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22화 (122/963)

122화. 결심의 순간 (4)

‘연 공자!’

묵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전투지에서 이십여 장 떨어진 거리의 나무 정상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딱히 은신술은 배우지 않았지만 은신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궁사(弓師)란 그런 것이다. 저격(狙擊)을 위해서는 전문적인 은, 엄폐 능력이 필수였다.

스르르.

어느새 홍련궁의 시위에 화살 한 대를 대었다.

그녀는 연호정의 전음을 떠올렸다.

‘살수가 다가 아니야. 고수가 있다. 너의 화살은 그 고수를 위해서 아껴 둬야 할 거야.’

고수라니? 그 정도의 기척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에, 연호정 이상의 기도를 뿜어내고 있는 한 명의 검사가 보였다.

‘굉장해!’

묵비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어쩌면 연 공자보다 강할지도 몰라. 게다가 연 공자는 살수들과의 싸움으로 내공과 체력을 꽤 소모했어.’

위험하다.

고수들 간의 싸움은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고들 한다. 그렇게 치자면, 설령 살수들이 참전하지 않는 일대일 대결이라도 위험했다.

‘절대 그럴 수 없어.’

묵비는 만전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검이 연호정을 위협한다면, 몇 발의 화살이라도 갈겨 주리라.

* * *

몽의는 연호정의 몸을 살폈다.

‘잘 단련됐군.’

호리호리한 겉모습과는 달리 신체의 균형이 이상적이다. 전신 근육도 어디 하나 모자람 없이 고루 발달해 있었다.

게다가 저 도끼.

‘신병(神兵).’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대단한 병기였다. 검을 주무기로 쓰는 몽의조차 한순간 탐심이 일 정도였다.

“과연.”

몽의의 눈가가 점차 어두워졌다.

“대단한 강자라고 들었다. 명가의 무력을 홀로 받아 냈으니, 당연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놈?’

칙칙한 눈가가 묘하게 거슬린다.

피 냄새가 짙은 놈이었다. 전신에 비릿한 혈향이 깊게도 뱄다.

‘하지만 놈은 정공(正功)을 익혔어. 그것도 굉장한 수준의.’

스르릉.

몽의가 등 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독특했다. 삼 척을 넘어 사 척에 이르는 장검이었는데, 검신(劍身)의 폭은 여느 장검의 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더 길고 날카로워 보였다. 마치 날을 세운 송곳을 보는 듯했다.

‘협봉검과 비슷하군.’

협봉검은 검신의 날을 죽이고 동그랗게 만든 원통형 검이었다. 찌르기의 위력을 극한까지 살린 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 협봉검에 날을 세운 것이 바로 몽의의 검이었다.

츠츠츠츠츠.

몽의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강하다.’

지금 자신의 육체 능력과 내공을 뛰어넘는 자였다.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연배에 놀라운 무공을 쌓았다. 초절정고수는 아니지만, 소위 절정고수라 불리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선두에 선 자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몽의가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너희는 쓸모가 없겠다. 이만 가라.”

살수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의 눈은 혼란으로 물들어 있었다. 목표물은 연호정인데, 의뢰인이 가라고 한다. 그럼 가는 게 맞다.

하지만 의뢰인은 자신들의 수장을 죽였다. 아군이 공격당했으니 죽여야 마땅한데, 그것이 도통 쉽지 않아 보였다.

몽의가 고개를 저었다.

“이래서 너희는 도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때였다.

연호정은 몽의의 검이 잔상처럼 흩어지는 것을 포착했다.

퍼버버버버벅!

몽의와 가까이 선 살수 십여 명의 미간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몽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어차피 너희는 나를 감당하지 못해. 수장도 잃었으니 체계적인 공격도 못 할 것이다.”

“…….”

“그만 꺼져.”

스스슥.

살수들이 물러났다. 더는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몽의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공기가 좋군. 더러운 잡것들의 피 냄새지만…… 이 전장의 공기가 항상 그리웠어.”

“너, 뭐냐?”

몽의가 연호정을 보았다.

우우우웅.

광룡부에 백색의 진기가 아른거렸다. 웅혼하고도 강인한 기파를 뿜어내는 기운이었다.

