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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23화 (123/963)

123화. 결심의 순간 (5)

“가주님. 임시 무림맹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이리 주게.”

서신을 펼쳐 본 연위의 눈이 일렁였다.

이백현이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소림 방장대사의 서신일세.”

“……!”

“내년 초, 신년(新年)에 무림맹 창설 여부를 결정하는 회의를 열자고 하시네. 사흘 안에 결정을 내리자고 하는군.”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무림맹이라.’

무림맹은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미래에 어떤 겁난이 닥칠지 모르니, 백도 무림의 구심점이 될 공간과 지위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불필요하다는 게 연위의 생각이었다. 무림맹이 창설되면 그 유지비가 서너 배 이상 뛸 것이며, 그리되면 중원 자금의 흐름이 바뀐다.

물론 연가는 상관이 없었다. 매달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을 벌어들이지만, 그중 절반 이상을 풀어 민생을 안정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허리띠 더 졸라맨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문제는 군소 문파였다.

백도 무림이라고 어찌 깨끗하기만 하겠는가. 자금을 모으기 위해 그들은 무리할 것이며, 그들이 무리하면 결국 피해를 받는 것은 양민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큰아들,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아버지께서, 지금껏 펼치지 않았던 날개를 마음껏 펼치셔야 할 시기라고도 생각합니다.’

‘맹주 자리는 걸맞은 사람을 위해 비워 놔야 합니다. 다만, 맹주와 함께 천하를 휘어잡을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필요합니다.’

연위는 아들의 발언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호정이 괜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는 큰아들을 훌륭하게 장성한 한 명의 어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자식이기 이전에, 안목 좋은 강호인으로서 연호정은 충분히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었다.

‘무림맹이 설립되었을 때의 여파를 모를 리가 없어. 그런데도 찬성표를 던지라 말한 것은, 내가 보지 못한 뭔가를 본 것이다.’

과연 그게 무엇일까?

‘호정.’

그는 당시 연호정의 얼굴을 떠올렸다.

맑고 깊은 두 눈. 하지만 그때의 아들의 모습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뭔가 급해 보였고, 제 뜻을 관철하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대체 너는 무엇을 본 것이냐.’

답답했다.

아들을 생각해서 이런 부분은 자신에게 맡기라 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민하는 연위의 머릿속에 또다시 큰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언제고 힘이 들 때, 절대 홀로 해결하려 들지 마시고 절 불러 주십시오.’

연위는 고소를 지었다.

‘정작 품어 주겠다고 말한 게 나이거늘, 벌써부터 자식 도움을 받는가.’

어쩔 수 없다.

아들의 말이 옳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지 않은가. 아들의 능력이 그리 뛰어난데, 굳이 홀로 안고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순 연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그 녀석, 또 서신을 안 보내는군.’

이런 일로 화가 나지는 않는다. 화를 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다만 걱정스러웠다. 타지에 나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밥은 제때 챙겨 먹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슬슬 올 때가 되긴 했지.’

그때, 가주실 창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가, 가주님! 대공자님이 돌아왔습니다! 한데……!”

파아악!

연위가 재빨리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순식간에 내원을 지나 외원에 다다른 그의 눈에 마침내 연호정이 보였다.

“……?!”

연위의 표정이 돌변했다.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너, 꼴이 그게 무어냐?”

연호정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상처 곳곳에 피딱지가 앉은 걸 보니 며칠은 된 상처 같았다.

“일단 이놈부터 뇌옥에 수감해 주십시오.”

쿵!

바닥에 떨어진 것은 사십 대로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연위의 눈이 차가워졌다.

“뭣들 하고 있는가? 당장 저자를 뇌옥에 가두거라.”

“예!”

무사들이 서둘러 달려와 정신을 잃은 몽의를 끌고 갔다.

“어찌 된 것이냐?”

“얘기하자면 좀 깁니다.”

연호정이 묵비를 바라보았다.

“넌 체력 좀 어때?”

“나는 괜찮아요. 연 공자가 문제죠.”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의방으로 가자. 아니, 의원을 불러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의원을 불러 주시는 거야 감사하지만,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허어.”

천하의 판관검 연위도 아들의 다친 모습을 보니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연위는 근래 제일 정신없는 순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겠습니다. 묵비.”

“네.”

“아버지께 먼저 설명해 드려.”

“아, 네!”

연위가 어렵다고 뺄 일이 아니었다.

묵비가 연위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연위는 멀어지는 연호정을 바라보다 이내 묵비를 다독였다.

“가주실로 가자꾸나.”

반 시진 후.

가주실에 들른 연호정은 반색하는 묵비의 얼굴을 본체만체했다.

“왔느냐.”

“예.”

“상처는 어떻더냐? 기도가 불안정하고 얼굴이 창백한 것이 내상의 징후로 보인다.”

“아, 워낙 급하게 달려오느라 내공 소모가 극심했습니다. 따로 다친 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아에게 상황은 들었다. 살수가 기습했다고?”

“그렇습니다.”

연위의 안광이 일순 차가워졌다.

“설마 모용세가인 것이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살수들에게 뭔가를 캐내 보려고 해도 워낙 죽자 살자 덤벼드는 탓에 섬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면 뇌옥에 갇힌 그 자는?”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오면서 이런저런 협박을 해 봤는데, 입이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더군요.”

“…….”

“훈련으로 단련된 게 아닙니다. 천성이 그래요. 어지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놔두고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잡아 오긴 했습니다.”

