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무섭다 (1)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제갈문호가 넌지시 건넨 말에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근래 잠이 줄어서 그런 듯하오.”
“아드님 때문에 그러십니까?”
제갈문호가 말하는 아드님은 말할 것도 없이 연호정이었다.
제아무리 벽산호장이니, 강동의 호랑이니 하는 별호를 얻었다 한들 자식은 자식이다. 연위는 강호 무림의 흉험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아들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연위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비로서 자식 걱정이야 당연하오. 다만, 잠이 준 것은 그 때문만은 아니오.”
“달리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걱정스러운 말투.
비슷한 연배임에도 제갈문호의 말투나 어조는 유독 부드럽고 공손한 면이 있었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수련 시간을 늘렸소.”
제갈문호의 눈이 커졌다.
“수련을요?”
“그간 가문의 업무 때문에 내 무공을 돌보는 데에 소홀했소이다. 이참에 밤잠을 줄여서라도 무공을 연마해 볼 생각이오.”
“허어.”
육대세가의 가주, 구파일방의 수장급 정도가 되면 실제 검을 들고 휘두르는 수련은 큰 의미가 없다.
백도 정파의 무공이 으레 그렇다. 경지에 오른 이후에는 육체 단련보다는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고등의 경지를 구축한 고수가 많았다.
하지만 연위의 어감상 단순히 깨달음을 쫓아가는 여정은 아닌 듯했다.
“연가주께서 그리 피곤해하실 정도면 수련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겠습니다.”
연위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 한 자락만 봐도 알겠다. 얼마나 무섭게 단련하고 있는지를.
제갈문호는 내심 고소를 지었다.
‘못 말릴 부자지간이로군.’
연호정은 약관의 나이에 괴물처럼 성장한 희대의 기린아다. 당연히 재능 외에 상상을 초월하는 노력을 쌓아 왔을 것이다.
인제 보니 그게 다 가풍(家風)이 아닌가 싶었다. 무림맹 봉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맹내에서 수련이라니?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한데 어인 일로 이 사람을 부르셨소?”
단도직입적이다.
제갈문호는 상대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굳이 돌려 말할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모용가주가 제법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아들이 제갈문호에게 모용세가와의 악연을 전부 말해 놓았음을 들었다. 아들에게 들었다면, 제갈문호 역시 모용가주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무리라 함은?”
“탕마멸사(蕩魔滅邪)의 유군 부대, 그중 탕마군(蕩魔軍)의 수장이 모용가주의 동생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알고 있소. 모용우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얼굴 위로 약간의 난처함이 드리워졌다.
“이번에 맹회 소속으로 받아들일 무사 중 최고의 인재들을 암암리에 탕마군으로 편입하려는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
“가주께서도 아실 겁니다. 우리가 구파일방, 육대세가라 불리며 정파 무림의 기둥이라 하지만, 드넓은 천하에는 우리 이상 가는 고수들도 많다는 것을요.”
“알고 있소이다.”
“공문이 나가기도 전에 맹의 성문을 두들겼던 고수가 수백이었습니다. 정식으로 공문을 뿌린 후엔 수천의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중 옥석을 가려 뛰어난 자들을 편입한다…….”
“옥중에서도 탁월한 옥만 골라갈 것이 분명합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내 정치에 문외한이지만, 모용가주 혼자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소.”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포착된 것만 둘입니다. 모용가주와 손을 잡은 집단이.”
“어디요?”
“화산파(華山派), 그리고 공동파(崆峒派)입니다.”
섬서의 화산, 감숙의 공동.
중원 최북단 지역 사람들은 억세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일까? 화산과 공동의 검객들은 대개 성정이 단호했다.
“구대문파는 체면 때문에 속세에 발 벗고 나서는 것을 꺼립니다. 모용가주가 그 틈을 파고든 것이 분명합니다.”
“모종의 유착 관계가 있다…….”
연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참으로 그답군.”
모용군이 얼마나 음험한지는 그간 아들과의 일로 충분히 알았다. 이제는 모용세가의 ‘모’ 자만 들어도 신경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예상컨대 최소 하나, 어지간하면 둘은 더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모용군은 구파 네 곳과 손을 잡고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다는 뜻이오?”
“그렇습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무의식적으로 모용군이라고 하는 연위였다. 법도와 품위를 중시하는 그가 얼마나 모용가주를 싫어하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게다가, 연가주께서도 아실는지 모르겠지만 모용우는 세상이 모르는 천재입니다. 무공과 상재 양면에서 최소 모용군과 동급이라는 평입니다.”
“탕마군이라는 무림맹 직속 독립 유군이 모용세가를 위해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모용가주의 거침없는 질주를 이대로 놔둬선 안 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힘이 이기적으로 남용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오?”
제갈문호가 양손 검지를 빼 들어 탁자 위에 놓았다.
“오른손이 탕마군이고, 왼손이 멸사군입니다. 그리고 지금 모용가주는 탕마군에 힘을 쏟고 있지요.”
그가 오른손의 나머지 손가락을 폈다.
탕마군 오(五), 멸사군 일(一).
“모용세가를 위시한 셋, 혹은 네 개로 추측되는 구파가 붙을 겁니다. 탕마군은 그 힘을 받고 위세를 불릴 겁니다.”
“그 힘을 줄이자?”
