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무섭다 (3)
“우걱우걱.”
“와, 맛있어! 진짜 맛있다고!”
“사형! 나 소금 좀 더 줘요!”
“야! 거기! 멧돼지 다리 살 좀 남겨 놔!”
진풍경이 따로 없었다.
오십여 명이나 되는 걸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막 사냥한 멧돼지와 토끼 고기를 열심히 씹어 대고 있었다.
눈물이 나도록 맛있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고기를 뜯는 자들이 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워…….’
팽만호는 그 광경에 압도되는 자신을 느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인생도 한 번쯤은 제대로 살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닌지 새삼 깨닫게 된다.
방금 사냥한 야생 멧돼지와 토끼를, 누린내가 진동하는 고기를 천하진미라도 되는 양 먹어 치운다. 팽만호라고 못 먹을 건 없었지만, 저렇게 행복해하면서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대체 며칠을 굶었길래.’
저들이 지금껏 한 끼도 굶지 않았다는 걸 안다면 팽만호의 눈빛은 더더욱 괴상해졌을 것이다.
제갈아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나 했어?”
토끼 고기를 우물거리던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뭘?”
“대체 저 사람들을 얼마나 굴렸길래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아귀가 된 거야?”
“필요한 만큼?”
“그게 어느 정돈데?”
“써먹을 수 있을 정도.”
말을 말아야지.
“그래서, 이제 써먹을 수 있게 된 거야?”
“그럭저럭.”
그게 어느 정도인지 제갈아연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다만 연호정이 얼마나 독종이며, 얼마나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 연호정의 마음에 들 정도라면, 그간 정말 말도 못 하게 고생했을 것이다.
“말을 말아야지. 야! 다 먹지 말고 나도 줘 봐.”
“양심 없냐? 석 달 동안 산에서 구르다 온 사람 밥을 뺏…….”
“점심 안 먹었어! 내놔!”
연호정은 입맛을 다시며 토끼 고기 하나를 건네주었다. 눈빛에 아쉬움이 철철 흘러넘쳤다.
전투적으로 고기를 씹던 제갈아연이 팽만호를 보았다.
“곰탱아. 너도 하나 해라?”
“……전 됐습니다.”
“왜? 배 안 고파? 덩치도 산만 한 놈이.”
“워낙 압도돼서 그런지 전혀 안 고프네요.”
“싱겁긴.”
한참 고기를 뜯던 제갈아연이 배를 두들겼다.
“어, 이제야 좀 살겠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연락은 받았다만, 왜 너랑 팽씨 동생이랑 같이 온 거냐?”
“음? 뭐야, 자세한 내용은 못 들었어?”
“서신 한 장만 틱 던져 주고 가더라. 오늘 날짜로 너랑 만호 보내겠다고.”
“그랬구나.”
다 먹었는지 손을 턴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안 되겠다. 이쪽이랑 할 얘기가 많으니까 다 먹으면 푹 쉬어. 오늘 칼부림은 없는 걸로 하자고.”
윤호가 경악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았다.
“설마 또 굴리려고 했습니까?”
“어.”
“…….”
“어쨌든 안 한다고 했잖아. 쉬어라.”
대답 한 번으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연호정이 다시 제갈아연과 팽만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때가 탄 얼굴에 볼살도 좀 빠졌지만, 눈빛은 여전히 맑았다.
아니, 석 달 전보다 더 깊고 또렷해진 것 같았다. 석 달간의 수련은 멸사군만이 아니라 연호정의 무공 역시 더 탄탄하게 다듬어 준 모양이었다.
“왜 너희를 보냈는지 대충 짐작은 가.”
“어련하시겠냐, 그 눈치에.”
“됐고, 일단 맹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좀 읊어 봐.”
연호정과 제갈아연, 팽만호가 꽤 깊은 대화를 나눌 때였다.
“어라? 누님.”
“응?”
그간 함께 피땀을 쏟아 왔기 때문일까.
묵비는 멸사군에서 최고 선임 취급을 받았다. 누님 소리도 처음에는 소름이 돋는다며 몸서리를 쳐 댔지만, 지금은 제법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동호가 의아한 눈으로 묵비를 보았다.
“더 안 드세요?”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예전부터 느꼈는데, 누님은 진짜 소식하시는 거 같아요.”
“너무 많이 먹으면 움직임이 굼떠져.”
멸사군 전체가 움찔했다.
그들은 슬금슬금 묵비의 눈치를 보았다. 그들 역시 묵비가 워낙 순진하고 좋은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교두(敎頭) 역할을 맡았을 때의 그녀는 연호정 이상 가는 악마였다.
묵비는 괜히 무안해져 덧붙였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야. 사람마다 차이는 있으니까.”
“……그, 그렇죠?”
“응. 나는 궁사잖아. 남들보다 더 섬세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그제야 멸사군은 다시 마음 편하게 식사에 집중했다.
