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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41화 (141/963)

141화. 멸사군(滅邪軍) (1)

“출맹 허가서요.”

연호정이 내민 작은 문서를 본 경비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가합니다.”

쿠구구궁.

북쪽의 대문, 현무대문이 열렸다.

청룡대문도 그랬지만 다시 봐도 웅장하기 짝이 없다. 까마득히 높고 거대한 철제 대문이 움직이는 광경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선두에 선 연호정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던 후기지수들도 하나둘 그의 뒤를 따랐다.

“후, 공기 좋군.”

같은 대별산이지만, 그래도 무림맹을 나오니 기분이 새롭다. 그 안에서 지낸 시간이 한 달이 채 안 되는데도 맹을 나오니 한결 상쾌한 느낌이었다.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두근두근하지?”

“네? 아, 네.”

“뭐야? 얼굴이 왜 그렇게 굳었어?”

“내가 뭘요?”

“완전히 얼어 버렸는데? 새삼스럽게 겁이라도 먹은 거야?”

“설마요.”

묵비는 이제 자신이 이룬 무(武)의 수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하다. 얼마나 강하냐면, 환경의 이점이 따라 준다고 가정했을 시 연호정조차 잡아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그 말인즉, 백도 무림의 대방파인 구파일방, 육대세가의 장로급 인사와 붙어도 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에 그 정도 무력이라면, 가히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릴 만하다.

즉, 그녀가 긴장한 것은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색하냐?”

“…….”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라 영 껄끄러운 거야?”

“껄끄러운 건 아니고요.”

묵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솔직하게 답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세상에 대해 알아 가고 있는 그녀였다. 충분히 보았고 배움도 빨랐지만, 모르는 타인과의 관계를 처음부터 쌓아 가는 건 아직도 힘들었다.

연호정은 그런 그녀를 이해했다.

“너무 걱정하진 마라. 억지로 가까워질 필요는 없으니까.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아 둬.”

“네?”

“네가 나와 함께하는 한, 언젠가 너만의 조직을 꾸려야 할 때가 올 거야.”

“……!”

“앞으로 너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든, 사람을 이끄는 능력은 익혀 두는 게 좋아.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거라면 말이지.”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연호정의 말을 이해했다.

“자, 이제 맹도 나왔겠다, 상쾌하게 나아가 볼까.”

그때였다.

“저, 연 공자.”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입을 연 것은 윤호였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해 봐.”

“일단 함께 출맹을 하기는 했는데, 우리 모두 통과한 것입니까?”

“통과라니? 무슨 말이야?”

“아니, 연 공자를 수장으로 하는 독립유군에 들어온 게 맞냐는 겁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발바닥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면서 제안한 사람이 나야. 왔으면 당연히 함께하는 거지.”

“아…….”

“왜? 뭐가 문제야?”

“아, 아닙니다. 다만 저는…….”

윤호가 우물쭈물하자, 대담하게도 동호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동호가 고개를 숙였다.

“인사드립니다. 화산파 일대제자 동호라고 합니다. 백소진인(白昭眞人)께 사사했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 봐.”

“분명하게 말씀드리건대, 저와 윤 사형은 연 공자께서 대장으로 있는 유군에 들어가고 싶어서 온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는 그저 호기심이 동해서 찾아온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래?”

“예.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전에 아무런 얘기도 없이 바로 출맹하는 것은 조금…….”

“너희를 배려하지 않았다, 이 말이군.”

동호가 입맛을 다셨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궁금하긴 해서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자세한 건 목적지에 도착한 뒤 얘기하도록 하지. 그때까지는 참아 주길 바란다.”

“아…… 예.”

“응?”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 거기!”

옥청은 화들짝 놀랐다.

“저, 저 말입니까?”

“그래, 인마. 너.”

“예, 옙!”

그야말로 군기가 잔뜩 든 모습이었다. 양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꼿꼿하게 선 옥청의 모습은 뭣 모르는 신병을 연상케 했다.

“너는 왜 왔어? 따로 제안한 적도 없는데.”

“아, 그게…….”

“너 이놈 새끼, 뒤에서 몰래 내 등 찌르려고?!”

“허억!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럼 왜 왔냐고, 인마!”

“여, 연 대협과 함께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연호정이 인상을 한껏 찡그렸다.

“대협이란 호칭은 집어치워. 아니 그리고, 나랑 같이 다녀서 뭐 하게?”

옥청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연 대협 덕분에 저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대협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확.”

“……넵.”

“전에 말했잖아? 더 이상 나와의 비무는 필요 없다고. 문까지 데려다줬으면 열고 들어가는 건 네 몫이라고 했을 텐데?”

“물론 그렇습니다. 다만, 저는 아직 배울 게 많습니다. 제 무공만이 아니라 세상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세상을 배운다?”

“그렇습니다. 연 대협, 아니 연 공자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느꼈습니다. 저는 평생 심산(深山)에서 검선지도(劍仙之道)를 추구했지만, 그로 인해 지나치게 틀에 박힌 무공을 익혔습니다.”

“변명하지 마라. 심산 수련이든 뭐든, 틀에 박힌 무공을 익힌 건 그냥 네가 게으르고 멍청해서야.”

“……예, 그렇지요. 어쨌든, 연 공자와의 비무에서 느낀 바가 컸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세상에 나가야 할 때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네 무공이 발전한다는 보장이라도 있다던?”

“…….”

옥청은 우물쭈물 아무 말도 못 했다.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던 연호정은 이내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해서 움직이는 네 모습은 분명 나쁘지 않다.”