“아닙니다. 지금 와서 그들의 힘을 줄일 방법은 많지도 않거니와, 성공 보장도 없습니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소?”
제갈문호가 왼손의 검지를 접고,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폈다.
멸사군 삼(三).
“지금은 상대의 힘을 줄이는 것보다, 멸사군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이 더 낫습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마치 두 유군 부대를 이용해 대리전(代理戰)을 치르는 듯하군.”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고백하겠소. 나는 굳이 이렇게 판을 키워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소.”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무엇이오?”
“싸움에서 선(先)을 잡는 것과 똑같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과 지혜로 충만했던 제갈문호의 두 눈에 한풍이 몰아쳤다.
“연가주께서도 그렇듯, 저 역시 이 이상의 권력은 필요치 않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상대는 다르지요. 이번 싸움에서 선수(先手)를 제압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맹의 권력이 확실하게 한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고 한쪽으로 쏠린 권력은, 필연코 내년에 있을 대사(大事)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겁니다.”
연위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무림맹주(武林盟主) 선발.”
“그렇습니다.”
제갈문호가 손을 풀었다.
“이번 해는 봉공들이 공동으로 운용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내년에는 다릅니다. 필시 이번 해가 지나기 전, 누군가가 맹주 선발에 관한 얘기를 꺼낼 겁니다.”
“……!”
“수십 년 만에 창설된 무림맹입니다. 우리 세대의 첫 무림맹주인 만큼, 일 처리가 공정하고 매사에 협의가 넘치는 이를 세워야 마땅합니다.”
“맞는 말씀이오.”
“그 자리를 권력욕이 충만한 자가 차지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연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갈문호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다렸다. 상대는 강동제일무가의 수장이다. 지모(智謀)로는 제일이라는 제갈세가의 가주조차 못 본 것을 짚을 수도 있었다.
일각 후, 연위가 입을 열었다.
“대리전을 벌여서라도 상대 진영의 기세를 꺾어야 한다는 제갈가주의 말은 이해했소. 멸사군에 힘을 실어 줘야 한다는 것도.”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멸사군에 힘을 실어 줄 생각이오?”
“모용가주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을 제외한 봉공들에게 일러 탕마군으로 향하는 옥(玉)의 삼 할 이상은 빼 와야 합니다.”
“멸사군으로 말이오?”
“그렇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맙시다.”
“따로 복안이 있으신지요?”
“복안이라고 할 것도 없고, 선호하는 방식도 아니지만…… 그렇소.”
“말씀해 주십시오.”
“모용가주가 옥석을 가리고 있다는 뜻은 아직 탕마군이 창설되지 않았다는 뜻. 현재 멸사군의 장점은 탕마군보다 훨씬 빠르게 출맹했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가문의 적통(嫡統)들을 차출합시다.”
“……!”
“제갈가주의 장녀가 부족한 내 아들과 친분이 있다고 들었소. 그리고 팽가주의 아들들도.”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가주 말씀은, 세력을 대변할 만한 존재를 보내 힘을 실어 주자는 뜻입니까?”
“그렇소.”
무림맹으로 모이는 무사 중에 고르는 게 아니라 아예 세가에서 차출해 버리자.
이게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말인지 제갈문호는 잘 알고 있었다.
“연가주, 그것은…….”
“무림맹이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소. 이런 시국에 맹회의 수뇌부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꼴을 보이면 무림맹의 권위가 땅에 떨어질 것이오.”
“그래도 위험합니다.”
“위험하지만, 상대의 기를 꺾을 최고의 한 수이기도 하오.”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당장은 저들을 주춤하게 할 수 있을지언정, 훗날 반드시 문제가 될 겁니다.”
“뒷일은 그때 생각합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소.”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연위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팔불출처럼 보일는지 모르겠지만, 정국(政局)을 읽는 내 아들의 눈이 제법 신통한 편이외다. 제갈가주가 생각하는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오.”
두 개의 유군 부대.
그중 하나는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는 이들로 채워질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파와 육가의 젊은 고수들로 채워졌다.
가진 자들을 아니꼽게 보는 세상이다. 당연히 멸사군을 향한 시선도 곱지만은 않을 것이며, 모용군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연위는 말한다. 내 아들을 믿으라고.
물끄러미 연위를 보던 제갈가주가 미소를 지었다.
“연가주의 장남이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민망할 따름이오.”
“좋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화끈하게 가 보도록 하지요.”
차라리 이렇게 결심하니 마음이 편했다.
물론 불안함도 남아 있었다. 그 불안함은 이 치열한 권력 다툼 때문이 아닌, 자신의 딸 때문이었다.
‘버틸 수 있겠느냐.’
제갈아연.
자신의 딸이지만, 아비로서 뭐 하나 해 준 것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지는 가세 때문에 딸의 인생을 희생시킬 뻔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또 한 번 이런 일을 맡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혹시라도 어디서 해를 입진 않을지, 크게 다치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제갈문호는 웃으며 연위를 보았다.
연위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소 딱딱했지만 가주로서, 한 개인으로서 믿음을 주는 이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연호정은, 제 아비와 완전히 다르면서도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번만큼은 너도 네 인생을 걸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한참 미소 짓던 제갈문호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말이 나온 김에,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이오?”
“이 심란하기 짝이 없는 정국(政局)에,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하나의 세력이 저에게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세력이라니? 그게 어디요?”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사천당가(四川唐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