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결심의 순간 (6)
가을이 지나 겨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슬슬…….”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 차가웠다. 이제는 털옷을 껴입어도 뱃속이 서늘했다.
“준비를 해야겠구나.”
먹구름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용우의 눈빛은 모종의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예, 지부장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지부를 잘 부탁하네.”
이건의 눈이 빛났다.
“정녕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와 만나기 전까지 평생을 홀로 고독하게 살아왔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그렇군요.”
“게다가, 내 가문을 뜯어고치겠노라 천명했지만 그렇다고 절강지부가 제 역할을 못 해서는 안 돼. 우리가 잘못하면 많은 사람이 굶을 것이야.”
“…….”
“자네가 잘 맡아 주게.”
“돌아오시기 전까지 어떻게든 잘 운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네의 행정 능력은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나네. 믿어 의심치 않아.”
모용우는 벽에 걸린 보검을 들었다.
‘…….’
검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아련함이 느껴졌다.
“그럼, 나중에 보세.”
“부디 옥체 보중하시길.”
그렇게 홀로 지부를 나선 모용우는 곧장 육로로 발길을 옮겼다.
왜일까? 배를 타고 가는 게 더 빠르다는 건 알지만, 발길이 알아서 육로를 선택했다. 그리고 모용우는 그런 자신의 선택을 굳이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육로로 이동한 지 반 시진 후,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길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모용우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연제(燕弟)?”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호칭 정리에 관해서는 나중에 한 번 더 얘기해 보자고. 오랜만에 들으니 영 아닌 것 같아.”
모용우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몇 번을 만나도 정이 안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번만 봐도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모용우에게 있어 연호정은 철저하게 후자였다. 어쩌면 연호정을 보며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절강에 볼 일이 있었나?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군.”
“내가 절강에 볼 일이 뭐가 있겠어? 댁을 만나는 거 말고 말이야.”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날 보러 온 겐가?”
“그래.”
“하하, 우리의 일차 작전이 성공하면 그때 보자고 해 놓고, 어찌 연락도 없이 찾아왔는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혹여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면 한마디 해 주려고 왔지. 마음을 정했다 해도, 따로 할 말이 있기도 하고.”
“할 말?”
연호정이 모용우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은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늘은 어둡지만,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결의의 기세와 특유의 자상한 분위기는 마주하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해 주는 매력이 있었다.
“모용군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군.”
“그래, 그럴 생각이네.”
“내 생각에 따라 줘서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해야지. 아우를 만나고 내가 얼마나 수동적으로 살아왔는지를 깨달았어. 다 아우 덕분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그저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야. 언제든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지. 스스로에게 더 자신을 가졌으면 좋겠어.”
모용우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어쩐 일로 좋은 얘기만 많이 해 주는가.”
“몇 번 봤다고 어쩐 일이래?”
“하하하!”
연호정의 저 톡 쏘는 듯한 말투가 참으로 정겹다. 모용우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무언가?”
“…….”
“연제?”
그때였다.
투우웅!
마치 북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연호정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짓쳐 들었다.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쩌어어어엉!
거대한 광룡부가 모용우의 보검에 막혔다.
눈이 부신 대응 속도였다. 하지만 연호정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신비로운 몸놀림으로 광룡부에 힘을 모은 연호정이 모용우를 무자비하게 몰아쳤다.
휘리리릭! 쩌저저정!
모용우는 연신 물러서며 연호정의 공격을 막아 냈다.
일격에 바위가 쪼개지고, 파괴적인 경풍에 돌담마저 무너질 만큼 강력한 공격력일진대, 그 모든 공격을 검 한 자루로 막아 내는 모용우의 무공은 가히 신기(神技)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공격이 지속되었을까.
번쩍!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사라졌다?!’
연호정이 일순간 사라져 버렸다. 시야에서 완전히 놓쳐 버린 것이다.
그때,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위!’
모용우가 고개를 들었다.
‘……!!’
