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멸사군(滅邪軍) (4)
‘누구지.’
쩌어엉!
“쿨럭!”
척강은 기어이 피를 토하며 물러나고야 말았다.
강력한 일도(一刀)로 척강을 날려 버린 아광의 눈은 시종일관 연호정을 향해 있었다.
‘다른 놈은 다 어설퍼. 사람 한번 베어 보지 못한 놈들이 수두룩해. 하지만 저놈은…….’
여유로운 장법(掌法)으로 일격에 수하들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손속.
공격을 시작하고 타격을 끝맺는 일련의 동작에 어떤 머뭇거림도 없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살초에 수하 셋이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실전에 능해. 무수히 많은 살인을 저질러 본 놈이다.’
음사방도는 하나같이 지옥 같은 실전을 겪고 생존한 독종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연호정을 공략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어설프게 연호정을 공격하기보다 떨거지들부터 죽이고 난 연후에 몰아치는 게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에 덤비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아광 역시 연호정의 위험을 깨달았다.
‘자신의 실력을 실전에서 십 할 이상 써먹을 수 있는 진짜배기.’
그때, 아광의 시선이 연호정이 옆에 세운 거대한 도끼에 닿았다.
‘……?!’
연호정이 내뿜는 기이한 위화감이 너무나도 컸던 것일까?
도끼는 언뜻 장중해 보이면서도 화려했다. 그리고 컸다. 어지간한 무림인도 들고 휘두르기 버거워 보일 정도였다.
‘대형전부(大形戰斧)……? 설마!’
순간 그는 근래 들어 화려한 명성을 쌓아 올리고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후기지수의 연배에 당당히 전(前) 천하제일가를 상대로 일전을 벌였던 배짱 넘치는 고수, 일신의 무공이 일룡삼봉 혹은 그 이상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청년 고수를.
아광이 버럭 소리쳤다.
“멈춰라!”
치리리리링!
치열한 격검(擊劍) 끝에 음사방도들이 일제히 후방으로 물러났다.
그렇게 살기 넘치게 몰아붙였음에도 물러날 땐 바람처럼 빨랐다. 상관의 명령에 즉각 반응하도록 훈련된 이들이었다.
잘 훈련된 군대를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여국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달라. 우리와는 완전히…….’
아광이 입을 열었다.
“벽산호장?”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차라리 멀찍이 떨어져 있을 걸 그랬군.”
도끼는 다 좋은데, 지나치게 특징적이었다.
아광의 눈에 은근한 경계심이 들었다.
“연가의 장남이 여기에는 어떻게?”
“구파의 후기지수들이 바글거리는데 연가의 장남이 오지 못할 이유는 또 뭐냐?”
아광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벽산호장에 관한 소문은 중원 전역에 파다했다. 하지만 아광은 그 소문이 전부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흑도 최고의 가치는 생존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목숨을 거는 거야 흑백(黑白)을 따지지 않지만, 진짜 목숨이 위험하면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했다.
태생부터 흑도였던 아광은 거대 단체를 상대로 홀로 목숨을 거는 이들의 존재를 믿을 수도 없었고, 쉽사리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결국 벽산호장에 대한 소문의 진실은 둘 중 하나다.
‘명가를 상대로도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을 정도의 무공을 쌓았거나, 소문이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당연히 후자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의 나이는 이제 약관에 불과하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이 없었다.
‘다만…… 확실히 보통은 아니야.’
피바다를 헤쳐 온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혈향이 느껴졌다.
아광이 연호정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여길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김새는구만. 슬슬 봉쇄하자.”
연호정의 싸늘한 한마디에 아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그때였다.
‘……?!’
후우우웅.
저 멀리 절벽 위에서 일순 무시무시한 내공의 흐름이 감지되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렬한지, 아광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돌려 볼 정도였다.
휘이이이이잉!
강풍이 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내공의 전사(轉絲)가 대기의 흐름마저 바꾸는 듯했다.
그 강력한 힘에 아광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팅!
칠현금의 줄을 당기는 듯한 맑은 소리가 울리고.
부아아아앙!
소름 끼치는 돌풍이 한 점으로 모여 좌측 절벽 끝, 바위가 한 무더기 뭉쳐 있는 곳으로 쏘아졌다.
콰아앙!
