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27화 (127/963)

127화. 백도무림맹(白道武林盟) (2)

“가주님. 백풍단주(白風團主)가 중간보고를 올립니다.”

“말씀하시게.”

“현재 구파일방 중 소림(少林), 무당(武當), 화산(華山), 종남(終南), 청성(靑城), 아미(蛾眉), 공동(崆峒)의 장문인들이 모였습니다. 육대세가 중에는 본가와 제갈(諸葛), 팽가(彭家)가 모였고 연가(燕家)와 남궁(南宮)이 지척이랍니다. 당가(唐家)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음, 알겠네.”

“그리고…….”

“나머지 보고는 반나절 뒤에 듣겠네. 고생했네.”

“아, 예. 알겠습니다.”

문밖에서 백풍단주의 기척이 사라졌다.

가만히 앉아 상대를 보던 모용군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술은 즐기느냐?”

“간간이 한 잔씩 합니다.”

“하하, 그래. 안 본 새에 어느덧 너도 사내가 다 되었구나.”

모용군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해가 중천이다만, 형제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맹숭맹숭한 차를 마실 수는 없지. 술 한잔하겠느냐?”

“좋습니다.”

“그래.”

모용군이 시비를 불러 술을 가져오게 했다.

무림맹은 거대했다. 그 규모는 실로 엄청나서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에게 내성의 한 지역씩을 담당케 할 정도였다.

그들을 대우해 줌과 동시에 경비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현 무림의 정세와 정서로 봤을 때 합리적인 배치였다.

그래서일까? 모용세가가 자리 잡은 탐랑각(貪狼閣)에는 이미 모용군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술이 오기 전에 얘기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연화에게 망신을 줬다면서?”

모용군의 맞은편에 앉은 자.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가주의 딸이자 형님의 딸이다. 모용우에게 있어서는 질녀라는 것이다.

겁을 먹을 것까진 없더라도 위축되어야 정상이다. 한데도 모용우는 아주 당당했다.

“어찌 그리했느냐? 연화 그 아이, 생각보다 여린 아이다. 크게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만.”

“그 정도 폭언에 상처받을 정도면 연화도 아직 덜 컸군요.”

이놈 보게나?

모용군의 얼굴에 묘한 흥미가 어렸다.

그가 아는 모용우는 이런 녀석이 아니었다. 맑고 여린 영혼, 그래서 자신과는 맞지 않는 아이가 아니었던가.

한데 지금 모습을 보니, 그가 기억하던 과거의 동생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허허, 내가 오늘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구나.”

“그렇습니까?”

“하기야, 네 말도 맞다. 나는 연화 그 아이를 그리 약하게 키우지 않았어. 마음은 여리지만, 그 여린 마음을 드러내지 않도록 철저하게 단련시켰지. 다만, 네 말마따나 아직 부족한 듯싶다.”

“예. 연화는 부족합니다. 재정비할 시간을 갖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하하!”

모용군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일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절강은 아름다운 지역이다. 중원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곳에서 터를 잡길 꿈꾼다.

하지만 모용세가를 본진으로 본다면, 모용우는 변방으로 쫓겨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쫓겨났던 동생이 자신의 딸이 약하다고, 더 배워야 한다고 꾸짖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재미가 있었다.

“재미있구나. 참으로 재미있어. 근래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만, 설마하니 너와 이런 대화를 나눌 날이 올 줄은 몰랐다.”

“…….”

“절강 사업을 두 배로 불리겠다는 서신을 받았을 때, 너의 마음에 뭔가 큰 변화가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한데 이리 찾아온 걸 보니, 내가 모르는 큰 결심을 한 모양이다.”

“제대로 결심했습니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결심을요.”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마침 시비가 술상을 들였다.

“두강주(杜康酒)다. 마셔 본 적 있느냐?”

“없습니다.”

“내 입에는 잘 맞더구나. 발효 기간이 짧은데도 그럴듯한 맛이 나. 너는 어떨는지 모르겠다.”

모용군이 병을 들자 모용우가 공손하게 잔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구나. 너에게 술을 따라 주는 것이.”

쪼르르륵.

알싸한 주향이 순식간에 방 안을 휘감았다.

“자, 우리 막내가 주는 잔 한번 받아 보자.”

모용우가 모용군의 잔을 채워 주었다.

“한잔하자.”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음?”

모용군이 잔을 내려놓았다.

“한잔하고 시작하려 했더니.”

“형제지간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친분을 나누지 않은 자와 함부로 잔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허허.”

“그 관계를 바꿔 보려고 왔습니다. 이 잔은, 제 말이 다 끝난 연후에 비우도록 하겠습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말해 보아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모용우의 눈이 번쩍였다.

강렬한 의지로 빛나는 그 눈이 모용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형님께서 걷는 길이 옳은지 옆에서 확인하고 싶습니다.”

“음?”

“형님께선 큰형을 누르고 본가의 가주가 되었습니다. 우리 형제 중 둘이 죽었고, 저를 뺀 나머지는 형님과 뜻을 함께했지요.”

“그랬지.”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저는 형님의 길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알고 있다.”

