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백도무림맹(白道武林盟) (5)
그날 밤.
완전히 취해 버린 가득상을 버려 두고 파군각 후원으로 나온 연호정이 가부좌를 틀었다.
우우우우웅.
은은한 청색 기운이 전신을 감싸고 돌았다.
두 달 전보다 훨씬 더 깊고 아름다워진 기(氣)였다. 이런 기를 발산하면서도 일정 이상의 영역으로는 기파를 풍겨 내지 않는다.
운공 중에도 진기 제어가 완벽하다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힘의 조율에 능해지는 그였다.
‘이제야 몸이 쫓아오는군.’
머리로는 이미 사신의 신기(神氣)를 전부 소환해 내고 벽라진기를 대성한 것도 모자라, 연가의 오대신공까지 모조리 섭렵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근골은 물론 혈맥, 장기 등등 신체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깨달음을 완전히 녹이기엔 단련이 덜 되었다.
이제는 다르다.
‘슬슬 넘어서고 있어.’
강해지기 위해서는 노력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연호정에게 그 무언가는 바로 믿음이었다. 흑암제로서 흑도를 제패했던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혹독한 수련과 치열한 궁구로 점차 빛을 보고 있었다.
‘육체가 따라와 준다. 기(氣)를, 깨달음을, 의지를 이제는 따라와 주고 있어.’
진화(進化)는 하등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진화의 필수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환경이었다.
생물이 환경에 맞게 진화하듯, 연호정 역시 육체의 환경을 급변시켰다.
기를 불리고, 몸을 혹사했다. 몸은 쉬게 했어도 정신은 항상 기를 조절하여 신체 활동을 왕성하게 했다. 성장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지옥 같은 환경을 만든 것이다.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육체가 붕괴하거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상단전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 낸 지금 이 순간.
비로소 그의 육체가 온전히 연호정의 의지하에 놓이게 되었다.
스르륵.
눈을 감은 연호정이 오른손을 뻗었다.
자연스레 뻗은 손끝에서 백호기가 올올이 풀려 나왔다.
후우웅.
바람을 불러냈다.
추운 겨울밤, 한 줄기 안락한 온풍을 만들어 낸 백호기가 저 멀리 적당한 크기의 나무를 포착했다.
힘없이 뻗은 손을 천천히 주먹 쥐었다.
후우우웅!
무형의 바람이 나무를 휘돌았다.
그 바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강해졌다. 오로지 한 그루 나무만을 맴도는 바람에 서서히 반투명한 백색의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번쩍!
연호정이 눈을 떴다.
파삭!
나무 표면에 돌풍의 흔적이 새겨졌다.
부러트리진 못했지만, 목피(木皮)에 사나운 바람의 흔적을 남겼다. 백호기에 강한 의념을 실은 것이다.
본래라면 나무가 압착되어 부서져야 정상이지만, 아직 백호기의 농도가 그만큼 짙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성공이라 할 수 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한 줄기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묵비가 있었다.
“안 자냐?”
“바, 방금 한 수! 그거 허공섭물 아니에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허공섭물이란 강한 의념이 실린 내공으로 손도 안 댄 물체를 저절로 끌어오는 경지를 말한다.
허공섭물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어검(馭劍)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말과도 같다. 물론 진짜 어검다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피를 토하는 연마와 궁극의 깨달음이 필요하겠지만.
“허공섭물이 아니면 뭐죠?”
“그냥 내공 기예 중 하나야. 육체가 변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허공섭물을 구현하기에는 기(氣)도, 신체도 덜 단련됐다.”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빠르다면 빠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데.”
과거로 회귀한 후, 처음에는 흑암제의 깨달음으로 금세 강해질 수 있을 줄 알았다. 지옥 같은 수련을 반복하면, 적어도 일 년 안에는 아버지와 대등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틀렸다.
무공이라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흑암제의 깨달음은 당대 손에 꼽힐 만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신적인 공능을 발휘할 순 없었다.