무서운 속도로 하강하는 연호정의 몸에는 붉은 화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화려하고 섬뜩한 화기는 연호정의 어깨 뒤에서 장막처럼 펼쳐져 있어, 마치 한 쌍의 날개를 보는 듯했다.
압도적인 화력. 무시무시한 살기.
모용우의 검이 본능적으로 검결에 따라 움직였다.
쩌저저저저정!
엄청난 무공이었다.
저 무거운 중병을 쾌검의 달인처럼 휘두르는데, 자칫 잘못했다가는 검을 놓칠 뻔했다.
우우우우웅!
모용우의 검이 장렬한 검명을 터트렸다.
번쩍!
푸르른 검영(劍影)이 쏟아지는 화기를 포개어 하늘 높이 날려 버렸다.
사락.
연호정의 신형이 모용우의 십 보 앞으로 내려섰다.
‘음.’
모용우는 검을 쥔 손이 은은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충격을 전부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허리가 뻐근하고 무릎이 시큰했다. 빠르고 무거운 공격을 연달아 받아 낸 탓에 신체에 걸린 부담이 극심해진 것이다.
‘굉장한 무공이다.’
연호정과 실제로 붙어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연 대단한 무공이었다.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무공이었다.
이유인즉, 연호정이 전력을 낸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 우형(愚兄)이 아우에게 실수한 거라도 있는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실수한 건 없었는데, 방금 몇 수 교환해 보니 좀 답답하긴 하군.”
“답답하다니? 왜?”
“충분히 반격할 수 있으면서 왜 공격 한 번을 안 하는 거야?”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형이 되어 어찌 아우에게 검을 겨눌 수 있겠는가.”
“쯧.”
“다만, 아우의 무공이 너무 강해서 부득불 검을 뽑을 수밖에 없었네. 나도 죽기는 싫거든.”
가만히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녹슬지는 않은 것 같군.”
“이 우형의 실력이 믿음직스럽지 못할까 봐 그랬는가?”
“제대로 된 승부를 나눠 본 지 얼마나 됐어?”
“실전을 말함인가?”
“그래.”
“글쎄, 기억이 나질 않는군.”
“무인에게 실전만큼 좋은 공부는 없어. 아무리 봐도 검사 특유의 예기가 느껴지지 않길래 냅다 후려쳐 봤는데, 다행히도 어디 가서 당할 실력은 아니구만.”
무공이 강해도 암습 한 번에 저세상으로 가는 게 이 바닥이다.
모용우는 달랐다. 실전을 겪은 지 오래되었지만 감은 아직 쓸 만했다. 실전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무공을 연마하며 살아온 세월이 지금의 모용우를 만든 것이리라.
“아주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아. 괜찮겠어.”
스르릉.
모용우가 착검했다.
“해서, 이 우형에게 할 말은 무엇인가?”
“잘 버티라고. 이왕 모용군의 사람이 될 거라면 확실하게 되라고.”
“그 말을 하려고 온 건 아닌 것 같네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무림맹으로 간다.”
모용우는 깜짝 놀랐다.
“연제도 무림맹에 간다고? 설마 나와 함께할 생각인가?”
“착각도 유분수군.”
“하면?”
연호정이 저 멀리 북서쪽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이 있는 방향이었다.
“신년 초, 무림맹 창설 문제로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수장들이 모일 거야. 본가도 닷새 후에 출발하기로 했어.”
“그럼?”
“그래, 아버지와 함께 무림맹으로 갈 거다.”
모용우의 얼굴에 반가움이 깃들었다.
“그렇다면 또…….”
“미안하지만 우리 가족은 댁네처럼 냉정하지 않아. 화목하다고. 그 넓은 데서 만날 시간이나 있겠어?”
“……끄응.”
“뭐…… 만날 수는 있어도 어지간해선 적으로 마주하게 되겠지.”
웃음 가득했던 모용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적이라…….”
“그래, 적. 물론 당신이 모용군의 밑으로 확실하게 들어가야 적다운 적이라도 되겠지만.”
“그렇군.”
“그래.”
두 사람이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깬 사람은 모용우였다.
