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28화 (128/963)

128화. 백도무림맹(白道武林盟) (3)

그날 밤.

“허허.”

모용군은 한껏 취했다.

연호정과의 술자리 이후 이렇게까지 취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니, 연호정과의 술자리에서도 이렇게 마셔 대진 않았다.

“평화의 시대지만 그 이면에는 피와 죽음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지. 해서 무림이란 언제나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인 게야.”

모용군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서 세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이 끊어지기 직전의 인연도 다시 오게 만드는구나.”

그때,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모용우 말입니다.”

“허허, 자네는 그 아이를 몰라.”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그렇게 술에 취하고도 눈빛은 맑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뇌정기(雷霆氣)가 활발하게 힘을 불리고 있었다.

“내가 그 거친 권력 다툼에서도 굳이 막내를 살려 둔 데엔 이유가 있네. 막내는 순수하지. 순수해서 배신이라는 걸 못 해.”

“사람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법입니다.”

“성격은 달라져도 천성은 바뀌지 않아. 나는 막내의 뿌리를 보았다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 뿌리는 바뀌지 않았더군.”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하지만…….”

지이이잉.

위협적인 푸른 전광이 그의 몸 전체를 뒤덮었다.

푸스스스.

순간 방 안이 술 냄새로 가득 찼다. 단번에 주기를 배출해 버린 것이다.

“동시에 나는 나의 뿌리 역시 안다네.”

“…….”

“혈육조차도 믿지 못하는 독심. 아니, 오히려 혈육이라서 더더욱 의심하지. 이유인즉, 가까운 사람의 배반이 훨씬 더 아프다는 걸 알기 때문이네.”

“모용우를 믿지 않는단 말이오? 믿지도 않으면서 어찌 그를 받았소?”

“자네는 내가 막내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를 것이네. 나는 막내를 믿어.”

“…….”

“하나, 막내의 환경은 믿지 않는다네. 그간 막내가 어떤 걸 보았는지, 어떤 사람과 교분을 나누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녀석을 덜컥 등용할 만큼 내가 쉬운 사람은 아닐세.”

“하면 어찌?”

“녀석의 능력을 알기 때문이지.”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가볍게 얻은 사람은 가볍게 사라지기 마련일세. 대표적으로 두어 달 전에 보낸 몽의가 그러했지.”

“…….”

“놀랍게도, 힘들게 얻은 사람 또한 가볍게 사라질 수가 있네. 나는 막내를 이십 년 만에 얻었어. 이렇게 힘들게 얻은 귀중한 패를 쉽게 잃을 수야 없는 일 아니겠는가.”

“어쩌실 생각이오?”

“녀석은 정에 약하다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정을 엮어 묶어 버리는 수밖에 없지.”

모용군의 얼굴에 서늘한 그림자가 일었다.

‘어떤 가혹한 일을 맡기셔도 군말 없이 따를 것입니다.’

모용우의 강단 넘치는 눈빛을 떠올린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이 또한 일이라고 하기에는 정이 좀 없기는 하지만…….”

“……?”

“중원전장(中原錢莊) 장주의 장녀가 아직 혼인하지 않았다고 했던가?”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중원전장은 강호 무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대 전장이다.

전장 중에서는 가장 역사가 깊기에 그 인맥이 상상을 초월한다. 심지어 돈을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고수를 사들이기도 했으니, 단순 무력만 해도 어지간한 대문파 이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중원전장의 장주는 모용군과 제법 절친한 사이였다.

“녀석의 나이가 벌써 서른일세. 제아무리 무림에 적을 두고 있다고는 하나 그 나이 먹도록 혼인을 하지 못했으니, 이는 큰 문제가 아니겠나.”

“하지만…… 장주의 장녀는 이제 열여덟밖에 되지 않았소이다.”

“어허, 혼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우는 내가 아는 인재 중 손에 꼽히는 천재일세. 향후 모용세가의 가주가 될 몸인데, 오히려 그쪽에서 좋아해야지.”

