했다. 폭발적인 도초 속에는 힘과 기교가 절묘하게 맞물려 있어 어지간한 고수도 쉽게 대응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장산은 수백 년간 정파의 기둥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린 청성의 무학이 함께하고 있었다.

치리링! 파라락!

도칠의 눈이 흔들렸다.

‘이놈이 또!’

몰아붙이는 교아살검(鮫牙殺劍)의 무공이 또다시 허공을 베어 냈다.

눈이 부신 회피였다. 그리 빠르지도, 절묘하지도 않은데 어느새인가 측면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이게 뭔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

청성파 비전의 벽운보(碧雲步)다.

푸른빛 구름처럼 흘러가는 발걸음에 어느새 공격선을 놓치게 만든다. 제대로만 구현한다면 공방의 수급을 지극히 탄탄하게 만들어 주는 보법이었다.

“으압!”

쾅!

기합성과 함께 진각을 밟은 도칠이 직도를 흩뿌렸다.

쩌어엉!

장산이 다시 한번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강하다.’

비록 최고는 아니지만 십 년이 넘도록 청성에서 검을 갈고 닦았다.

도칠은 그 십 년 세월을 넘어설 정도의 힘을 갖춘 진짜 고수였다. 한낱 산적 무리 대장이라고 무시할 만한 실력이 아니었다.

‘벽운보와 검결을 섞어 실전 능력을 향상시키지 못했다면 진작 죽었을 거야.’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곳 교구채의 산적들 하나하나가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들을 데려다가 산적으로 만들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쩌저정! 파캉! 퍼억!

“크아아악!”

“좌측! 좌측에서 밀어붙여!”

“연경아! 한데 뭉쳐야 해!”

“후방 공격 들어옵니다! 뒤에서 막아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오십이 조금 안 되는 남녀들이 제각기 흩어져 교구채의 산적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바로 멸사군의 군병들이었다.

퍼어억!

“이익!”

삼검(三劍)에 산적 둘의 목을 날려 버린 동호는 이를 악물었다.

적의 목을 베었다. 그 섬뜩한 감각에 손끝이 저려 오는 듯했다.

‘안 돼! 머뭇거리지 마!’

이를 악물고 재차 돌진한 동호가 힘차게 손을 뻗었다.

퍼어엉!

또 하나의 산적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화산파의 절정무공 죽엽수(竹葉手)가 정통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꼬맹이가!”

부우우웅.

어느새 높이 도약해 날아든 한 산적이 거대한 칼을 휘둘렀다.

압도적인 살기였다. 어찌나 살기가 강한지 햇빛이 다 가려지는 듯했다.

윤호가 외쳤다.

“위험해!”

그때, 한 줄기 구름 같은 장력이 거도(巨刀)를 든 산적의 옆구리에 적중했다.

퍼어엉!

“컥!”

허공에서 중심을 잃은 사내의 자세가 무너졌다.

떨어지는 사내를 향해 동호가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서걱! 푸화악!

목이 절반이나 베인 산적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헉! 헉!”

동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방금 이놈이 장력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무공이 강해도 시야를 넓히지 못하면 당한다. 새삼 실전의 흉흉함을 깨닫는 그였다.

“고마워요, 여 형님!”

“지금 인사나 할 때가 아니야!”

파라라라락!

무서운 속도로 접근한 여국이 동호의 옷깃을 잡아 그대로 내리눌렀다.

자연스레 동호의 상체가 사선으로 눕혀졌다. 여국은 기다렸다는 듯 검을 뻗었다.

퍼억!

“끄르르륵!”

정확하게 목젖을 가른 검. 빠르고 정교한 일검이었다.

“정신 차려! 넋 놓고 있다간 죽는다!”

“예! 걱정 마세요!”

“걱정하게 만들지를 마, 이놈아!”

여국과 동호, 윤호가 세 방위로 뛰쳐나가 검을 휘둘렀다.

푸화아아악!

연신 터져 나오는 핏물이 햇빛을 명멸케 하고, 대지에 드리워진 죽음이 허무의 그림자를 낳았다.

멸사군의 오십 군병들은 제각기 조를 짜서 교아채를 몰아붙였다.

석 달간의 지옥 같은 훈련을 겪었다지만, 여전히 그들은 완성되지 못했다. 순간순간 빈틈을 보이는 이들도 있었고, 적의 살을 꿰뚫는 감각에 치를 떠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상대는 어디서 배웠는지 무공까지 연마한 산적들이었다. 숫자는 삼백에 달했고, 살인 역시 밥 먹듯 해 온 이들이었다.

결정적으로 여기는 놈들의 본진이었다.

혹독하게 훈련한 멸사군으로서도 쉬운 상대가 아니다. 아차 하면 죽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극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죽음의 난전.

물론 개중에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화려한 무용을 뽐내는 자들도 있었다.

퍼어어억!

강력한 발길질에 산적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일각일살(一脚一殺)이다. 점창파의 비궁천파각(飛弓踐波脚), 척강의 무자비한 일격이 상대의 복부에 고스란히 꽂힌 것이다.

“강이 너, 너무 살벌한 거 아니냐? 이크!”

“좌측 조심해요!”

서걱!

“크악! 야! 좌측이라며!”

“제 쪽에서 좌측이라고요! 아오!”

부웅! 팅!

빛살처럼 쏘아져 나간 검격에 또 하나의 산적이 죽었다.

