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백도무림맹(白道武林盟) (1)
‘음?’
연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저 멀리, 백여 명의 고수들이 멈춰 서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꽤 떨어진 거리였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남궁세가.”
검중제일 남궁세가.
연가와는 다소 떨떠름한 관계로 얽힌 사이다. 그러나 연위의 표정은 평소처럼 변화가 없었다.
“네 보기에는 어떠하냐?”
“네?”
묵비가 깜짝 놀라 연위를 보았다.
연위가 턱으로 남궁세가를 가리켰다.
“저들의 기량 말이다.”
“아…….”
묵비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굉장한 것 같아요. 찌를 듯한 검기가 여기서도 느껴지는걸요.”
“그래?”
“네. 무겁고 장중한 느낌이에요.”
“잘 보았다. 남궁의 검을 상대한 자들은 하나같이 웅장하다는 표현을 하지.”
반면 연가의 검은 달랐다.
연가의 검은 철저한 정석을 지향한다. 그래서 적당히 익히면 어느 한 군데 특출난 부분이 없다는 평가를 받지만, 제대로 연마하면 만검(萬劍)을 제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어쩌면 검중제일이라는 칭호는 남궁보다 연가에 더 적합할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백도 무림에 한해서만큼은.
“가자.”
“예.”
연가의 병력이 이동했다.
말을 몰고 가던 연호정이 슬금슬금 묵비의 옆으로 이동했다.
“어이.”
“네?”
“표정 풀어, 인마.”
“내, 내 표정이 어때서요?”
“마음에 시커먼 불이 붙은 것 같은데?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나?”
실제로 묵비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남궁세가가 안휘혈궁의 본거지를 급습, 악의 싹을 끊어 버렸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렇다면 관일곡은 분명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할 일을 그들이 대신 했다. 의도한 일이지만, 어쩐지 마음이 심란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일로 부채감을 느낄 필요도, 저들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저들을 장기 말로 썼을 뿐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알고 있어요.”
“그래, 알면 됐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알고는 있는데, 마음이 정말 묘하네요.”
“억지로 감정을 정리할 필요는 없지.”
“휴우.”
한숨을 내쉬던 묵비는 문득 연호정이 탄 말을 보았다.
“새삼스럽긴 한데…….”
“음?”
“정말 굉장한 말이네요.”
연호정이 탄 말은 다른 기마보다 더 크고 웅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역동적으로 갈라지는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쩔 수 없어.”
광룡부의 무게는 정확히 팔십이 근이었다.
팔십 근이 넘는 중병과 함께하니 자연 말의 체력에도 영향을 끼친다. 온전한 사람의 무게라면 모르되 혹시라도 마상에서 광룡부를 쥐고 휘두를 순간이 오면 말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질 것이다.
당연히 체력 좋고 힘이 강한 군마(軍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면 연 공자가 책임자인 줄 알겠어요.”
“쩝.”
“아직도 이해가 안 되네요. 연가에 수준 높은 무공이 많을 텐데 왜 하필 그 무거운 도끼를 고른 거예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글쎄다.”
그가 도끼를 휘두르게 된 것은 우연에 가까웠다.
백도만큼은 아니지만 흑도에도 숨은 고수는 많았다. 그리고 그 고수들과 난전을 벌일 때, 맨손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바닥에 떨어진 창을 쥐고 휘둘렀던 게 어느새 도끼로 변했다. 말하자면 싸우다가 깨달은 재능이라고 봐야 한다.
“뭐가 됐든 강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거지.”
“연 공자답네요.”
그때, 연위가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거라.”
어느새 일행이 남궁의 병력 앞까지 도달했다.
남궁인이 앞으로 나서 포권했다.
“연가주를 뵙소이다. 남궁인이오.”
연위 역시 마주 고개를 숙였다.
“남궁가주를 뵙소. 연위요.”
이곳에 모인 이들은 두 수장 사이에 감도는 기묘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남궁인이 미소를 지었다.
“무림맹으로 가시는 길이오?”
“그렇소.”
“우연히 이리 만났거늘, 굳이 따로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소. 함께하시겠소?”
“좋소.”
담백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몇 마디 말로 두 가문이 길을 함께하게 되었다.
두 수장이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허허, 대단하시오.”
“……?”
“예전에 뵈었을 때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소. 판관검의 명성이 강동을 진동한다더니, 나중엔 대강남북(大江南北)을 휩쓸겠소이다.”
“과찬이시오.”
분위기를 좋게 만들 요량으로 건넨 칭찬이다. 마땅히 화답하는 것이 예의였지만 연위의 대답은 짧기만 했다.
여간해선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다. 연위의 성품이 그러했다.
게다가 두 가문은 자식들끼리 안 좋은 일로 얽혔다. 웃고 떠들 사이는 아닌 것이다.
남궁인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자네가 최근 명성이 자자한 연가주의 아들이구먼.”
그렇소, 라고 대꾸하려던 연호정은 문득 아버지의 눈빛을 보았다.
그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습니다.”
“허허!”
남궁인은 그저 웃음만 터트렸다.
연호정의 담백한 대답에 마음이 상해서? 그렇지 않다.
‘상대를 잘못 봐도 단단히 잘못 봤구나.’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은 강자다. 이제 막 약관에 이른 청년의 무공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그 무공은, 폐관을 끝내고 나온 첫째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했다.
