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결심의 순간 (7)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져 내렸다.
바람은 매서웠고 기온은 싸늘했다. 해는 떴지만 흩어진 구름에 가려 빛이 번졌다. 매서운 날씨였다.
“이번 해도 열흘이 채 남지 않았군요.”
“그렇구나.”
“하하! 제 폐관이 길기는 길었던 모양입니다. 입관할 때도 추웠는데 나올 때도 겨울이라니요.”
호탕하게 웃는 청년의 모습을 보자면 도무지 남궁세가의 무사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남궁의 성을 이어받은 자였다. 그것도 직계 혈통이며, 심지어 가주인 남궁인의 장자이기도 했다.
남궁표(南宮飄).
약관에 채 이르기도 전에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무공 창궁무애신공(蒼穹無涯神功)을 전수한 희대의 천재다.
천하는 넓고 인재는 많다지만, 남궁표만큼 재능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는 무공 방면에서, 아버지인 남궁인보다 십 년을 앞서 있었다.
남궁세가 역대 인재들을 살펴봐도 남궁표만큼 성취가 빠른 자는 셋을 넘지 않았다.
남궁인은 자신했다. 남궁표는 지닌바 무재(武才)만으로도 세가를 천하제일에 오르도록 만들 만한 천재라고.
“기도가 몹시 정련되었구나.”
“예?”
“엊그제보다, 그리고 어제보다 훨씬 더 정련되었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구나.”
남궁표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성장한 건 아닙니다. 그저 중구난방 제멋대로 흐르던 힘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뿐이지요. 제 성장은 폐관에서 나오기 석 달 전부터 멈춰 있었습니다.”
“허허, 성장이라.”
“제아무리 용을 써도 그 이상을 보기 힘들 것 같더군요. 그래서 나와 버렸습니다.”
누가 들으면 근성 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인은 아니었다.
그는 첫째가 얼마나 무공에 미쳐 있는지 알고 있었다. 녀석이 안 된다면 정말로 안 되는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이 부시는구나.’
말을 타고 있는데도 상체의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허리는 꼿꼿했고 하체는 유연했다.
마치 한 자루 검이 서 있는 듯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라도 막강한 일검을 쳐 낼 수 있는 듯 유연하면서도 강단 넘치는 예기가 일품이었다.
남궁인이 웃으며 말했다.
“네 조부님께서 제대로 가르쳐 주신 모양이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남궁표가 엄살을 떨었다.
엄살은 엄살이되, 그냥 지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필경 상상도 못 할 만큼 혹독한 훈련을 받았으리라.
“네 조부님의 무공은 천하를 논한다. 나는 재능이 없어 그분의 무공을 절반도 깨우치지 못했지만, 너는 필경 전부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남궁표가 고소를 지었다.
“글쎄요. 반드시 그럴 생각이긴 합니다만, 당장은 좀 막막하군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구나.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네가 아니더냐.”
“자신감 하나로 살아가기에는 무도(武道)라는 세상이 너무나 혹독하다는 걸 깨달았을 뿐입니다.”
“허허.”
남궁인은 진정으로 흡족했다.
“그것을 알았다면 되었다. 폐관에 들기 전의 네게 부족했던 건 오만함을 버릴 줄 몰랐던 것이지.”
“그랬습니까?”
“귓등으로 흘릴 것 같아 말해 주지 않았느니라.”
“제가 고집이 좀 세긴 합니다.”
“네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무공이지. 그로 인해 세상이 넓음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네 폐관은 가치가 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남궁인은 남궁표의 오만이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세상에는 오만을 떨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다. 남궁인이 보기에 아들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녀석이었다.
다만, 지나친 오만은 필연코 실수를 만들어 내고, 실수는 자연스레 실패를 끌어오기 마련이다.
무공도, 심성도 크게 성장해서 돌아온 아들은, 이제 소가주(小家主)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남궁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네 조부님의 검은 어디까지 전수하였느냐?”
남궁표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반부 삼식까지요.”
“검형(劍形)의 전반 삼식 말이더냐?”
“예. 그 이상은 필요치도 않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아직 오의(奧義)는커녕 흉내조차 어렵더군요.”
남궁표는 진심으로 씁쓸해했지만 남궁인의 생각은 달랐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게 깨우쳤구나.’
검형의 일식, 많아야 이식 정도나 전수했을 줄 알았다. 한데 전반부 삼식을 전부 전수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혈육이라도 자격이 없는 자에겐 무공을 전하여 주지 않는 분이었다. 아들인 자신도 이제야 검형의 전반부 삼식을 십 년째 연마하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표아를 인정하신 게야.’
흐뭇했다.
그는 자신의 그릇을 잘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를 이끌 정도는 되지만,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자식 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지은 것 같지 않은가.
‘향후 십 년 안에 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흐뭇하게 남궁표를 보던 남궁인은 문득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
남궁인의 얼굴에 형용하기 힘든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여전히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검중제일(劍中第一)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남궁인의 부친. 세상은 그를 검제라 불렀다.
검제(劍帝) 남궁승(南宮丞).
성천십심좌의 일인이자 중원 검맥(劍脈)의 절대강자로 이름을 날린 무적의 고수다.
적어도 검(劍)에 한해서는, 검선(劍仙)을 제외하면 천하제일이 분명할 사람이 남궁승이었다. 어쩌면 지금쯤 그 검선조차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신선제왕(神仙帝王)이라 불리는 이들 간의 무공 수위는 차이가 없다. 다만 검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 실제 검을 맞댄다면 아버지를 넘어서기 힘들 것이다.’
성천십삼좌는 달리 일신이선삼제사왕(一神二仙三帝四王)으로 불리는 열 명의 신선제왕(神仙帝王)과 그들의 바로 아래인 세 명의 삼군(三君)으로 나뉜다.