폭음과 함께 절벽이 무너지며, 수많은 바위가 갈 길을 잃고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쾅! 쿠웅!
자욱한 먼지와 함께 계곡의 길목이 막혔다.
심지어 그 일격은 한 번이 아니었다.
터어엉!
화려한 몸놀림으로 날아오른 한 여인이 붉은 활을 들고 우측 절벽을 겨누었다. 그녀가 당기고 있는 홍련의 시위에는 단단한 철전(鐵箭)과 함께 푸른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
티이이이잉! 콰아앙!
이번 일격은 결정적이었다.
지반이 약한 곳에 용아포(龍牙砲)를 퍼부어 절벽 위에 쌓인 바위를 그대로 계곡 입구로 쏟아내 버린다.
평생을 산에서 수련해 온 묵비에게 충분한 힘만 있다면 이 정도 일은 어렵지 않았다.
터엉! 터어어엉!
무시무시한 궁술로 계곡 입구를 봉쇄해 버린 묵비가 바람과도 같은 신법을 펼쳤다.
파바바박!
신들린 몸놀림이었다.
절벽의 끝을 타고 내려오다가 좌우로 몸을 날려 다가오더니, 이내 비천(飛天)의 선녀라도 되듯 엄청난 거리를 날아와 연호정의 뒤로 내려섰다.
타악!
연호정 뒤에 선 묵비가 시위를 당기며 음사방도들을 겨누었다.
한번 사냥감을 포착하면 무섭게 집중한다. 음사방도들을 노려보는 묵비의 안광은 포식자의 그것처럼 섬뜩했다. 평소 그녀의 눈빛과는 판이했다.
‘……!!’
아광은 목이 칼칼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아무리 지반이 약해도 화살 두 방으로 저 많은 바위를 떨어트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식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무공이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아광조차 저런 무식한 궁술이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쿵!
아광의 시선이 연호정에게 향했다.
어느새 도끼를 뽑아 올린 그가 견봉에 걸쳤다. 저 무거운 도끼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 올린 것이다.
“훈련 대상으로 적당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연호정이 척강에게 말했다.
“척강.”
“네?”
묵비의 압도적인 궁술에 매혹당한 듯 멍하니 풀린 표정을 했던 척강이 깜짝 놀라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실력은 부족했지만, 적의 수장을 없애 사기를 떨어트린다는 발상과 서슴없이 돌진하는 용기가 좋았어. 조금만 더 신중하면 충분히 네 몫을 하겠다.”
“예, 예!”
척강은 괜스레 머쓱해지는 걸 느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기실, 연호정이 말한 것처럼 거창한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다만 목숨을 걸고 검을 뽑아 든 것은 맞다. 척강은 자신이 뱉은 말을 행동으로 보여 준 것이다.
연호정이 후기지수들을 보았다.
대다수가 전신에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연호정 덕분이기도 했다. 정신을 못 차리는 후기지수 중 다섯이 죽을 뻔했을 때, 남몰래 지풍(指風)을 날려 위기를 모면케 한 사람이 그였다.
‘더 해봤자 의미는 없겠어.’
그가 이번에는 묵비를 돌아보았다.
후우. 후우.
집중력이 무섭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만, 연속으로 용아포 두 발을 쏘아 내서 그런지 호흡이 살짝 불안했다.
연호정이 묵비의 어깨를 잡았다.
“할 수 있겠어?”
“언제든지요.”
“좋아, 그럼 슬슬 정리해 보자고.”
음사방도들을 향해 겨누었던 화살에 투기가 실렸다.
매서운 눈빛으로 그들을 주시하던 묵비가 일순 상체를 틀었다.
티이이잉! 피유우웅!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화살이 노리는 것은 아광의 머리였다.
퍼어억!
미리 대응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튼 아광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화살이 그대로 상요의 어깨에 박혔다.
퍼어억!
“크아악!”
비명과 함께 상요가 쓰러졌다.
바로 그때, 연호정이 달렸다.
번쩍!
무서운 속도로 달려 나간 연호정이 아광을 향해 광룡부를 올려 쳤다.
아광의 눈이 커졌다.
‘이!’
기습이다. 묵비의 화살에 집중하고 있던 아광은 연호정의 엄청난 돌진에 당황하여 박도를 휘둘렀다.
쩌어어엉!
“컥!”