윤호가 연신 헛기침을 했다.
“한데 누님.”
“왜?”
“군장님하고 같이 얘기 들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묵비가 연호정을 보았다.
제갈아연의 말을 듣는 연호정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오랜만에 두 귀를 활짝 열고 있는 모양이었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걸 잘 몰라. 들어 봤자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못 할 거야.”
“아…….”
대개 무림인들은 자신의 못남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묵비는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를 평가하는 데 상당히 냉정한 편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장점이었지만, 때로는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연호정에게서 시선을 돌려 주변을 둘러보던 묵비는, 문득 어느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옥청이었다.
“음…….”
옥청이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기름기 가득한 고기를 쥐어뜯던 손으로 머리를 긁다니, 석 달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행태였다.
“저, 묵 부장…….”
“고기 먹어?”
“예?”
묵비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석 달 동안 육식 안 했잖아? 벽곡단인가 뭔가 하는 걸 주식으로 하지 않았어?”
동시에 여기저기서 시뻘건 성토가 일었다.
“누님! 속지 마세요! 저 도사님 몰래 토끼 잡아먹었어요!”
“토끼? 아니, 도사님? 저랑은 노루 잡아다가……?”
“뭐라고요? 저랑은 꿩 잡아먹었는데요?!”
“안 처먹은 고기가 없네, 저 인간. 말만 도사지 그냥 백정 아냐?”
옥청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만날 생사가 오가는 수련을 했잖소. 군장님이 그랬소.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그럼 그냥 대놓고 먹지 왜 자꾸 숨어서 먹냐고요!”
“부끄럽잖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일행들의 야유를 받던 옥청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묵 부장(副將)님.”
“응?”
“그래도 가서 들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나도?”
“예.”
옥청은 그답지 않게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직 명확한 체계가 잡히진 않았지만, 부장님은 멸사군의 이인자입니다. 군장님이 안 계실 때는 부장님이 우리를 이끌어야 하지요.”
“아……?”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닙니다만, 익숙하지 않으시다면 지금이라도 군장님께 배우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묵비는 당황했다.
“그, 그래야 할까?”
옥청이 순하게 웃었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장님께서 작정하시면 누구보다 빨리 배우실 거라 믿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옥청이 윤호에게 동의를 구했다.
윤호가 헛기침을 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한참 얘기를 나누던 연호정이 손을 들었다.
“묵비!”
“네?”
“뭐 해, 거기서? 이리 와. 뭐가 이렇게 허전한가 싶었더니 저게 어디서 땡땡이를.”
“저도요?”
“그럼 너 말고 누가 들어, 인마! 어여 와! 어? 근데 밥은 다 먹었냐?”
“다 먹었어요.”
“또 쥐꼬리만큼 먹었지? 여기 고기 남았다. 와서 좀 더 먹어.”
묵비는 엉거주춤 연호정에게 걸어갔다.
윤호가 피식 웃었다.
“무공은 귀신처럼 매서운 분이 저런 데선 왜 이렇게 순진하신 건지.”
무인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석 달 동안의 지옥 같은 수련에서 묵비와 대련할 때만큼 힘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련이 끝나면 그녀는 꼭 상대의 몸을 점검해 주었다.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참 속이 깊은 사람이다. 묵비의 순한 성품은 멸사군 모두를 사로잡았다.
“근데요.”
“저요?”
송연경과 아미파 창수(槍手)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옥청이 조심스레 물었다.
“예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스님들은 육식해도 됩니까?”
푸스스.
송연경과 창수들 모두가 삿갓을 벗었다. 그러자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늘어져 찰랑거렸다.
“저희는 아미의 속가인데요?”
“……?!”
“설마, 그걸 지금 아셨어요?”
옥청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원체 훈련이 고되다 보니 아미파 쪽 인물들과는 얘기 몇 번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여인 앞에서는 그가 워낙 숙맥이기도 했다.
“지, 지금 알았는데요?”
“세상에.”
배를 만족스레 두들기던 여국이 말했다.
“연경아, 저 양반한테 뭔가를 바라지 마라. 내 저렇게 무신경한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옥청이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렸다.
“벌써 말까지 텄……?!”
“사흘째에 텄소. 연경이 창에 하도 두들겨 맞다 보니 나이로라도 이겨 보려고 말이오.”
“…….”
“왜 그러시오?”
“……아니오.”
“섭섭한가 본데?”
“아니오!”
“알았소.”
여유가 생겼는지 군병들은 삼삼오오 모여 농담 따먹기에 열중했다.
반면 연호정 무리의 분위기는 상당히 심각했다.
“벌써 그렇게 치열해졌단 말이지.”
“맞아.”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아마 지금쯤 모용세가 쪽에서도 알았을 거야. 제갈가와 팽가가 멸사군에 힘을 실어 주었다는 걸.”