모용군이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중원전장주에게 기별을 넣게. 무림맹으로 나들이 한번 오시라고.”

* * *

“도착했군요.”

“그래.”

무림맹엔 네 개의 거대한 성문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그 문을 사수대문(四獸大門)이라 불렀다.

연호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수, 사신(四神)이라…….”

그들이 들어가려는 대문은 사신의 문 중 청룡대문(靑龍大門)이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대문에 청룡의 문양이 생생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대문보다 네 배나 높았다.

‘어마어마하군.’

연호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과거 무림맹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무림맹 외측 성벽은 사음교와의 전쟁으로 인해 반쯤 무너져 있었다.

‘미친놈들. 이런 성벽을 때려 부쉈다니.’

엄청난 물량을 퍼붓지 않고서는 흠집 하나 제대로 내기 어렵다. 새삼 사음교의 광기 어린 힘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들어가도록 하자.”

연가의 무사들이 청룡대문 앞으로 향했다.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강소성 벽산연가일세.”

간단한 확인 절차를 거친 후, 청룡대문이 열렸다.

쿠구구궁!

천천히 좌우로 열리는 청룡대문의 위용은 압권이었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흑제성은 이런 맛이 없었지.’

흑제성은 이보다 훨씬 작았다. 대신 병력 집결력을 높이기 위해 내부 공사에 천금을 쏟아부었다.

“와아…….”

“어엉?”

묵비는 홀린 듯 대문을 보았다.

“저, 저런 건 처음 봐요.”

“……나도 첨 본다.”

그래, 처음 보지.

근데 왠지 모르게 약이 올랐다.

‘네가 축성(築城) 규모를 축소하자고 했었잖아, 망할 놈아.’

당시 묵비는 흑제성의 규모를 절대 키워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자금은 넘치도록 충분했지만, 앞으로의 싸움을 생각하면 군자금을 모아 놓을 필요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흑제성은 최소 비용, 최대 효율을 추구하며 만들어졌다. 물론 연호정 역시 그 말에 찬성했었다.

그래도 당사자가 이러니 마음이 좀 그렇다.

연호정이 묵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으아악! 왜 그래요!”

“몰라, 인마.”

“아, 정말. 요새 심술만 늘어 가지고.”

“뭣이라?”

“아까도 가만히 있었으면 될 걸 굳이 시빗거리 만들었잖아요.”

“내가 언제!”

“남궁세가하고요.”

“야, 그럼 그걸 참아? 누가 봐도 억지로 하는 사과잖아!”

“그럼 그냥 무시하면 되지 뭐 하러 더 도발해요.”

“무서운 소리 하고 있네. 욕먹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게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여하튼, 안 그럴 수도 있었잖아요. 하여튼 사고 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다니까.”

“이놈의 주둥이를 그냥…….”

그때, 연위가 말했다.

“비아의 말도 일리가 있다.”

“……끄으응.”

“강호 어디에서나 그렇겠지만, 중대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온 만큼 행실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묵비가 불신 어린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거칠게 눈을 부라렸다. 묵비가 어마 뜨거라, 하는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

마침내 청룡대문이 전부 열렸다.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드디어 무림맹이다.”

덩달아 연호정의 눈빛도 바뀌었다.

그는 모용우가 이미 이곳에 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거리나 이동 속도를 생각하면 늦어도 하루 전에는 도착했을 것이다.

‘제대로 물었으리라 믿는다.’

또각또각.

연가 일행이 무림맹 안으로 들어갔다.

무림맹 내부는 또 하나의 중원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굽이진 길도 있고, 평평한 길도 많았다.

‘흐음.’

연호정의 눈이 순식간에 주변을 훑었다.

‘확실히 제대로 만들었군.’

영역이 엄청나게 넓은데도 건물이나 성루의 배치 등이 몹시 짜임새가 있었다.

‘수성전(守城戰)에 지극히 특화된 구조. 외성 바깥쪽만 해도 이 정도면…….’

연호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장난이 아니군. 흑제성을 몇 배로 확장해 놓은 것 같아.’

