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39화 (139/963)

139화. 오합지졸 (3)

이튿날 정오.

“으, 추워라.”

윤호가 손으로 어깨를 삭삭 비볐다.

“거참, 사람을 불렀으면 시간 맞춰서 나올 것이지 왜 이렇게 늦어?”

동호(冬豪)가 핀잔을 주었다.

“우리 도착한 지 반 각도 안 됐어요, 사형.”

“어쨌든! 불렀으면 때 맞춰 나와야 할 거 아냐!”

“킁, 그 사람 앞에 있으면 얼어붙어서 입 한번 제대로 못 열면서.”

“이놈 자식이?”

“그냥 그렇다고요.”

“그나저나 너는 왜 왔냐? 맹에서 놀다가 본산으로 귀환할 것이지.”

“다 사형 때문이잖아요.”

“내가 뭘?!”

“사형이 무슨 사고 칠지 어떻게 알아요? 다 사형 감시하러 온 겁니다.”

윤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가 날 감시해서 뭘 어쩌겠다고? 지도 콧바람 좀 쐬고 싶어서 온 거면서.”

“겸사겸사요.”

“낄낄낄.”

“그나저나…….”

동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많네요.”

파군각 후원에는 거의 오십 명에 가까운 후기지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구대문파에서 나온 산인(山人)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최소 두 번 이상 연호정에게 덤볐다가 깨진 비무의 패배자들이었다.

아직 문파의 중역을 맡지 않은 젊은 고수들. 각 문파가 배출한 최고의 후기지수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일류 소리를 듣기에는 충분한 내가고수들이었다.

동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묘하긴 하네요.”

“뭐가?”

“이들 대부분이 우리 화산(華山)과 청성(靑城), 아미(蛾眉), 점창(點蒼), 곤륜(崑崙) 소속이에요. 남은 사람들은…… 음, 잘 모르겠네요. 낭인의 행색이긴 한데.”

“그런데?”

“신기하지 않아요? 육대세가에선 한 명도 안 왔다는 게?”

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신기한데?”

“왜요?”

“그 양반은 연가의 장남이야. 육대세가의 일익이라고. 그런 양반이 대장으로 있는 유군 부대에 같은 육가 소속원들이 들어가기엔 체면 상하는 일이잖아?”

“아…….”

“뭐, 실제로 친분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문의 어른들이 막았을걸?”

동호는 감탄 어린 눈으로 윤호를 바라보았다.

“사형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이놈아. 그래도 내가 명문가 출신 아니냐.”

“사형이 육가 출신이었어요?”

“……거기에 비빌 정도는 아니고, 그냥 작은 지역에서 고개에 힘 좀 주는 정도?”

“역시 미리 세상을 배운 사람답네요. 저는 어릴 때부터 산에서 지내서 그런지 속세의 다툼이 잘 이해가 안 가요.”

윤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굳이 이해하려 들지 마라. 깊게 알면 알수록 더럽고 추잡해지니까.”

“흐으음.”

동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근데요, 사형.”

“또 왜?”

“일부러 지금까지 안 물어봤는데…….”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대체 연호정 그 사람이 이끄는 유군 부대엔 왜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윤호가 입맛을 다셨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

“아직 대장도 안 왔는데, 얘기나 해 주세요.”

“크흠.”

헛기침으로 목을 푼 윤호가 검지를 들었다.

“첫째, 화산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어.”

“무시무시하게 하찮은 이유네요.”

“확.”

“두 번째는요?”

윤호가 중지까지 들었다.

“둘째, 강호를 경험하고 싶다.”

“어라? 사형 몇 번이고 하산했었잖아요? 예전에 산적 토벌전에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이놈아, 고작 하산 몇 번 한 걸로 강호를 온전히 겪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다.”

“헤에, 만약에 대장이 한 지역만 뺑뺑이 돌면 어쩌려고요?”

“……거기까지 생각해 보진 않았지만, 그때는 뭐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또 이유가 있나요?”

“세 번째.”

윤호가 주먹을 쥐었다.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잖아.”

“예?”

“나나 너나, 본산에서 맡은 직책이 없어. 말하자면 예비 병력에 가까운데, 쓸데없이 시간 맞춰 생활해야 하잖아. 가끔 산문 경비도 서야 하고.”

“뭐, 나름대로 영광스러운 일이죠.”

“영광스러운 일이지. 다만, 난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고 싶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크게 성장해서 돌아가고 싶다.”

윤호가 입맛을 다셨다.

“뭐, 새로운 무공을 익히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참오할 시간이 많아질 거 아냐? 나는 이번 유군 경험이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동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존경스럽네요, 사형.”

“뭔 존경이냐? 결국 내 멋대로 하고 싶어서 들어온 건데.”

“그래도요. 저는 사형처럼 거창한 목표는 없거든요.”

“나뿐만이 아닐 거다.”

“예?”

윤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가롭게 서서 구름을 올려다보는 사람, 작은 바위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사람, 가부좌를 틀고 앉아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다양하기 짝이 없는 군상이었다.

“저 친구들도 다 비슷한 생각으로 온 걸 거야. 처지도 비슷비슷할 거고.”

윤호가 보는 그들의 무공은 충분히 강했다. 강호에서 능히 일류로 통할 수준이었으며, 개중에는 자신처럼 이제 막 절정의 영역에 진입한 사람도 있었다.

소위 명문 정파의 기준이 너무 높아서 그럴 뿐, 저들 역시 충분히 대단한 실력자들이었다. 평생 무공을 익혀도 저들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무림인이 태반이지 않은가.

다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그 이상을 바랄 것이다. 비록 사문을 대표할 만한 후기지수는 아니지만, 자부심 하나만큼은 누구 못지않을 것이다.

