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결심의 순간 (3)
“엇?!”
“음? 왜 그러느냐?”
“헤헤, 아닙니다, 어르신. 잠깐 등이 따끔해서요.”
“허허, 벌레가 문 것인가?”
“그런가 봐요.”
연지평이 등을, 정확히는 목덜미 밑을 주물렀다.
‘뭐지? 정말 벌레인가?’
날카로운 뭔가가 쑥 찌르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신경은 쓰였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은 벌레가 문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흐음, 슬슬 꺼내 볼까.”
치이이익!
차가운 산바람을 받자 붉게 달아오른 검의 표면이 점점 어두워졌다.
연지평이 입을 쩍 벌렸다.
“대, 대단해요.”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몇 번이나 보지 않았느냐.”
“그래도요! 으, 뜨거워라.”
“물러나 있거라.”
노인이 달아오른 검을 거대한 물항아리에 집어넣었다.
치이이이이익!
일순간 회백색 연기가 주변 전체로 번졌다.
엄청난 열기와 습도였다. 항아리를 채웠던 물이 순식간에 끓어올랐다.
“허허, 한 번만 더 두들기면 되겠구먼.”
“와아.”
“그리 신기하냐?”
“예! 엄청 신기해요. 저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요.”
꽤 주제넘은 발언이었지만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연지평의 당돌한 목소리는 순수함으로 가득했다. 그것이 노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장인의 길로 들어설 생각이라면 언제든 찾아오너라. 내 너의 기본기를 닦아 주마.”
“헤헤, 아마 그건 무리일 것 같아요.”
“허허허!”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네요. 검 한 자루 만드는 데 이렇게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줄 몰랐어요.”
노인이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세상 어떤 일이든 정성을 쏟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려운 법이다. 무공도 그렇지 않더냐?”
“맞아요.”
“그러니 잘 다뤄 주거라. 앞으로 너와 함께 거친 세파를 이겨 낼 친구이니라.”
“물론이에요!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정말 어르신의 검을 받아도 되는지. 나이도 어린데.”
“떽! 이놈아, 장인도 그러하듯 무인 역시 나이를 따져서는 안 되는 법이다. 검을 쥘 자격이 있으면 쥐는 것이다. 너는 내 검을 받을 자격이 충분해.”
“히히.”
“한 점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좋은 철로 만든 검이다. 네가 얼마나 아껴 주느냐에 따라 검의 위력도 달라지겠지.”
“…….”
“음? 왜 그러느냐?”
“…….”
“평아?”
고개를 돌려 건너편 산봉우리를 보는 연지평의 눈이 깊어졌다.
노인은 내심 놀랐다.
맑고 깊은 눈에 은은한 예기가 감돌고 있다. 그간 연지평이 보여 준 적 없는 눈빛이었다.
‘실로 검객의 눈이로고.’
잠시 후, 연지평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느꼈나 봐요.”
“허허허.”
“다음은 뭐예요? 어서 다음 작업을 보고 싶어요!”
“다시 한번 두들겨야지. 아마 이번으로 끝나지 싶다.”
땅! 따앙!
망치가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언뜻 전장의 북소리처럼 들릴 만큼 웅장했다.
* * *
퍼어어억!
휘두르는 광룡부 일격에 살수 둘의 몸통이 반으로 찢겨 날아갔다.
쾅!
광룡부를 다시 수습하지 않는다. 휘두르면 휘두른 대로 놔둔 채 좌측 일권(一拳)으로 멀찍이 떨어진 살수의 머리를 박살 냈다.
도끼질 한 번, 주먹질 한 번에 살수 셋이 목숨을 잃었다.
투우웅!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살수 셋을 잃자마자 전방 대열의 살수들이 뒤로 물러났다.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제법이군.’
살수들이 진법을 펼친다?
무림을 아는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얘기지만, 살수들의 진법 공격은 전투 부대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위협적이다.
바로 기질 때문이다.
파바바바박!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불꽃이 튀기는 것 같았다.
‘이런…….’
횡진(橫陣)으로 전진하는 살수들.
속도는 대단할 게 없지만, 문제는 그 뒤에 있는 병력이었다.
살기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과장되게 발산하는 데에 능한 것이 암살자다. 증폭과 수렴, 응축과 발산이 자유자재라는 것이다.
그런 전문 살수 이백 명이 제각기 난잡한 살기를 발하니 시야가 다 어지러워질 정도였다.
연호정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 정도면 최고 정예라 봐도 좋겠어.’