“그, 그렇습니까?”

“괜히 내 휘하에 들어왔다고 후회나 하지 마라.”

“절대 후회하지 않습니다.”

옥청의 두 눈은 진지했다. 그 역시 묵비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지만, 그의 한마디에는 나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널 받아들이겠다.”

“감사합니다!”

“제기랄, 검선 어르신 눈치 보여서 일부러 배제했더니. 나중에 제자 망쳐 놨다고 어르신한테 쥐어 터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구만.”

연호정이 투덜거리며 다시 발길을 옮겼다. 옥청은 상기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십여 걸음을 나아가던 연호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뭐 해? 안 오고.”

“…….”

“안 오면 다 두고 간다?”

그제야 후기지수들이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얼굴은 충격과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뭐야? 저 사람 옥청 맞아?”

“마, 맞는 것 같은데?”

“세상에, 옥청 도사가 연 공자한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 거야, 지금?”

“설마……. 옥청 도사는 검선 어르신의 유일제자인데 뭐 하러……?”

“이거 심상치 않다. 이거 심상치 않아.”

후기지수들이 놀라서 쑥덕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그들이 아는 옥청은, 비록 일룡삼봉에 들진 않았지만 존재감만으로도 이미 그들을 넘어서는 인물이었다.

실제 실력을 떠나 누구라도 대우해 줄 만한 사람인 것이다. 천하의 검선이 무신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했으니 오죽할까.

한데 제아무리 근래 큰 명성을 휘날리는 벽산호장이라도 옥청을 가르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때, 삿갓을 눌러쓴 여인이 말했다.

“사실이라면 좋겠네요.”

모두의 시선이 여인에게 향했다.

승복을 입은 여인들의 수장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열다섯이나 되었고, 모두가 손에 칠 척에 이르는 장창(長槍)을 들고 있었다.

바로 아미파(蛾眉派)의 제자들이었다.

“정파 무림 최고수 중 한 분이라는 검선 어르신, 그리고 그분께서 무신의 재능이라 인정한 유일제자 옥청 도사.”

“…….”

“그런 옥청 도사에게 가르침을 내려 줄 정도라면, 구대문파의 제자들을 다룰 만한 역량이 된다고 봐야겠죠.”

후기지수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렇다. 각자의 사정은 다르지만, 그들 대부분이 각파에서 최고가 되지 못한 이들이었다.

최고는 아닐지언정 구대문파 출신이라는 자존심이 있다. 그런 그들의 수장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 능력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실력이라는 건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지.”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한 검사에게 향했다.

청백의 도포(道袍)를 휘날리는 다섯 도사의 수장. 곤륜파(崑崙派)의 도사 여국(呂局)이었다.

“옥청 도사…… 분명 뛰어나지만, 기도가 칼처럼 매섭지는 않아. 검선 어르신의 제자이니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만, 소문처럼 대단해 보이지는 않소.”

아미파의 제자, 송연경(松蓮鏡)이 말했다.

“옥청 도사의 무공이 실제로 대단하지 않더라도 검선 어르신께 사사했어요. 그런 사람을 가르칠 실력이라면, 연 공자의 무공은 무척 뛰어나다는 뜻이겠죠.”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오.”

여국의 눈이 연호정의 등을 쫓았다.

“연 공자의 강함은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소. 부끄러운 말이지만, 본파 내에서도 저렇게 정제된 보행을 선보이는 자를 본 적이 없소이다. 물론 어른들을 제외하고 말이오.”

“…….”

“다만 이룬 경지와 싸움 실력은 다르다는 것이오. 또한, 단체를 이끄는 능력 역시 별개지.”

송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이에요.”

“연 공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유군이 몸을 담을 만한 가치가 있었으면 좋겠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거의 반나절이 넘도록 신법을 펼쳐 도달한 곳은 어느 계곡이었다.

계곡은 상당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계곡을 끼고 있는 조촐한 가옥은 그림과도 같은 경치를 자랑했다.

“여기구먼.”

연호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유시(酉時)라…… 넉넉하게 도착했군.”

우우웅.

벽라진기가 은은하게 풀려나오며 감각을 활성화했다.

‘아직 안 왔군. 하지만 후개의 정보대로라면 곧 오겠지.’

연호정이 묵비에게 말했다.

“묵비.”

“네.”

“저 언덕 위로 올라가 은신해라.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알려 줘.”

묵비는 의아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절대 활은 들지 마.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격은 금물이다. 알겠어?”

이렇게까지 힘을 주어 얘기하는 걸 보면 분명 심각한 일이리라.

고개를 끄덕인 묵비가 신법을 펼쳤다.

후욱!

“헉!”

“빠, 빠르다!”

한 번 땅을 박찬다 싶더니, 어느새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언덕 위에 올라섰다.

무시무시한 신법 조예였다. 신법으로는 구대문파에서도 수위에 든다는 곤륜파의 공부를 배운 여국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이럴 수가! 저렇게 빠른 신법이라니? 게다가 발끝에서 나오는 여유는……?’

저 궁수는 전력으로 신법을 펼친 게 아니었다. 그 정도 눈은 있었다.

그러고도 저 속도와 안정감이라니.

여국만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홀린 듯 묵비가 올라간 곳을 쳐다보았다. 적어도 이곳에 있는 누구도 묵비의 신법을 흉내조차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빠르지?”

후기지수들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쿵!

광룡부가 땅에 박히는 소리에 몇몇 후기지수들이 움찔했다.

“이제 우리도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어느새 연호정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자, 오합지졸인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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