‘그래도.’
연호정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다. 필요한 요건이 갖춰진다면, 충분히 더 빨라질 수 있어.’
그리고 그는 자신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를 알고 있었다.
‘전장.’
싸움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언제나 싸우면서 성장했다. 생사의 간극, 진화(進化)의 필요성을 가장 폭발적으로 느낄 수 있는 환경은 그의 무(武)를 완전히 탈바꿈시켜 줄 수 있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만개하는 성장력. 실로 사신무의 후예다웠다.
“그게 오래 걸린 거면 나는 나가 죽어야 해요.”
“웃기지 마라. 나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요령이 있어. 하지만 넌 아니잖아. 그런 면에서 보면 네가 더 대단한 거지.”
“요령이요?”
“그런 게 있다.”
“참 비밀도 많다니까.”
터덜터덜 걸어온 묵비가 연호정 옆에 앉았다.
“추운데 뭐 하러 나왔어? 들어가서 쉬지.”
“아까 잤더니 잠이 안 오네요.”
“그러냐.”
두 사람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겨울이지만 당분간 눈은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달빛이 고왔다.
“술은 다 마셨어요?”
“다 마셨으니까 이 추운 데 앉아서 내공이나 연마하고 있는 거지.”
“그 거지는요?”
“자고 있다. 속 좋은 양반 같으니.”
“그러게요. 엄청 뻔뻔할 것 같은데.”
“실제로 뻔뻔해. 장난 아니다.”
묵비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좀 뜬금없기는 한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
“꿈이 뭐예요?”
“꿈?”
“네. 꿈이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거창한 꿈은 없어. 인생의 목표는 있지만.”
“전에 말했던 미래를 대비하는 것인가요?”
“그래.”
“그게 당신 꿈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죠?”
“당연하지. 터전이 사라지고 내 사람들이 다 죽으면 꿈을 이뤄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그런 거 상관 안 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그렇단 말이죠.”
“근데 그건 왜 물어봐?”
“그래서 말했잖아요. 좀 뜬금없다고.”
“실없기는.”
묵비가 입맛을 다셨다.
“적어도 비슷한 건 있네요.”
“음?”
“나도 내 사람들을 지키고 싶거든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네 사람이냐?”
묵비가 인상을 썼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죠. 갚아야 할 빚도 엄청 많고.”
“하하.”
“가끔 되지도 않는 장난만 안 치면 진짜 좋을 텐데.”
“내 삶의 원동력이야. 바랄 걸 바라라.”
“말은 거창하지만, 결국 남 놀려먹는 거 못하면 힘 빠지는 인성 파탄자라는 소리잖아요.”
연호정은 과거의 묵비에게 묻고 싶었다.
너, 어휘력이 그렇게 좋은데 왜 그렇게 입 다물고 살았냐?
“끄으응. 추운 데서 오래 앉아 있었더니 엉덩이에 감각이 없다. 난 먼저 들어가서 잔다.”
“벌써요?”
“벌써는 인마, 자정이 넘었는데.”
“쳇.”
“너도 좀 더 자 둬. 여로에 피곤했을 텐데.”
“잠 안 온다니까요. 그리고 뭐, 별일 있겠어요? 그 정의롭다는 백도 무림연맹의 본성인데.”
“글쎄, 그거야 알 수 없지.”
“네?”
연호정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구린내가 나기 시작했거든.”
삼신기가 우웅 소리를 내며 울었다.
* * *
다음 날 아침.
“오셨습니까?”
“그래.”
연호정이 혀를 내둘렀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아직 구파와 육대세가의 수장들이 다 모인 것도 아닌데.”
“거의 다 모였으니 무림맹 건립 주제로 일장 토론을 벌였다.”
“하긴, 그럴 수 있지요.”
날이 새도록 머리 싸매고 대화만 하다 왔음에도 연위는 조금도 피로해 보이지 않았다.