“점창파의 검사가 왜 날 노리는 거지?”

순간 몽의의 눈이 흔들렸다.

“너, 나를 알고 있는 거냐?”

“모르기가 더 힘들지.”

연호정이 턱으로 그의 검을 가리켰다.

“방금 네가 구사했던 검법, 점창의 사일검법(射日劍法)이잖아.”

사일검법.

점창파 최고, 최강의 검법으로 평가받는 무공이며, 한때는 천하제일쾌검(天下第一快劍)으로 불리던 전설적인 절학이었다.

몽의가 저런 특수한 검을 든 것은 사일검법이 찌르기 위주의 검법이기 때문이다. 사일검법은 한 초식을 제외한 모든 초식이 자격(刺擊)이었다.

“사일검법을 알아보다니…… 당대 점창에서도 사장된 검법을.”

그럴 리가 없다.

연호정이 사일검법을 알아본 것은 사음교의 난 당시 점창의 수뇌부들이 구사했기 때문이다. 점창파가 사일검법을 잃었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이놈이 돌려준 걸까?’

우우웅.

몽의의 눈에 칙칙한 살기가 일었다.

사람을 수도 없이 죽여 본 살인마의 눈빛이었다.

“네놈은 살려 둬선 안 되겠구나.”

“어차피 죽이러 왔으면서 웃기지도 않는.”

“일부러 살수를 보냈다. 네가 내 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놈인지 알아보고 싶었지.”

“…….”

“예상 이상이구나. 충분히 내 검을 받아 낼 자격이 있다. 이 정도 실력자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살수를 끌어들이지 말 걸 그랬다.”

연호정이 묘한 눈으로 몽의를 보았다.

몽의의 볼이 꿈틀거렸다. 연호정의 눈빛은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야.”

“……예의라곤 전혀 없는 놈이로구나.”

“너, 뒤에 누구야?”

“뭐?”

“네놈 뒤에 있는 게 누구냐고. 명가의 숨은 잔당이냐? 아니면 모용군? 남궁세가는 아닌 것 같은데.”

몽의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알 것 없다.”

“그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싸우면 된다는 거지?”

몽의가 비웃음을 흘렸다.

“싸움이 되리라 보느냐?”

파아아아앙!

연호정의 몸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몽의는 깜짝 놀랐다.

상대의 기습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이만큼 빠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수십 근은 나갈 법한 중병을 들고 있지 않은가?

콰앙!

도끼를 들었으면서 권법으로 공격했다. 이것도 허를 찌르는 일격이었다.

‘빠르다! 그러나…….’

파아악!

연호정이 팔을 뒤로 뺐다.

그의 팔뚝에는 기다란 검상이 나 있었다. 몽의의 장검에 베인 것이다.

‘빨라.’

사일검법을 펼친 것도 아닌데도 빠르다. 애초에 무공 자체가 쾌(快)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 둔중한 병기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겠다.”

순간 몽의의 검이 수십 개로 갈라졌다.

연호정의 안광이 번뜩였다.

쩌저저저정!

사 척 장검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연호정의 사혈을 노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이번 역시 사일검법을 구사한 게 아닌데도 절정고수의 동체 시력을 한참이나 넘어선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쩌저저정!

광룡부의 부신에서 수십 개의 불똥이 튀다가 사라졌다.

도끼날에 남는 충격이 상당했다. 본디 쾌검에는 무게가 실리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몽의의 검은 충분한 중량까지 실려 있었다.

하지만.

쿠웅!

백호군림의 일 보를 밟은 연호정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광룡부를 쳐올렸다.

몽의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렸다.

‘어리석은 놈.’

중병치고는 빠르다. 하지만 도끼날이 자신에게 와 닿기도 전에 칼질 열 번은 먹일 수 있다.

몽의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파바바바박!

연호정의 몸 곳곳에서 피가 튀었다. 몽의의 장검이 베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

몽의가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놈?’

어느새 도끼가 바지 밑단을 휩쓸고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

‘왜 베이질 않지?’

베긴 벴다. 하지만 그가 벤 것은 피육뿐이었다.