괴력의 무공이었다.
팔십 근이 넘는 중병을 받아치니 칼을 쥔 손과 팔 전체가 부러질 것 같았다. 섬뜩할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놀랍게도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웅! 부우웅!
소름 끼치는 파공음과 함께 잔영(殘影)을 일으키는 흑색의 도끼가 아광의 눈을 어지럽혔다.
쩌저저정! 퍼억!
“아아악!”
박도가 부러지고 오른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 날아갔다. 공격을 해 보기는커녕 제대로 받아치지도 못한 채 내상을 입고 팔까지 잃은 것이다.
아광이 피를 토하며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다 죽여!”
터어어엉!
음사방도들이 무서운 속도로 돌진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어딜.’
묵비의 홍련궁이 불을 뿜었다.
피피피피핑! 퍼버버버벅!
후기지수들에게 덤벼드는 음사방도 일곱의 머리통에 구멍이 뚫렸다.
엄청난 속도의 연환 사격이었다. 연호정과의 초근거리 박투전으로 얻은 감각과 체력이 서서히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집중력으로 활활 타오르던 묵비의 눈이 일순 희미하게 떨렸다.
‘살인.’
몽의를 납치할 적, 살수들을 전멸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까웠다. 살인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인형을 부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지금은 아니었다. 적들의 눈빛에 드리워진 두려움이란 감정이 묵비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묵비는 곧장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궁사(弓師). 마음이 흔들리면 안 돼.’
백궁천을 떠올렸다.
마지막 가는 길, 동생의 성취를 보자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 오라버니의 얼굴.
퍼버버벅!
음사방도 십여 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부우우우웅!
묵비의 신들린 궁술 뒤로 광룡의 무한 질주가 시작되었다.
퍼어어어억!
연호정의 공격은 묵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잔혹했다.
순식간에 진형의 맥점을 짚고 돌진, 이후 폭풍과도 같은 맹타를 휘두른다.
쩌저저저정! 푸화아악!
음사방도들의 육신이 무차별로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피를 뿌렸다.
비록 최하위라고는 하나, 아광은 흑도삼십육문의 일익을 담당하는 방파의 주인이었다. 초전부터 밀렸지만 연호정의 파괴적인 공세를 몇 합이라도 막을 실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음사방도들은 아니었다.
연호정의 도끼는 단호했고, 그 단호함만큼이나 자비 없는 위력을 발했다. 적어도 음사방도 정도의 무공으로는 누구도 그의 일격을 막을 수 없었다.
아광이 재차 외쳤다.
“구파 떨거지들을 노려!”
음사방도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두 남녀의 공격에 당황하던 그들은, 곧장 한마음 한뜻으로 후기지수들에게 덤벼들었다.
휘이이이잉!
광룡부에 실리는 백색의 바람.
콰앙!
강력한 진각으로 나아가는 연호정이 음사방도들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폭풍 같은 무공이 몰아치고 나면, 묵비의 삭풍 같은 궁술이 적도들을 휩쓸었다.
퍼버버벅! 푸화악!
음사방도들의 숫자가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었다.
후기지수들은 멍하니 두 남녀를 보았다.
특히나 여국의 충격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나름대로 실전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적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는데, 저 두 남녀는 인정사정없는 손속으로 기가 막힌 맹위를 떨치고 있지 않은가.
“이, 이럴 수가!”
무자비한 도끼질로 적도들을 격파하는 연호정, 귀신 같은 궁술로 잔당을 처리하는 묵비.
그야말로 손발이 척척 맞는 조합이었다. 두 남녀의 파상공세는 그 순간 완성되어 있었다.
“바, 방주님!”
어깨를 감싸 쥔 상요의 외침에 아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모두 퇴각……!”
말을 채 끝맺지 못한 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고 보니 저 나찰 같은 여인이 매서운 궁술로 계곡의 입구를 막아 버렸지 않은가. 그곳으로 도주한다는 건 막다른 길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죽일!’
아광의 두 눈에 진한 살기가 일었다.
한 번의 실수가 음사방의 멸문을 가져오게 생겼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평산(平山)!!”
음사방 후미에 말을 타고 있던 거구의 사내.
그 사내의 두 눈에 붉은 흉광(凶光)이 이글거렸다.
카아아아앙!
쇠사슬이 산산이 조각나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