멀쩡한 상태의 무림맹은 그러했다. 결코 무너트릴 수 없는 철옹성의 위용을 보여 주고 있었다.

연위가 물었다.

“굉장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본가의 건축 구조와는 완전히 다르다. 본가는 무사들의 집결과 반격에 용이하도록 배치되어 있지.”

“반면 무림맹은 지극히 수성전에 용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 보았다.”

“아무래도 무림맹이라는 상징성 때문이겠지요. 다른 모든 것이 무사해도 무림맹이 무너지면 백도는 힘을 잃습니다. 누구도 공략할 수 없는 희대의 철옹성. 무림맹을 보는 것만으로도 백도 무림의 역사를 알 수 있겠어요.”

연위가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퍽 순진한 표정이었다.

“왜 그리 보십니까?”

그간 큰아들에게 많이도 놀랐다.

이제는 더 놀랄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놀라게 된다.

‘정말이지 무섭구나.’

아들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백도는 흑도와 다르다. 흑도는 생존을 위해 온갖 비열한 수를 쓰지만, 백도는 죽음으로서 의기(義氣)를 불사른다.

그래서 흑도는 뿔뿔이 흩어진 채 제힘을 못 내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약세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반면 백도의 힘은 철저하게 뭉쳐 있다.

중원 각 지방, 구파일방과 육대세가가 뿌리내린 곳의 문파들은 대부분이 그들과 손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무림맹을 구심점 삼아 외세와 싸우는 것이다.

백도는 멸망 직전까지 간 적은 있지만, 완전히 무너진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다.

무림맹이라는 이름이, 존재가, 이 성이 갖고 있는 힘은 그렇게 컸다.

“참으로 못 하는 것이 없구나. 그런 것은 어디서 배웠느냐?”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책이요. 이런 쪽으로 관심이 많아서…….”

연위는 아들을 믿었다. 하지만 지금 이 말은 믿지 않았다.

이런 것은 책으로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림으로 봐도 알 수 없다.

직접 보고, 관찰하고, 그런 곳에서 생활해 봐야 아는 것이다.

무공이든 학문이든 천재는 있지만, 전술축성(戰術築城)이나 전략 배치도 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경험 위주의 공부다.

“네 말은…….”

그때였다.

“여어어어어!!”

그야말로 우렁찬 목소리였다.

누구라도 돌아볼 수밖에 없는 성량이었다. 압도적인 해방감이 느껴졌다.

“시바아알! 연 공자아아!”

연호정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가 연위를 힐끔거렸다.

당연히 연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표정만 보면 어디서 저런 상스러운 친구를 사귀었냐며 혀를 차도 모자랄 것 같다.

하지만 연위는 상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안 하는 것이다.

“오랜마아아안……!!”

“아, 좀 시끄러워, 미친 거지 놈아!”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던 가득상이 그대로 멈추었다.

한 번 더 가멸차게 욕지거리를 뱉어 주려던 연호정은 순간 주춤했다. 가득상의 두 눈이 붉어지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주르륵.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린다 싶더니, 그대로 쓰러져 통곡한다.

“으허허헝! 크어어엉!”

가관이었다.

저건 연기가 아니라 진짜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보는 사람의 눈시울마저 적실 정도다. 묵비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훌쩍이고 있었다.

“으아아! 자유우우!!”

이쯤 되면 연위로서도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개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애써 침착하게 말한다. 연위 역시 당황한 것이다.

연호정이 투덜거렸다.

“저 거지새끼한테 안 좋은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보나 마나 무공 수련하기 싫어서 도망치거나 했겠죠.”

“말을 가려서 하거라.”

“저놈한테는 그래도 돼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봤더니 반갑기는 하다.

“그만 짜고 일어나쇼.”

“훌쩍.”

“오랜만이외다. 잘 있었소?”

“못 있었소.”

가득상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와 연호정의 손을 잡았다.

연호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손을 잡은 가득상의 양손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오늘은 나랑 술 한잔 마셔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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