신선제왕 십인(十人)은 하나하나가 무공의 궁극에 달한 괴물들이었다. 그리고 삼군은 그들보다 반 세대 후에 나타난 고수들로, 무공 수위는 신선제왕보다 확연히 떨어지지만 재능은 오히려 신선제왕 이상이라고 평가받는 초고수들이었다.
말하자면 신선제왕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 명의 고수라 할 수 있고, 삼군은 그들의 바로 아래이자 차기 십대고수로 내정된 이들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남궁승은 바로 그 신선제왕의 일인이었다.
‘이제 슬슬 나오셔도 될 텐데.’
남궁인은 아버지가 다시 세상에 나서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자식의 바람이 아닌 가주로서의 바람이었다. 남궁승이 세상에 나와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면, 남궁세가의 이름은 천하제일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아쉽군.’
남궁인에게 있어 남궁승은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였다. 그나마 손자 교육만큼은 확실히 해 준 것 같으니 다행이다.
“열심히 연마하거라. 이 애비는 재능이 부족해 이제야 삼식의 오의를 깨달았지만, 너는 더 빨리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지요.”
“제왕검형(帝王劍形)…… 그 절대검도만 제대로 잇는다면 천하를 네 검 아래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다.”
웃음으로 화답한 남궁표는 문득 뒤를 바라보았다.
남궁인과 남궁표 바로 뒤에는 남궁현이 말을 몰고 있었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남궁표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어떠하냐?”
“예?”
“내가 한참 폐관 중일 때, 사고를 쳤다고 들었다.”
남궁현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남궁인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이지만 잊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지, 실수했다면 고칠 의지는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남궁표의 눈이 서늘해졌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노파심에 한마디 한다. 한낱 정(情)에 이끌려 배우고 익힌 재주를 까먹지는 말아라.”
“……알고 있습니다.”
가만히 남궁현을 주시하던 남궁표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네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넘치는 혈기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 젊을 때가 아니면 언제 경험해 보겠느냐? 하하!”
남궁현의 입가가 미미하게 떨려 왔다.
남궁인이 말했다.
“나이 먹은 사람처럼 굴지 마라. 너도 아직 젊다.”
“젊지요. 제 나이가 이제 겨우 서른입니다. 하지만 뭐, 혈기가 한풀 꺾인 나이 아니겠습니까.”
남궁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듣자 하니, 제갈세가가 아직도 대답을 미루고 있다고요?”
“시간을 달라고 하더구나.”
남궁표가 고개를 저었다.
“분명한 거절이군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쪽에서 먼저 매파를 보낸 것 자체가 보통 부담이 아니었습니다. 저쪽이라고 그걸 모르지 않을 테니, 이걸 잘 이용하면 제갈세가를 압박할 명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남궁인이 고개를 저었다.
“제아무리 세(勢)가 줄었을지언정 제갈은 제갈이다. 신기제갈(神機諸葛)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쩝.”
“어차피 이번에 보게 될 터이니, 확실히 매듭을 지어 놓는 것이 좋겠지.”
남궁표가 웃음을 터트렸다.
“제갈이 큰 복을 걷어찼음을 깨우쳤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며 대화하는 아버지와 형을 보며 남궁현은 말할 수 없는 패배감에 젖어 들었다.
‘빌어먹을.’
형이 폐관을 깨고 나오자, 아버지의 관심은 모조리 형에게 돌아갔다.
폐관에 들기 전에도 그랬다.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잠시나마 가지고 있던 것을 박탈당한 심정이 좋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갈아연에 관한 민감한 얘기를 당사자 앞에서 주고받다니.
‘언젠가 반드시 넘어서고 말 것이다. 반드시!’
고삐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일검을 내치고 싶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상화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 모양이던데요?”
“그것이 그 아이의 한계라면 어쩔 수 없지.”
“아버지는 정말 냉정하신 분이에요.”
“허허.”
남궁표의 눈이 빛났다.
“연가의 장자라…… 흥미로운 녀석입니다.”
그는 폐관에 든 이 년 동안 벌어졌던 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들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이라면 역시나 벽산호장이라 불리는 연호정에 관한 일이었다.
명가를 상대한 것도 놀라웠지만, 동생들과 생긴 마찰을 가볍게 분쇄한 그 능력이 더 놀라웠다. 그런 것은 무공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연호정은 무공도 강하다고 하였다. 별호가 별호인지라 일룡삼봉에 들진 않았지만, 실력은 이미 그들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자였다.
“호부견자 소리를 들으며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요?”
“그럴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녀석 역시 동생 못지않은 천재란 뜻이다.”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재능 넘치는 인재를 만나는 건 언제 어느 때라도 기대되는 일이지요.”
남궁인의 눈이 커졌다.
“만나 볼 생각이냐?”
“어차피 무림맹으로 올 것 아닙니까? 설마 연가주 홀로 오진 않겠지요.”
남궁인이 혀를 찼다.
“사고는 치지 말거라.”
“저는 한낱 혈기로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는 바보가 아닙니다.”
껄껄껄 웃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보는 남궁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이제 저곳만 넘으면 대별산이로군요. 무림맹이 코앞입니다.”
“그렇구나.”
벌써 공기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사방에서 수많은 무인들이 대별산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쉬지 않고 가 볼까요?”
“그러자꾸나.”
그때였다.
‘……?!’
남궁인과 남궁표의 얼굴이 굳어졌다.
‘고수?’
좌측 멀리 소로(小路)에서 말을 몰고 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선두에 선 무사들이 든 두 개의 깃발이 바람에 따라 나부꼈다.
“……연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