“모용본가에서 내게 경고를 한 얘기는 들었지?”
“그래.”
“연제 말이 맞았어. 만일 내가 가주 형님께 직접 갈 생각을 못 했다면, 끊임없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을 거야.”
“모용군은 바보가 아니니까.”
“그리고 그런 형님의 성격과 의도를 읽은 연제 덕에, 나는 또 이렇게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되었네.”
“되지도 않는 칭찬은 또 듣고 싶지 않군.”
“긴장하게.”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긴장하라니.”
“나는 실수가 많은 사람일세.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만, 언제고 자네를 깜짝 놀라게 하는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하네.”
“웃기고 있군. 일하다 보면 실수는 나오게 되어 있어. 그 정도 긴장은 당연히 해야지.”
“다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아주게. 앞으로 난 실수를 해도 연제에게 사과하지 않을 생각이네. 연제에게 미안해할 시간에 앞으로 나아가는 게 더 이득이니까.”
“호오?”
“그래서 미리 사과하네. 미안하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멋진 마음가짐이군. 부디 그 마음에 흔들림이 없기를 바란다.”
모용우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그간 고마웠네. 앞으로도 잘해 보세.”
“나 역시.”
그렇게 모용우는 먼저 길을 떠났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어쩐지 모용우가 걷는 길목만큼은 해가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멀리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이거야 원. 아버지께서 왜 안부 서신을 보내지 않느냐고 화내시는 이유를 알 것 같군. 세 살배기 애를 보는 것 같잖아, 이거.”
그때, 커다란 나무 뒤에서 묵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와는 달리 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녀의 모습은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연 공자보다 열 살이나 많다면서요. 그런데 무슨 애예요.”
“나보다 대여섯 많은 너도 애 같잖아.”
“내가 어딜 봐서 애 같아요?”
“그냥 항상 애 같아, 너는.”
“쳇.”
묵비가 허리춤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들었다.
“이거 먹어요.”
“뭔데?”
“주먹밥이에요.”
“육포 없냐, 육포? 고기 먹고 싶은데.”
“누구보고 애라고요?”
“너도 주먹밥을 목이 막히도록 먹어 봤어야 그런 소릴 못 할 거다. 아니, 근데 며칠 걸리는 길을 가면서 왜 육포를 안 싸고 주먹밥을 싼 거야?”
“밥이 더 맛있어서요.”
“입맛 독특해, 하여간.”
“그래서 안 먹을 거예요?”
“줘. 배고파.”
“먹을 거면서 까탈스럽게 굴기는.”
“너 진짜 많이 컸다.”
“어른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웃고 떠들며 주먹밥을 먹어 치웠다.
* * *
“너 또 어디가?”
“…….”
“저 새끼 저거 갈수록 요령 부리네. 당장 안 튀어와?”
“아, 제발. 전십식(前十式), 후팔식(後八式)! 강룡십팔장(降龍十八掌) 전부 체득했잖아요!”
“체득만 했지 제대로 연마한 건 아니잖아. 아직 멀었어. 당장 들어와.”
“싫어요.”
“너 죽는다, 진짜.”
“사부님! 세상이 격변을 맞이하고 있는데 여기서 죽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당장 나가서 세상 돌아가는 걸 봐야죠!”
“애들이 알아서 정보 물어다 주잖아. 개소리 그만하고 빨랑 튀어와.”
“싫어요. 전 갈 겁니다.”
“가긴 어딜 자꾸 간다고 그래, 이 미친 자식아!”
“무림맹으로 갈 겁니다!”
“네가 거기 가서 뭐 하게!”
“가서 무림맹…… 어라? 근데 사부님은 안 가요?”
“크흠. 안 간다고 연락해 놨다.”
“…….”
“어? 뭐야? 야! 어디가! 빨리 안 튀어와?! 저 새끼 저거, 언제 만리추풍(萬里秋風)을 저 정도로 익혔대? 허! 이제는 나이 먹어서 따라잡지도 못하겠구먼. 저 망할 놈, 돌아오면 앉은뱅이를 만들어 버려야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