과거 명가가 보낸 청랑이라는 놈들과 붙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살인의 전문가라고 치켜세우지만, 그들의 힘은 상대의 심리를 뒤흔드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 역시 대단한 힘이지만, 그들의 힘은 한데 집중되지 않았다. 워낙에 중구난방이니, 흔들리지 않는 정심과 효율적인 전략을 준비하면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이들은 달랐다.
파파파파팡!
후방에 도열한 살수들이 쏘아 낸 암기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하나같이 손톱만큼 작은 크기다. 하지만 그 수가 수백을 웃돌았다.
연호정이 강인한 일 보(一步)를 밟았다.
콰앙!
바닥에 쌓인 낙엽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전방 횡진의 대열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파아아악!
백호군림보로 돌진한 연호정이 곧장 호왕구벽세를 펼쳤다.
후웅! 퍼억!
둘은 피했지만 셋은 피하지 못했다. 시뻘건 피 보라가 허공을 수놓았다.
그때, 연호정은 전방 살수들이 길쭉한 통을 입으로 가져다 대는 것을 보았다.
파바바바바박!
수십 개의 독침이 연호정에게 쏘아졌다.
파앙!
신법을 연마해 두니 회피가 여유롭다. 하늘 높이 솟구친 연호정이 후방에 도열한 살수들을 포착했다.
‘많군.’
멀리서 볼 때와 가까이서 볼 때의 차이는 상당하다.
우글거리는 암살자들이 자신을 노려보며 제각기 병기를 뽑아 들고 있다. 간담이 다 서늘해지는 광경이었다.
‘이거야 원…….’
도대체 살수를 보낸 놈은 누굴까? 이 살수들은 어디 출신일까?
그런 의문은 다 버렸다.
암살자들의 집단 공격술, 공성살진을 마주한 연호정은 가슴 깊숙이 숨겨 놓은 흑암제로서의 본능이 꿈틀거리는 걸 느꼈다.
파아아앙!
연호정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하강했다.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이었다. 내공을 이용해 무게를 늘리는 고차원적인 기공 조예였다.
놀랍게도, 연호정이 내려선 곳은 전방 횡진의 뒤쪽이었다.
암살자들의 한복판.
콰앙!
거대한 도끼를 들고 지상으로 내려온 흉장이 폭풍 같은 맹격을 휘둘렀다.
퍼퍼퍼퍽!
연호정 주변에 선 살수 십여 명이 갈기갈기 찢겨 날아갔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그간 연마한 연호정 특유의 무공에 더해 흑암제의 살기까지 일깨웠다. 일대일 결전이든 일대 다의 난전이든, 이젠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으아압!”
퍼억! 퍼억!
팔십 근이 넘는 광룡부가 종횡으로 움직이며 살수들의 몸을 걸레처럼 찢어 놓았다.
우우우우웅!
푸른색 벽라진기가 신체를 강건케 하고, 서방대제 백호의 기예가 살수들을 휩쓸어 버렸다.
워낙 빠르고 강력한 공격의 연속이었다. 허를 찔린 살수들의 몸이 무차별로 박살 나고 있었다. 잠깐 사이, 무려 사십여 명의 사망자가 나고야 말았다.
파바바박!
물론 살수들이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다.
연호정이라는 목표물의 실력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대단하긴 했지만, 결국 우리 안에 갇힌 짐승일 뿐이었다.
살수들이 제각기 병기를 휘둘렀다.
쐐애애애액!
전후좌우,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이다.
피할 공간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허공으로 피한다면 뛰어오르는 순간 대비하고 있던 살수들이 암기를 쏘아 댈 것이다.
‘재미있군.’
오른손에 든 광룡부, 주먹을 쥔 좌권(左拳) 모두에 백호기가 잔뜩 집약되었다.
부우우웅! 쩌저저저정!
회전하며 휘몰아치는 발경 여파에 살수들의 공격 대부분이 어긋나 버렸다.
피슉! 서걱!
연호정의 몸에도 서너 개의 검상이 새겨졌다.
깊지는 않지만, 문제는 칼날에 묻은 독이었다. 살수들은 어떤 병기라도 독을 묻혀 놓는다. 비싼 극독은 무리지만, 마비독(痲痹毒)은 필수로 묻혀 놓기 마련이었다.
암살자들의 눈이 살광을 뿜었다.
잡았다.
상처 하나만 내면 끝이다. 강력한 마비독이 상대의 움직임을 무디게 만들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콰앙!
적색의 화기(火氣)가 무시무시한 기파를 만들어 냈다.