‘지금 이 실력이라면 당시에도 어지간한 고수는 눈 아래로 봤을 것이다. 추성을 가지고 놀았다더니, 이제야 실감이 가는군.’
남궁인은 혀를 찼다.
‘어찌 이런 놈을 건드려서.’
지나 버린 일이지만 남궁현에게 다시 한번 실망하게 된다.
속내를 숨긴 남궁인이 웃으며 말했다.
“벽산호장이라는 별호가 무색한 기도일세. 연가의 앞날은 참으로 밝구먼.”
“감사합니다.”
딱히 겸양을 떨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말수가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남궁인이 고개를 돌렸다. 더는 연호정과 대화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연가주. 괴물을 키웠구려.’
호부견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필시 연가주는 큰아들의 엄청난 재능이 화(禍)가 될까 두려워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남궁인이 연호정에게 놀랐다면, 연위 역시 남궁표에게 놀랐다.
‘굉장하구나.’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분명했다. 조만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물려받을 거란 소문이 자자했다.
‘이립 어간의 연배로 저 정도 무공이라…… 천재로군.’
딱히 그럴 필요는 없지만, 연위는 저도 모르게 남궁표를 첫째와 비교해 보았다.
‘…….’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아마 그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음.”
남궁표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의 눈은 연호정을 향해 있었다.
‘뭐야, 저놈?’
남궁표의 눈이 희미하게 떨려 왔다.
‘나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저 나이에?’
연호정의 나이가 이제 약관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과는 십 년 차이가 나는 셈이었다.
한데도 저만한 기도를 품고 있었다. 마치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을 보는 듯 위험천만한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말도 안 되는…….’
천재로서의 자신감과 자존심이 송두리째 부서지는 것 같았다.
남궁표가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오랜만에 뵙소.”
연호정이 남궁현을 힐끔거렸다.
남궁현은 애써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직접 만나 사과하고 싶었소만, 기회가 닿지 않았소. 이리 만난 김에 지난 일을 사죄하리다.”
명확히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미 서로 아는 일, 이 많은 사람이 들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가만히 남궁현을 보던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진정 어린 사과인가?”
“……무슨 말씀이오?”
“딱히 사과할 생각도 없으면서 애쓸 필요 없다는 말이다.”
순간 일행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남궁현이 표정을 굳혔다.
“사과할 생각이 없다면 하지도 않았소. 내 사과는 진심이오.”
“그래?”
“그렇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나이니 달리 할 말은 없소만, 적어도 내 마음이 거짓이라고 매도하진 말아 주시오.”
진솔함이 묻어 나오는 말이었다. 그의 말 몇 마디로 날카로운 시선들이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도가 아니라 사실 아닌가? 넌 나한테 사과할 생각이 없어.”
“나를 모욕할 생각이오?”
“기가 눌리고 있잖느냐.”
“……?”
“네 형의 기에 철저하게 눌리고 있는 게 보인단 말이지. 예까지 오면서 입 한번 제대로 열지 못했던 듯싶은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네 존재감을 각인시킬 의도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너의 욕망을 위해 날 이용하진 마라. 그따위 썩은 표정으로 사과해 봤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
남궁현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볼 만한 사람은 전부 볼 수 있었다.
남궁인은 혀를 찼다.
“내 아들이 괜히 분위기를 망친 것 같소이다. 아들을 대신해 사과하겠소.”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이 워낙에 예의가 부족하오. 나 역시 사과하리다.”
그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자중하거라.”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남궁현의 얼굴은 그야말로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억눌린 자격지심이 폭발하기 직전이던 그였다. 와중에 극도로 싫어하는 놈에게 오히려 망신을 당해 버렸다.
‘이……!’
도무지 자제가 안 된다. 참을 수가 없었다.
츠츠츠츠.
연호정을 노려보는 남궁현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가 일었다.
“……?!”
순간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호정만 빼고.
연위가 날카로운 눈으로 남궁인을 보았다.
남궁인이 버럭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당장 살기를 거두지 못하겠느냐!”
그 호통에는 강렬한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순간 남궁현은 아차 싶었다. 쌓이고 쌓인 감정이 폭발해서 저도 모르게 살기를 흘린 것이다.
그때였다.
짜아아악!
남궁현의 고개가 홱 돌아가 버렸다. 얼마나 강한 따귀였는지 입가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남궁표가 모두를 향해 포권했다.
“죄송합니다. 제 동생이 근래 마음을 크게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탓에 요즈음 실수가 워낙에 잦습니다.”
남궁표가 차가운 눈으로 남궁현을 보았다.
남궁현이 이를 악물었다.
“얼마 전에는 주화입마 초기 증상까지 겪었더랍니다. 바람 좀 쐬게 할 겸 데려왔는데, 아무래도 저희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화입마 초기 증상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이해합니다.”
남궁표가 고맙다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충분히 이해하니 너무 나무라지 말았으면 합니다.”
“연 공자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어찌 되었든 분위기가 너무 묘해졌군요. 억지로 함께하는 것보다는, 무림맹에서 다시 만나 차라도 한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그게 좋을 듯합니다.”
두 사람이 연위와 남궁인을 보았다.
두 가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소이다.”
“허허, 면목이 없소.”
“하면 우리가 먼저 가겠소.”
“그러시구려.”
그렇게 연가의 무사들이 속도를 높였다.
한참 거리가 벌어졌을 때, 연위가 연호정에게 말했다.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