“이런…….”

“혹시라도 또 저를 노리는 자가 있을지 몰라 무리해서 달려왔습니다.”

“잘했다. 좋은 판단이었어.”

확실히 아들은 상황을 읽는 능력이 뛰어났다. 아들이 겪은 고생을 떠나, 피가 튀는 실전에서 저런 신속한 판단을 내린 것이 대견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모용군이겠지요.”

연호정은 일부러 모용세가가 아니라 모용군이라는 말을 썼다.

츠츠츠.

연위의 몸에서 기어이 살기가 일었다.

“그 작자가 정녕…….”

묵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연위의 살기는 결코 과격하지 않았다. 고요하고 서늘했다. 그 기묘한 살기가 자연스레 체내로 파고들어 심맥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 같았다.

연호정이 헛기침했다.

“아버지.”

“음? 아…….”

곧바로 살기를 죽인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비아, 미안하구나.”

“아, 아니에요, 아버님.”

“너도 고생이 많았을 텐데, 내 못난 모습을 보였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 연 공자가 처리했는걸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웃기지 마. 그 무자비한 사격술이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목숨의 빚을 졌어.”

“아, 아니에요. 진짜 아닌데.”

“일단 들어가서 좀 쉬는 게 어때? 고생 많았을 텐데.”

묵비가 은근슬쩍 연위의 눈치를 보았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너무 오래 잡아 둔 것 같구나. 이만 들어가서 쉬거라.”

“아, 그럼 그럴까요?”

어기적거리며 일어난 묵비를 향해 연위가 재차 입을 열었다.

“비야.”

“네, 아버님.”

“다시 한번 고맙다.”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연위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저리 고맙다고 말해 주는 어른이라서 본인이 더 고마웠다.

“아닙니다, 아버님. 그럼 전 먼저 들어가 볼게요.”

“그래.”

묵비가 나가자 연호정이 자리에 앉았다.

연위의 눈빛이 다시 살벌해졌다.

“모용군일 확률이 높다고?”

예와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위의 입에서 모용가주가 아닌 모용군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왔다.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말씀드렸듯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위협은 언제든, 어디서든 가해질 수 있는 까닭입니다. 모용군일 확률은 높지만, 속단해서도 안 됩니다.”

“…….”

“문제는 살수들입니다. 그들은 고도로 훈련된 암살자들이었습니다. 흑도 무림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실력 좋은 살수라도 서슴없이 도구로 쓸 수 있을 정도의 집단일 확률이 높습니다.”

연위의 눈이 커졌다.

연호정은 고심하듯 턱을 쓰다듬었다.

“살수들의 움직임이나 살법(殺法)의 독특함을 봤을 때, 남방과 북방의 수법이 많이 섞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물길이 많은 호북에서 활동하는 살수 조직인 듯한데…….”

말을 하던 연호정은 순간 움찔했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묘했던 것이다.

연호정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현재로서는 그들이 속한 조직을 파악해 내긴 힘듭니다. 개방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어려워요.”

“……어찌 그들에 대해 그리 잘 아느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냥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습니다.”

흑도 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이들 중 대다수가 암살자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물며 흑도 무림의 정점에서 이름을 날린 연호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실제로 그들의 특성과 수법을 따와 흑제성 산하의 조직을 따로 만들지 않았던가.

“다만, 제가 아니라 연가를 노린 것이라면 문제가 더 커집니다.”

“뭐라?”

“저를 증오하는 자라면 상관없지만, 연가를 증오하는 자라면 얘기가 달라지지요. 지평과 함께 오려고 했지만, 괜히 살수들의 흔적이 그쪽으로 가는 걸 원치 않았기에 최대한 빨리 왔습니다.”

“하면?”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예.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혹시 모를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연지평에겐 비응대 몇 개조를 함께 딸려 보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제가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만일 표적이 저 하나라면 괜히 지평까지 말려들게 되는 꼴이니까요.”

“네 말이 옳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창응대주의 봉인을 풀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비천검사(飛天劍士)들을 푸는 게 좋을 듯합니다.”

비천검사는 연가가 보유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었다. 연씨 본가에서 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는 검귀(劍鬼)들로, 그들에게는 특별히 연가의 진신절기들이 투입되었다.

“그래도 된다마는, 현재 비천검사들은 큰 고비를 넘는 중이다. 중요한 순간에 건드릴 필요는 없지.”

“하지만 아버지.”

“내가 직접 가겠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버지께서요?”

“여럿을 대동해서 가느니, 나 혼자 가는 것이 낫다.”

연위의 무공은 육대세가의 가주 중에서도 수위를 다툰다. 어지간한 살수 조직이라도 손쉽게 격파가 가능할 것이며, 설령 싸우지 않더라도 눈 깜짝할 새에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하면 가문은…….”

“네가 맡아라.”

“예?”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장검을 뽑아 요대에 찼다.

“애비가 없을 때는 네가 가장이다. 애비가 돌아올 때까지, 본가는 네가 지켜라.”

연위가 몸을 돌렸다.

“사흘 안에 돌아오마.”

연위는 약속을 지켰다.

연지평을 등에 업고 사흘 만에 연가로 돌아온 연위는 출발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부끼는 옷자락에 먼지 한 톨 안 묻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판관검, 판관대협. 강동제일고수 벽산연가의 가주.

초절정에 이른 무시무시한 신법을 감당치 못한 그의 신발 밑창은 전부 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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