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욕심의 대가 (4)
검선(劍仙) 탁무자(倬武者).
성천십삼좌 중 신선제왕의 일인으로, 당대 무당파(武當派) 무공의 정점에 서 있다는 무적의 고수.
신선제왕 간의 싸움에선 누가 더 우위인지 따져 보는 게 의미가 없다지만, 적어도 명성을 날린 시기는 일신(一神)과 이선(二仙)이 삼제사왕(三帝四王)보다 몇 년은 더 빨랐다.
그래서 세인들은 존경을 담아 일신과 이선이 가장 천하제일에 가깝다고 평했다. 순수 실력을 떠나, 연배와 명성으로 그러한 평가를 내린 것이다.
검선은 그러한 이선 중 하나이자 도문(道門)의 검맥을 이은 사람 중 최강이라 평가받는 고수였다.
그리고 그 제자가, 지금 연호정 앞에 서 있었다.
‘검선 탁무의 제자 옥청이라.’
연호정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그래,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지.’
무당파의 개파조사인 삼풍진인 이후 최고의 무재(武才)라 일컬어지는 탁무자가, 처음 옥청을 보았을 때 무신(武神)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라고 극찬을 했다고 하였다.
그 소문은 단숨에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천하의 고수 탁무자가 제자를 들인 것만으로도 경천동지할 일인데, 제자의 재능을 두고 무신의 그것이라 했으니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옥청이라는 도호(道號)를 기억하고 있었다.
‘옥청은 죽었어.’
연호정이 흑암제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사음교는 본격적으로 중원에 진출하기 전, 상대하기 어려운 고수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죽여 버렸더랬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옥청이었다. 그리고 옥청은 사음교의 암수에 당해 죽을 당시 이미 신선제왕급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옛날에는 죽었지. 얼굴 한번 못 봤던 사람을 지금 이 시대에 보게 되다니.’
연호정의 얼굴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옥청…… 얘기는 많이 들었지.”
옥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얘기를 많이 들었다? 초면에 꽤 건방진 말투였다.
하지만 옥청은 상대의 말투에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벽(壁)을 깰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줄 고수와의 비무였다.
“귀하가 연 호장이오?”
벽산호장이란 별호와 연호정이란 이름을 합친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남의 이름 멋대로 개조하지 마시오. 나는 연호정이오.”
“무례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래도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하겠소.”
스륵.
옥청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비장미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부디 나와 비무를 해 주시오.”
연호정이 묵비를 힐끔거렸다.
묵비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건 사고를 부르는 연호정의 악랄한 운명에 질려 버린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수련 중이오.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오시오.”
“하면 수련이 끝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소.”
개 같은 외골수로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기다리겠다고?”
“그렇소.”
“머리카락에 고드름 맺히겠소.”
“…….”
“참나.”
연호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굳이 나와 비무를 하겠다는 거요?”
옥청의 입이 자연스레 열렸다.
“벽산호장의 무공은 들불처럼 거세고 격렬하여, 상대가 반격할 여지를 주지 않는 전투적인 무공이라 들었소.”
“……음.”
“또한, 공격에 중점을 둔 파격적인 무도(武道)에 능하면서도 공수 전환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이미 일가(一家)를 이룬 실전형 무인이라 하였소.”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소문이군.”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상대라고 생각했소.”
옥청이 눈 덮인 땅에 이마를 대었다.
“부디 내게 가르침을 주시오.”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보고 배워라, 인마. 나중에 아버지한테 저 정도 성의는 보이란 말이다.
“어쩔 수 없군.”
옥청이 고개를 들었다.
허무함으로 가득한 그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깃드는 것 같았다.
후웅.
견봉에 광룡부를 걸친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판 합시다.”
“고맙소. 정녕 고맙소.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은혜랄 것 있겠소. 당신이 이길지도 모르는데.”
스르릉.
옥청이 검을 뽑아 들었다.