동호가 한숨을 쉬었다.

윤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한숨이야?”

“그냥 답답해서요.”

“답답할 것도 많다, 어린놈이.”

“사형이랑 저,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요.”

“……쩝.”

동호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우리도 그렇고 저들도 그렇고, 다들 사문에서 기대를 받았던 사람들일 거라고요.”

“그렇지.”

“결국은 대부분 어중간해서 모인 거네요.”

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 동호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면 스스로가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았다.

“세상이 다 그런 거지…….”

결국, 노인네의 푸념 비슷한 말만 내뱉고야 말았다.

“푸르륵, 그나저나 사형 말대로 슬슬 추워지네요.”

“그러니까 말이다.”

“아, 우리 대장님 될 양반은 언제 오실까.”

그때였다.

“헉!”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서, 설마 저 사람은?”

“소선검(小仙劍) 옥청!”

“쉿! 야, 우리보다 배분이 높아! 입조심하라고!”

그들은 뜨거운 눈으로 옥청을 바라보았다.

옥청은 성천십삼좌에 이름을 올린 검선 탁무자의 유일제자다.

검선의 이름이야 어디서든 통하지만, 특히나 도불(道佛)의 무공을 익히는 구대문파에서는 권신(拳神) 무허대사(無虛大師)와 함께 쌍벽을 달렸다.

백도 무림이 찬양해 마지않는 존재. 옥청은 바로 그 검선의 유일무이한 제자요, 무신(武神)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소문이 자자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근데 저 사람, 아니 저분은 왜……?”

“설마 유군에 들어오려고?”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 검선 어르신께 배우느라 바쁠 텐데.”

“그것도 그렇네.”

“……음, 설마 연호정한테 악감정이라도 있나?”

“헐, 그런가 보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린다.

옥청은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모르는 사람과 엮이는 게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어쨌든 옥청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제법 달아올랐다. 그들로서는 말 한번 걸기 쉽지 않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검선의 제자까지 올 정도면 유군으로 활동해도 어느 정도 면이 설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윤호는 대뜸 옥청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아, 안녕하시오.”

윤호가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언제 말이오?”

“음…… 그, 연 공자와 비무한 후에…….”

“아!”

옥청이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지 마시오. 당연한 도리였소.”

“하하, 그래도 감사한 건 감사한 거죠. 그건 그렇고…….”

윤호가 은근슬쩍 물었다.

“혹시, 옥청 도사님께서도 유군에 들어오십니까?”

“아직 모르오.”

“예? 아직 모르다니요?”

옥청이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을 뿐이오. 연 대협, 아니 연 공자는 날 찾지 않았소.”

“……예?”

“그저 연 공자를 대장으로 유군이 조직되고 있다고 하기에 찾아왔다는 말이오. 도우(道友)들에게는 연 공자가 직접 가서 제안했다는 것도 오면서 들었소이다.”

“아…….”

윤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양반이 왜 그랬을까요? 옥청 도사님 정도의 무공이라면 한달음에 찾아가 청해야 정상일 텐데.”

옥청이 입맛을 다셨다.

“내 무공이 워낙 수준 이하라 그랬을 수도…….”

“예? 에헤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옥청 도사님 무공이 수준 이하면 저희는 나가 죽어야 해요.”

“아니오. 정말 내 무공은 별거 아니었소.”

윤호가 빙긋 웃었다.

“겸양이 대단하십니다.”

겸양 아닌데.

옥청은 지난 사정을 설명하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얘기기도 했고, 애초에 낯선 사람과 말 섞는 게 어색하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음?”

“누가 온다.”

모두의 눈이 빛났다.

사박사박.

눈 쌓인 땅을 걸어오는 소리가 듣는 이의 귀를 간질였다.

이윽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아, 아름다우시네.”

“궁수?”

야외 후원으로 들어온 사람은 바로 묵비였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색한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윤호의 눈이 빛났다.

“저 궁수분, 연 공자의 친구 아닙니까?”

“…….”

“옥청 도사님?”

“예, 예? 아, 나 불렀소?”

“……예에. 아, 그나저나 옥청 도사님도 아시죠? 저 궁수분 말입니다.”

“알고 있소.”

알아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지.

옥청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매만졌다.

‘집중적으로 맞았었지, 여기를.’

연호정은 한 번씩 묵비를 시켜 옥청에게 화살을 날리게 하곤 했다.

촉이 없는 뭉툭한 화살이었지만, 한 번 맞을 때마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야 했다. 묵비의 화살은 너무 빨라서 옥청의 반응 속도로는 쉽사리 회피하기가 어려웠다.

‘대화 한번 나눈 적 없지만, 묵 소저의 무공도 나보다 훨씬 뛰어날 거야.’

분명 그럴 것이다. 허벅지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지막지한 고통의 기억이 옥청을 공포에 젖게 했다.

‘……으, 상상을 말아야지.’

그렇게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묵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호오, 내 예상보다 더 많이 모였네?”

모두가 깜짝 놀라 후원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연호정이 있었다. 박력 넘치는 광룡부를 견봉에 걸친 그의 모습은 제법 유쾌해 보였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얼추 오십은 되겠구만.”

제각기 흩어져 있던 후기지수들이 전부 자세를 바로 했다.

어찌 되었든 이번 유군을 이끌 수장이었다. 연배와 무공을 떠나 나름의 예의는 갖춰야만 했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짐들은 다 챙겼나?”

“……?”

이게 무슨 말이지?

윤호가 대표로 물었다.

“짐을 챙겼냐는 말씀은……?”

“음? 말 그대로인데?”

“예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얘기 못 들었나? 오늘 바로 출맹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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