붉은 기운에 휩싸인 연호정의 신형이 일순 벼락처럼 빨라졌다.
퍼버벅! 콰아앙!
폭음을 내는 천살(天殺)의 질주였다. 타오르는 주작기에 극속의 혈익휘천(血翼揮天)이 진법의 한 축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촤아아악!
연신 터져 나가는 살점과 하늘을 수놓는 피의 그물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살수들의 공격이 몇 번이고 연호정의 몸에 상처를 냈지만, 그는 지치는 법이 없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움직임에 탄력을 받았다.
그때, 후방에 선 한 살수가 외쳤다.
“산개(散開)!”
파아아악!
살수들이 무서운 속도로 흩어졌다.
공성살진을 포기하고 일단 후퇴부터 한다. 난전(亂戰)으로 죽여 없애기에는 상대의 기량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연호정의 모습은 필마단기(匹馬單騎)로 대군을 뚫고 생존한 장수와도 같았다. 몸 곳곳에 암기가 박혀 있었고, 검상도 십여 개나 입었다.
화아아악!
입가의 피를 닦아 내며 살기를 뿜어내는 연호정의 기파는 거대한 용권풍과 같았다.
살수들의 대장, 사극(死極)은 혀를 내둘렀다.
‘뭐가 저렇게 강한 거지?!’
딱히 유리한 지형도 아니요, 오히려 살수들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정면 승부를 감행했는데 그 잠깐 새에 무려 칠십여 명이나 되는 살수들을 잃었다.
너무 놀라운 광경이라 그답지 않게 산개 명령을 내리는 것도 늦어졌다. 그만큼 연호정의 무공이 인상 깊었다는 뜻이었다.
‘저런 괴물 같은 놈을 상대로 공성살진을 펼치라 했단 말인가? 완전히 미쳤군.’
사극이 내심 이를 갈 때, 연호정의 입이 열렸다.
“순순히 말해 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물어는 봐야겠다. 퉤!”
피 섞인 침을 뱉은 연호정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사극을 노려보았다.
사극이 움찔했다.
“누가 사주했냐?”
놀라운 발언이었다.
너희는 누구냐, 어디서 왔느냐, 왜 날 죽이려 하느냐 등등의 말은 들어 봤지만 누가 사주했냐는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연호정에게 이 정도 일은 흔하다는 뜻이리라. 말하자면 이런 상황을 수도 없이 겪어 본 대(對) 암살자전(暗殺者戰)의 달인이라 할 수 있었다.
사극이 입을 열었다.
“함께 있던 계집은 어디로 갔지?”
“알아서 뭐 하시게.”
“……하긴, 상관없겠지.”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 나였군.’
이놈들은 자신만 잡으면 되는 것이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자신이 목표물이라는 걸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기다려라, 묵비.’
묵비는 사극이 생각하는 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내가 신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해. 넌 철저하게 숨어 있어야 한다.’
공성살진을 상대할 때, 정면 돌파는 무모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무모함을 택했다. 머리 한구석을 자극하는 위화감 때문이었다.
그때, 사극의 눈이 반짝였다.
동시에 연호정의 주먹이 후방으로 휘둘러졌다.
퍼어억!
돌풍처럼 쏘아지는 백색의 권격이 살수 하나의 머리통을 그대로 날려 버렸다. 빈틈을 보인 연호정의 등에 독침을 날리려 했던 살수였다.
사극은 침음했다.
‘제기랄, 이 정도로 강하다는 말은 없었잖아!’
무공, 감각, 전투 기술 등등 모든 부문에서 뛰어난 괴물 같은 놈이었다.
‘안 되겠어. 일단은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본 뒤, 야밤의 암살로 공략해야겠다.’
어차피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굳이 공성살진을 부탁했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되어서야 별수 없는 일이었다.
사극이 손을 들며 외쳤다.
“산 밑으로 내려가라! 밤에 다시 공격…….”
퍼어억!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사극의 눈이 흐릿해진다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가슴에는 동그란 구멍 하나가 뚫려 있었다.
“의뢰 내용을 들었으면 마땅히 그에 따라야지. 돈도 다 치렀는데.”
후방 살수들의 뒤쪽.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여유롭게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 저놈이었다.’
전술을 짤 새도 없었지만, 스스로를 미끼 삼아 정면승부를 감행했던 이유가 저기에 있었다.
“하지만…… 뭐, 더는 무리겠군.”
연호정이 물었다.
“너냐?”
중년의 사내, 몽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