이러나저러나 멸사군은 여전히 실전에 약했다. 손발도 안 맞았고, 냉정하게 사태를 주시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들에겐 예전에는 없었던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배짱이었다.

번쩍!

매서운 칼날이 코앞을 지나간다.

반 치만 더 들어왔어도 양쪽 눈이 베여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송연경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퍼어억!

항마창(降魔槍)의 전진 일격이 산적의 가슴을 꿰뚫었다.

“군장님의 도끼에 비하면.”

콰직!

후려치듯 내리찍은 창대가 다른 산적의 빗장뼈를 깨부쉈다.

“산들바람만도 못해.”

빠각!

불괴신각(不壞神脚)의 단타에 산적의 목이 부러졌다.

아미파는 부처를 모신다. 무학의 수준은 천하를 논할 만하지만, 이렇게 살기 넘치는 해석은 없다.

송연경과 창수들이 구사하는 아미 무공은 달랐다.

속가제자이면서도 본산의 비기를 개방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작정하고 살심을 품으니, 일격 일격이 막을 수 없는 살초가 되어 적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 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전과였다. 송연경을 중심으로 한 아미파 제자들의 창술은 움직이는 철옹성이 되어 적도들을 격파했다.

퍼버버벅! 카앙!

어느새 그들이 적진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다가오는 모든 적을 분쇄하며 나아간다. 그간의 훈련에서 가장 많이 성장한 게 바로 그들이었다.

“괜찮군.”

격전지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멸사군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 달 훈련에 이 정도 수준이면 나쁘지 않아.”

“……정아.”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뭘?”

“세상에 저게 구파 제자들의 무공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얼마나 놀랐는지 그녀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팽만호도 마찬가지였다.

‘지옥도야, 뭐야?’

동호의 어설픔? 청성 제자들의 기민하지 못한 대응?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실전에 눈을 뜬 멸사군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말이 녹림제일을 노리는 산채지, 어지간한 군소 문파 정도는 하룻밤 만에 잿더미로 만들 힘이 있는 게 교아살채였다.

멸사군은 그런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결국은 이거지, 이거.”

연호정이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눈앞에 창칼이 날아와도 물러서기보다는 전진해서 공격할 수 있는 배짱. 죽더라도 적을 분쇄한 후에 죽겠다는 독기.”

“…….”

“지난 석 달 동안 저 녀석들이 배운 게 그거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저 녀석들, 처음 며칠간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어. 몇몇 놈들은 진짜로 베였거든.”

“헉! 저, 정말?!”

“그중엔 옥청도 있다. 저거 봐, 움직임이 세밀하질 못하잖아. 외상은 다 나았지만, 첫날 입은 내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증거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내상도 다 낫지 않았다고?”

“그래.”

“그런데도 투입했어? 그러다 골병들면 어쩌려고!”

연호정의 눈이 일순 차가워졌다.

“적의 칼에는 눈이 없어. 내 상태를 일일이 봐주면서 상대해 주는 고마운 적이 어디 있나?”

“……!”

“충분한 훈련을 받고도 죽는다? 그럼 거기까지가 한계인 거야. 누구의 잘못도 아닌 본인의 잘못이요, 운에 불과해.”

연호정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게 실전이고 전쟁이다.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는 거.”

진한 무게감이 실린 말이었다.

그 스스로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신무를 배우고 하산한 이후에도 그는 실전 하나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수년 만에 흑도 최악의 위험인물로 악명을 날린 것은, 아득바득 적을 죽이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일까? 멸사군의 싸움을 보니, 괜스레 흑제성 시절이 떠올랐다.

자신과 함께 목숨을 걸고 흑도를 평정했던, 진짜 무인다운 무인들이.

그중 흑제성을 창설할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을 포함, 고작 일곱 명에 불과했다.

“살 거야.”

“……?”

“녀석들은 살아남을 거야. 적어도 이런 곳에서 죽을 놈들은 아니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녀석들만 목숨을 건 게 아니야. 나도 녀석들을 가르치며 목숨을 걸었다.”

“…….”

“만에 하나라도 죽을 것 같은 놈들은 직접 불러서 생사의 치열함을 뼛속까지 새겨 줬어. 그 정성을 안다면 쉽게 죽을 수 없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잘할 거야. 훗날 멸사군이 해체되면 돌아가서 큰일을 해야 하니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제갈아연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팔짱을 낀 연호정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어떤 적도 무서워하지 않는 독한 놈이 멸사군의 싸움을 보며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응?”

제갈아연이 호걸처럼 씨익 웃었다.

“나더러 멸사군의 군사(軍師)를 하라며? 내가 이래 봬도 그쪽 방면으로는 천재 소리 좀 들었거든.”

“그러냐?”

“친구들을 죽게 만들지 않을 거야. 절대로.”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다. 싸움에서도, 무공에서도,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도.

그러나 연호정은 괜한 말로 제갈아연의 호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잘 부탁한다.”

“흐흐.”

“음흉하게 웃지 마라.”

“음흉하다니!”

그때, 묵비가 말했다.

“끝났네요.”

청성의 장산이 도칠의 목을 날려 버린 걸 끝으로 싸움이 종료되었다.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지만,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갈아연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휴, 보는 내 심장이 다 쫄깃하네.”

“일일이 놀랄 새 없어. 대충 치료하고 바로 다음 표적으로 이동할 거야.”

“헉! 또, 또?!”

“그래.”

연호정이 재차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 가을이 올 때까지, 최대한 많은 흑도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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