“시간 있느냐?”
“있습니다만, 안 주무십니까?”
“시간 되면 나와 얘기나 하자.”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한데 후개는 어디 있느냐?”
“아직 제 거처에서 자고 있습니다.”
“…….”
“그 인간한테 대단한 걸 바라진 마세요, 아버지.”
“커험!”
잠시 후, 두 사람이 연위의 방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연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림맹 건립은 거의 확정된 듯싶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그렇군요.”
“짐작하고 있었더냐?”
“모용가주는 대회의권을 발동하며 구주명가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암암리에 구파와 육가의 수장들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든 셈이지요.”
“그렇지.”
“그리고 모용가주는 무림맹이 건립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음.”
“대세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이지요. 게다가 모용가주는 국지전보다 전면전에서의 활약상이 돋보이는 유형입니다. 필시 흐름을 주도했을 것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그대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명백한 적임을 알고 있음에도 모용가주의 언변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이해합니다.”
연위에게 중요한 것은 모용군이 적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협의지도(俠義之道)와 민생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그를 위해서는 원수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세상이 그를 대협이라고 칭송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모용군의 말에 흔들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연호정은, 오히려 그런 면 때문에 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세력의 수장들 몇몇은 하나같이 호전적인 성품의 소유자들이다. 아마 대놓고 찬동하려 들 확률이 높다.”
“즉, 무림맹 건립은 확정이라고 봐도 좋겠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무림맹 건립은 저도 찬성입니다.”
“후우.”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이왕 결정된 것,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무림맹으로 인해 천하의 치안이 더 좋아진다면 그 또한 좋을…….”
“그래서가 아니다.”
“예?”
연호정을 보는 연위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순간 연호정은 자신과 관련한 모종의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입니까?”
“모용가주는…… 아니, 시작은 모용가주가 했지만 각파의 수장들 대다수가 열의를 보인 일이 하나 있었다.”
“……?”
“새로이 건립될 무림맹에는 이렇다 할 전투 부대가 없다. 기실, 말이 무림맹이지 구파일방과 육대세가, 그리고 군소 문파들의 힘을 뭉친 것이 바로 무림맹 아니더냐.”
“그렇지요.”
“한데 저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오직 무림맹 산하의 전투 부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나 역시 그에 찬성한다. 이왕 건립될 무림맹이라면 확실하게 힘을 갖추는 게 좋겠지. 하지만…….”
“…….”
“각파에서 배출한 고수를 대장으로 삼은 전투 부대를 만들길 원하더구나.”
연호정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벌써 주도권 싸움이 시작된 것이로군요.”
“그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무림맹 산하 직할 부대를 여러 개 창설하는 것은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각파의 고수들을 수장으로 삼는 것에는 나를 포함 네 사람이 반대 의견을 냈다.”
“네 사람이요?”
“나와 제갈가주, 소림 방장 그리고…….”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모용가주다.”
연호정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모용군이 왜 반대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훗날 맹주가 될 때, 자기 휘하의 병력만을 다스리고 싶었겠지. 만일 각파의 고수를 수장으로 삼은 전투 부대가 창설되면 주변 눈치를 봐야 할 테니까.’
벌써 밑 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추진력 하나만큼은 대단한 양반이다.
“무림맹은 상징성이 있는 집단인 만큼,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색을 최대한 빼는 것이 옳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은 너무 먼 얘기로군요. 차차 생각해 보는 것이…….”
“모용가주가 널 추천했다.”
“예?”
연위의 얼굴에 의심의 기색이 어렸다.
“절충안이라고 낸 것이, 전투 부대 절반만 각파의 고수를 수장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용가주는, 그 전투 부대 중 하나의 수장으로 너를 추천했다.”
“……오호?”
“무슨 의도인지 알겠느냐?”
“하나는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그 양반, 제가 어지간히 무서웠나 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