무당파가 자랑하는 송문고검(松紋古劍)이었다. 검첨이 살짝 둥그스름하고 날은 다소 무딘, 도가의 제식형 철검이었다.
연호정은 가만히 옥청을 보았다.
옥청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서서히 자세를 낮추었다.
우우우웅.
송문고검에 푸른 기운이 어렸다.
순간 묵비는 섬뜩함을 느꼈다.
‘날카롭다.’
송문고검은 분명 날이 서 있지 않은데, 저 맑은 기운이 어리자 무섭도록 날 선 예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옥청의 검이 그만큼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선도(仙道)를 지향하는 무당의 무공 같지 않았다.
또한, 저 날카로움은 진짜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눈 깜짝할 새에 베일 것만 같았다.
묵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볼 때였다.
“음…….”
연호정이 볼을 긁적였다.
“시작해도 되는 거요?”
“예?”
옥청이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그럼, 시작하겠소.”
번쩍!
‘헉!’
옥청은 기겁했다. 오 장 밖에 서 있던 연호정이 어느새 일 장 안쪽으로 접어든 것이다.
엄청나게 빠른 이동 속도였다. 옥청은 본능적으로 무당을 대표하는 검학, 태극혜검(太極慧劍)을 펼쳤다.
동시에 연호정의 광룡부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쩌어어어어엉!
올려 치는 일격에 송문고검이 부러지고.
퍼어억!
“꺼어어억!”
선풍처럼 휘돌아 내친 연가권, 일주청파 일격에 옥청의 눈이 뒤로 넘어갔다.
배를 감싸 쥐고 부들부들 떨던 옥청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정신을 잃기 전, 그의 귀로 연호정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지듯 들려왔다.
“뭐야, 이 바보는? 승부가 시작됐는데 왜 몸에 힘을 빼고 지랄……. 무당 무공은 다 이런……. 왜 뒈졌는지 알겠…….”
“허억!”
정신을 차린 옥청이 벌떡 일어났다.
“헉헉! 으윽.”
그는 저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
복부에서 둔중한 통증이 올라왔다. 어찌나 고통스러운지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끄으응.”
옥청은 혼원진결(混元眞訣)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올라오는 혼원기(混元氣)가 복부의 고통을 감소시켜 주었다.
이제야 좀 살 만해진 것 같았다. 옥청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가 어디지?’
방이다. 꽤 널찍한 방인데, 옷가지는 많지 않았다.
그때, 옥청의 머리에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올랐다.
“헉! 벽산호장!”
그렇다. 자신은 벽산호장 연호정에게 비무를 신청했고, 고작 두 합 만에 복부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두 합…… 이 내가 고작 두 합 만에……?’
옥청은 믿을 수가 없었다.
부르르르.
꽉 쥔 주먹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근래 들어 심마(心魔)가 깃들고 무공의 정체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쌓아 온 무공은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어지간한 고수는 삼검(三劍) 안에 제압이 가능한 실력인데, 고작 두 합을 못 버텼다고?
‘이럴 순 없다. 다시 만나야 해.’
그때였다.
쩌어엉! 빠각!
“크헉!”
괴상한 신음과 함께 사람이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옥청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은 이 층인지, 창 아래를 보니 큰 키의 청년이 화려한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몇 번 째야? 그만 좀 처왔으면 좋겠구먼, 쌍.”
짜증이 한도 끝도 없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순간 옥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호정!’
파아악!
창밖으로 몸을 날린 옥청이 바닥에 내려섰다.
연호정이 옥청을 돌아보았다.
입을 열려던 옥청은 순간 움찔했다. 자신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이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 뭐요?”
“…….”
“일어났으면 댁 처소로 가시오.”
쉽사리 말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옥청은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죄송하오. 빈도가 벽산의 호장께 괜한 폐를 끼쳤소. 과연 온 천하가 놀랄 만한 무공의 소유자시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째 말만 들어 보면 곧바로 돌아갈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는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멀어도 한참 멀었소. 그러니 수련에 힘쓰는 거 아니겠소?”