검상이 많은 만큼 출혈량이 상당했지만, 치명적인 일격은 하나도 가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놈 몸은 도검불침이라도 되는 것인가?!’

그때였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순간, 그는 연호정의 신체 전반에 흐르고 있는 반투명한 흑색 기운을 볼 수 있었다.

‘저게 뭐지?’

몽의로서는 그것이 북방흑제(北方黑帝)의 현무기(玄武氣)라는 걸 알 수 없었다.

오싹!

어느새 도끼가 가랑이에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부아아아앙!

몽의가 훌쩍 뒤로 물러났다. 그 잠깐 새에 다섯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굉장한 속도였다.

번쩍!

거대한 흙먼지와 함께 상단으로 치솟은 광룡부가 찬란한 백색 기운을 터트렸다.

콰아앙!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일찍이 본 적이 드문 강공이었다. 곧바로 일곱 걸음을 더 피하지 않았다면 도끼가 불러낸 경풍(勁風)에 휘말려 살점이 뜯겨 날아갈 뻔했다.

‘안 되겠군.’

허옇게 일어난 흙먼지 속, 연호정의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몽의의 자세가 낮아졌다.

‘일검에 끝내 주지.’

척.

후방으로 검을 거둔 몽의. 그의 장검에서 햇살처럼 찬란한 광채가 뿜어졌다.

사일검법이었다.

그때, 연호정의 그림자가 팔을 드는 것이 보였다.

‘늦었어. 죽어라!’

몽의가 검을 휘둘렀다.

번쩍!

빛살과도 같은 쾌검이 흙먼지를 가르고 연호정의 심장으로 쏘아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쾌검이었다.

그때였다.

‘……?!’

몽의의 시야에 사선을 그리며 쏘아진 화살 세 발이 보였다.

쩌정!

“큭!”

한 발은 빗나가고 두 발이 검신에 맞았다.

측면에서 날아온 화살에는 엄청난 내공이 깃들어 있었다. 몽의의 쾌검이 연호정의 허벅지를 베고 지나갔다.

순간, 흙먼지를 가른 묵직한 흑색의 창대가 몽의의 시야로 확대되듯 빨려 들어왔다.

빠각!

“크아아악!”

몽의가 뒤로 훨훨 날아갔다.

터어엉!

곧장 끝을 보려던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나무를 박찬 몽의가 다시 한번 자신에게 쏘아진 것이다.

콧대가 뭉개지고 앞니가 다 부러졌는데도 공격을 가한다. 굉장한 인내심이었다.

연호정이 속으로 혀를 찼다.

‘잘 가라, 인마.’

후욱!

연호정이 그대로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자 몽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퍼버벅!

“컥!”

몽의가 그대로 땅을 굴렀다.

그의 몸엔 화살 세 대가 박혀 있었다. 좌측 어깨, 좌측 허벅지, 그리고 좌측 옆구리였다.

파아아악!

어느새 묵비가 전권에 진입했다.

“이익!”

지독한 고통을 무시한 채 일어서려던 몽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던 여인이 화살도 없이 시위를 거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티이잉! 퍼억!

몽의가 피를 토하며 엎어졌다.

파아앙!

묵비가 순식간에 몽의의 양다리를 밟고 서서 홍련궁의 시위를 당겼다.

초근거리 연환 사격.

퍼버버벅!

다섯 발의 무영탄(無影彈)이 몽의의 등판에 고스란히 작렬했다. 무자비한 공격이었다.

부르르 떨던 몽의가 이내 눈을 감았다. 심각한 내상으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후우, 겨우 잡았네요.”

“…….”

“왜 그렇게 봐요?”

“너, 엄청 과격하구나?”

“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살벌하기 짝이 없군.”

“그나저나, 이 사람은 어떻게 하죠?”

“들고 가야 해. 물어볼 게 있어.”

“좋아요.”

“내가 들 거야.”

“다쳤잖아요?”

“적이 남았잖아.”

“네?”

연호정이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흩어진 늑대들이 호시탐탐 이쪽을 노리고 있어.”

“아!”

“지평은 찾지 말자. 혹시라도 싸움에 끼어들어선 안 돼.”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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