“음.”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제갈가주님 말씀대로야. 지금은 그쪽의 힘을 빼는 것보다는 우리 쪽에 힘을 싣는 게 더 낫지.”
“사실, 처음에는 판을 너무 과하게 키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어.”
“무림맹이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야. 윗선에서의 강한 충돌은 어떻게 숨겨도 아래로 전달될 수밖에 없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굳이 이런 때에 작정하고 부딪칠 필요는 없지.”
“그래, 연가주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다고 하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좀 날카로우시거든. 나와는 달리 대의(大義)를 토대로 생각하시는 분이지만.”
“아버지를 칭찬하는 거야, 아니면 널 칭찬하는 거야?”
“둘 다.”
“어쨌든 아닌 척하고 있지만, 분위기가 서서히 날카로워지고 있어. 특히나 탕마군의 수장이 점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모용가주님께서 자신 있게 내보였으니 보통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
연호정은 그 부분을 자세히 묻진 않았다.
그는 모용우를 믿었다. 지금은 그에 관련한 어떤 소식이 들려와도 ‘과정’이라고 봐야 한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가득상에게 따로 전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가.”
제갈아연이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조용했나 싶었더니, 중간에서 양측을 재고 있었던 모양이야. 우리 아버지한테도 연락이 왔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마도 모용세가와 모종의 관계가 있을 거라고 봐.”
연호정의 안광이 서늘해졌다.
‘당관.’
가만히 놔둬도 죽을 것을, 굳이 자신의 가슴에 우모침까지 박아 버린 무림맹 부맹주였던 자.
작전을 짠 건 모용군이었지만, 실행한 것은 당관이었다. 연호정에게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작자들이었다.
“회합에서 나한테 두들겨 맞은 놈, 그놈은?”
“당양선? 그놈은 안 왔어. 대신 장녀를 데리고 왔더라고.”
“장녀?”
“암천신녀(暗天神女). 당양선의 누나야.”
“……?”
“……설마 모르니?”
“콜록.”
“야!”
제갈아연이 허공에 대고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마음 같아선 연호정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제발 유명인 정도는 머리에 담고 살라고! 암천신녀도 모르는 놈이 어디 있어!”
“얘.”
연호정이 묵비를 가리켰다.
“얘도 몰라.”
묵비가 무안한 듯 말했다.
“난 산에서만 살았잖아요.”
“어쨌든 모르잖아.”
제갈아연이 심호흡을 했다. 간단한 인사만 나눈, 친분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사람 앞에서 못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흥분했죠?”
“아, 아니에요.”
“고생이 많으세요. 이 망할 놈이랑 같이 다니면 속 안 뒤집혀요?”
“……가끔은.”
연호정이 딱!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맞부딪쳤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래서 암천신녀가 대단한 사람이냐?”
“삼봉(三鳳)의 하나야. 무공도 무공이지만, 독과 암기 양면에서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 무공의 살상력만큼은 동년배에서 수위를 다툴 거야.”
“무공은 중요하지 않아. 인물됨을 묻고 싶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잘 몰라. 다만, 당가주가 장자보다도 아낀다는 말은 들었지.”
연호정은 인상을 찡그렸다.
‘아낀다…….’
과거, 흑암제 시절에 당관과 몇 번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당관은 당씨 특유의 독랄함과 이기적인 성격을 제대로 버무려 놓은 인간이었다. 나름대로 의리는 있지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인간이 가문의 뒤를 이을 장자보다도 신뢰하는 여식이라?
“혹시 모르니 후개한테 알아봐 달라고 해야겠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앞으로 꽤 고생할 텐데, 죽을 준비는 됐고?”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살벌하게 하더라.”
제갈아연이 자신의 팔뚝을 쳤다.
“내가 융중산 최고 미친년이야.”
“그래 뵌다.”
연호정이 팽만호를 보았다.
팽만호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팔을 접었다. 볼록 튀어나온 알통이 바위처럼 굴강해 보였다.
“하북 미친놈 추가요.”
“알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멸사군에 들어온 걸 진심으로 환영한다.”
제갈아연이 주먹을 뻗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연호정이 마주 주먹을 쥐곤 그녀의 주먹을 툭 쳤다.
“나 역시.”
“그나저나, 이제부터 흑도 청소 시작하는 거야?”
“그래야지.”
“어디부터 가게?”
훅.
순간 공터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던 군병들 모두가 시린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다들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제갈아연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맛보았다.
군병들의 눈빛이, 기도가 늑대처럼 살벌했다. 구대문파의 제자라고는 감히 생각도 못 할 만큼.
그들 모두의 눈빛을 합친 것만큼이나 매서운 눈빛의 소유자가 말했다.
“산악전(山嶽戰), 그리고 시가전(市街戰) 순으로 갈 거야.”
“……?”
“녹림부터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