“형님의 방법은 지나치게 위험합니다. 나아가, 그것은 정도(正道)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형님의 길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로 인해 죄 없는 사람들도 많이 죽었지요.”

모용군은 그저 웃어만 보였다.

모용우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형님은 저를 베지 않았습니다.”

“네가 나에게 덤비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제가 쓸 만한 놈이었다는 이유도 있겠지요.”

“하하, 잘 보았다.”

“절강 일을 맡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님은 어찌하여 그러한 패도(覇道)를 걷고 있는가. 어찌하여 정도(正道)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위험천만한 길을 걷고 있는가.”

“…….”

“본가의 과거와 현재를 보며, 비로소 저는 형님께서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무림맹주, 그리고 모용세가를 천하제일가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형님이 최고가 되기 위해 악독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를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만 생각해 왔지요. 다만, 형님께서 구체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허어.”

“하나 이제 알겠습니다. 형님께서는 무림맹주가 되어 백도 무림을, 나아가 중원 무림의 황제로 군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요.”

“……놀랍구나.”

모용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지금껏 나의 꿈을 간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오늘부로 둘이 되었구나.”

“그렇습니까?”

“그렇다. 나는 연화와 최측근 일부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나의 꿈을 말해 준 적이 없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나의 성향, 모용가의 행보, 천하의 흐름을 모두 읽지 않고서야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네가 천하의 다시없을 재인(才人)인 줄은 알았다만, 이 정도로 뛰어난 안목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참으로 대단하다.”

그가 이 정도로 칭찬한 사람 역시 한 명뿐이었다. 모용군이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너는 나의 목표가 무림맹주가 되는 것과 모용세가를 천하제일로 이끄는 것이란 걸 알았다. 해서, 그것이 너의 마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느냐?”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구정물에 발을 디딜 각오가 되었습니다.”

“음?”

“저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걸 혐오합니다. 하지만 저는 형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허허허.”

“그렇다면 저의 선택은 하나입니다.”

츠츠츠.

모용우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뿜어졌다.

“형님께서 하루빨리 옥좌에 앉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자신과 손을 잡기 위해 온 거라 내심 예상은 했지만, 저런 말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를 옥좌에 앉히겠다?”

“형님께서 무림 최고의 권력자가 되도록, 무림의 정점에 설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 돕겠습니다.”

“허허, 허허허허!”

“두 가지만 약속해 주신다면요.”

“약속?”

“예.”

“어떤 약속 말이냐?”

모용우가 주먹을 쥐었다.

“형님께서 냉혹한 행보를 선택하신 것은, 본인의 권력욕 외에도 추후 만인(萬人)을 평안케 할 묘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

“무림맹주가 되시면 그때는 천하를 위해 힘써 주십시오.”

모용군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네가 정녕 나를 놀라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엇나가시면 안 됩니다. 인의(仁義)가 넘치는 군주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을 약속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산야에서 생을 마감하겠습니다.”

놀란 얼굴로 동생을 보던 모용군은 문득 궁금하여 물었다.

“또 하나의 약속은 무엇이냐?”

“가문을 제게 주십시오.”

“무엇이라?”

“형님께서 무림맹주가 되시면, 모용가를 저에게 주십시오. 모용세가를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이끌 것입니다. 철저하게 깎아 내어 후세에 길이 남을 예술품으로 만들 것입니다.”

모용우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모용군을 보는 그의 눈빛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 두 가지를 약속해 주신다면, 오늘부로 저는 형님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

“어떤 가혹한 일을 맡기셔도 군말 없이 따를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린다면, 흔들리지 않도록 가꿔야겠지요. 그 또한 성장통이라 생각하겠습니다.”

“……어찌하여?”

모용군이 진지하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런 마음을 품게 된 것이냐? 나의 꿈을 알았기 때문이냐?”

“몇 가지 이유 중 하나이긴 합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냐?”

“제가 형님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뭐라?”

“저는 형님과 달리 죽는 그 순간까지도 혈육지정을 끊어 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혈육의 꿈을 도운 뒤, 저의 길을 갈 수밖에요.”

모용우가 고개를 숙였다.

“십 년이 넘도록 버텼지만, 승리는 보이지 않더군요.”

“…….”

“제가 졌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우야.”

그가 모용우의 두 손을 잡았다.

모용우는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이십여 년 만에 잡아 보는 형의 손은 그 사이에 많이도 거칠어졌다.

모용군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형님을 증오하는 놈입니다.”

“이놈아, 이놈아.”

모용군이 모용우의 어깨를 퍽퍽 때렸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주먹이었다. 그 주먹에 격동 어린 마음이 가득했다.

“참으로 고맙다. 참으로 고마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약속하마. 내 분명 그리할 것이다. 누구와의 약속인데 지키지 않겠느냐.”

모용우가 잔을 들었다.

“한잔하시지요.”

“그래, 한잔하자. 아니, 오늘은 양껏 취해 보자. 여봐라! 술을 독째로 가져오너라!”

형제가 잔을 비웠다.

서로를 보는 눈빛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둘이 서로에게 보여 주는 감정은 진심이었다.

‘형님.’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만, 저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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