“그렇구려.”
“여하간 이만 돌아가시오. 검은 탁자 위에 놓아두었으니 가져…….”
“죄송하지만, 한 번만 더 부탁해도 되겠소?”
“…….”
“부탁하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소.”
“자세 잡아.”
“……음?”
고개를 들어 연호정을 보던 옥청은 순간 오금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의 두 눈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하고 있었다.
“자세 잡으라고, 이 도사 놈아.”
“에? 아, 예.”
옥청은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자세를 잡았다. 무당칠성권(武當七星拳)의 기수식이었다.
“……참나.”
퍼어어엉!
쌓인 눈이 삼 층 높이로 치솟았다.
다행히 옥청의 몸뚱이는 이 층 높이까지만 치솟다가 떨어졌다. 천만다행히도 골절은 없는 것 같았다.
의식을 잃어 가는 옥청의 귀로 다시 연호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부터는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려야겠어. 묵비! 여기 공동파에서 온 놈도 치우……. 아, 이 미친놈들이 진짜 또 왔……. 뒈져, 이 개새……!”
“허억!”
옥청이 또 눈을 떴다.
“헉헉! 콜록! 콜록콜록!”
밭은기침이 절로 나왔다. 전신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끄으윽!”
간신히 몸을 일으킨 옥청은 턱을 어루만졌다.
‘안 깨졌나?’
마지막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육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접근한 연호정의 반장(半掌)이 턱을 후려쳤고, 자신의 몸은 허공을 날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련된 몸과 혼원진결이 아니었다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도 단단히 부러졌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턱이 박살 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상대가 배려해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머리통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옥청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벌써 밤인가……?”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밤이다.”
“커헉!”
깜짝 놀란 옥청이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연호정이 어깨에 도끼를 걸치고는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탁자 중앙에 초를 켜 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묘하게 섬뜩했다.
“여, 연 호장?”
“내 이름 개조하지 말라고 했다.”
“……예?”
“호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인마.”
“아, 예!”
왜일까? 옥청은 자신의 언행이 저도 모르게 공손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가만히 옥청을 보던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신 차렸으면 이만 돌아가. 나도 이거 다 마시고 자야 해.”
“아……!”
옥청은 그제야 자신이 연호정의 침상을 뺏었다는 걸 깨달았다.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온 옥청이 고개를 숙였다.
“폐, 폐를 끼쳤습니다.”
“알았으면 이만 가 봐.”
“아…… 한데 혹시…….”
연호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광룡부를 들어 올렸다.
옥청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헉! 싸워 달라는 거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
“…….”
“흥.”
쿠웅!
도끼를 내린 연호정이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옥청은 침을 삼켰다. 정상이었을 때도 두 합 만에 자신을 제압한 상대였다. 지금 몸으로는 일초도 못 버틸 것이다. 아니, 실제로 못 버티기도 했다.
‘엄청난 강자다! 나랑 비슷한 연배인데도 어떻게 이런 강함을!’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
“……되겠습니까?”
“뭐? 안 들려, 인마. 크게 말해.”
옥청이 우물쭈물 말했다.
“대, 대협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 결국 그거였냐? 빨리 말하지, 새꺄.”
연호정이 싸늘한 얼굴로 일어났다. 진짜 끝장을 볼 요량이었다.
“헉! 싸, 싸워 달라는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가르침입니다, 가르침!”
“……음?”
“내,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부디 저의 모자란 점을 알려 주십시오! 절대로 싸워 달란 말은 않겠습니다!”
“…….”
“…….”
“……흐음.”
쿠웅!
광룡부를 놓은 연호정이 손을 휘저었다.
“알겠으니까 내일 다시 와. 잘 거야.”
“옙!”
옥청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파군각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