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모욕의 대가 (6)
연호정이 묵비를 힐끔 내려보았다.
“먼 길 오신 분께 좋은 차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일행이 이 모양이라 안 되겠어.”
모용우가 묵비에게 시선을 돌렸다.
츠츠츠.
묵비의 몸에서 회색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모용우의 눈이 번쩍였다.
‘강자!’
얼핏 봐도 자신보다 한참 어린 듯한데, 품고 있는 내공은 대문파의 수장만큼이나 엄청났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굉장한 분이구려.”
“잠재력 하나만큼은 천하를 논해도 될 정도지.”
“굳이 잠재력 운운하지 않아도, 지금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것 아니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연배, 수련 기간, 경험. 다 중요하지만 더 강해지지 않으면 의미 없지.”
“너무 극단적인 발언 같소.”
“이보다 더 극단적이더라도 강해질 수만 있다면 상관없어.”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잠시 침묵이 일었다.
침묵을 깬 것은 연호정이었다.
“서 있기 좀 그런데, 거기 앉지.”
“괜찮소.”
“그럼 그러시든가.”
연호정은 그 자리에 철퍽 주저앉았다.
모용우는 그런 연호정의 모습에서 창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거대한 새의 환상을 보았다.
모용우가 헛기침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호구 조사 들어가는 건가?”
“실제로 궁금해서 그렇소. 겉으로 보기에는 약관 언저리인 듯싶은데, 언행은 도저히 그래 보이질 않아서 말이오.”
“보이는 그대로의 나이다. 댁보다 십 년은 더 늦게 태어났지.”
“십 년…….”
모용우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이 어리다? 그 말인즉슨 연호정이나 모용연화나 비슷한 연배란 뜻이다.
같은 연배지만 둘은 너무 달랐다. 한 사람은 훌륭한 재능을 갖고도 제 아비와 함께 가문을 병들게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대종사의 영혼으로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왠지 분하군.”
“뭐가?”
“나는 당신 나이에 뭐 했나 모르겠소.”
“뭐 하긴. 냉혹무비한 가문의 폭압에 버티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었겠지.”
“……참으로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모용우가 장포를 펄럭였다.
“안 되겠소. 역시 앉는 게 편하군.”
“그러게, 앉으라니까.”
자리에 앉은 모용우가 연호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소.”
“말해.”
“앞으로 우리가 만날 일이 많을 것 같소. 좋은 일로든, 나쁜 일로든.”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느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겠다.
‘결단을 내렸군.’
그렇다. 모용우는 비로소 마음을 먹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홀가분함과 강한 긴장이 그가 확신했음을 증명한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여유가 엿보이니, 과연 사람 하나는 잘 골랐다 싶었다.
“그런데?”
“나는 당신과 거래를 하겠다고 했소. 기억하시오?”
“기억하지.”
“그래, 거래. 하지만 당신도 짐작했듯, 아직 당신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소.”
“그거야 당연한 거고.”
“다만 이번 도움으로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었소.”
재미있는 남자다.
얻은 게 아니라 깨우쳤단다. 모용우다운 발언이었다.
“당신은 무역 연합 쪽 일을 단번에 휘어잡았소. 하지만 나는 그것이 고맙진 않소.”
“…….”
“내가 당신에게 고마운 것은, 이번 사태로 인해 우유부단했던 과거의 나를 혐오하도록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 없어. 사람은 저마다 처한 환경이 달라. 당신은 당신이 처한 상황에서 힘겨운 싸움을 했다. 누구도 그것이 우유부단하다고 평가하지 않아.”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해 주니 참으로 고맙소만, 그래도 그래선 안 되었소.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더 빨리 눈을 떠야 했소.”
“중요한 건 현재야. 후회할 시간에 현재에 집중해서, 미래를 손에 거머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좋아.”
“맞는 말이오. 다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요.”
모용우가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진심으로.”
가만히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심은 잘 받아 두지.”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군.”
“뭐가?”
“한 번 만나 본 적 없는 사람과 대화 몇 번에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는 지금의 내 상황이 신기하오.”
“별 신기한 것도 많다.”
“그러니 부탁 하나만 합시다.”
“그래도, 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과 좀 더 편하게 지내고 싶소.”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뭔 말이야? 말을 직설적으로 해.”
모용우가 헛기침했다.
“그게…….”
“어엉?”
“……처음 본 사이에 호형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더 가까웠으면 해서 하는 말이오. 호칭이라도 어떻게 정리를 했으면 싶소.”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게 뭐 중요한가?”
“중요하오.”
“거참.”
“비록 당신을 처음 봤지만, 최소한 당신이 날 속이지 않았다는 건 확신할 수 있소.”
“잘 봤어.”
“그리고 하나 더.”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당신은 제 사람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소. 오히려 자기 사람이 다치면, 자신이 다친 것처럼 아파하는 사람일 것이오.”
“아, 거 사람 진짜 오글거리게 하는구먼.”
“그냥 내 직감대로 말하는 것뿐이오.”
“엄청 느끼한 직감이군.”
“어찌 되었든.”
모용우가 연신 헛기침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좀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냥 편하게 연 동생이라 불러도 되겠소?”
“그 말이 하고 싶어서 그렇게 질질 끌었나? 마음대로 부르라고 했잖아.”
“…….”
“댁이 날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어. 당신이 말했듯 우리는 거래를 했다. 나는 당신을 돕고,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날 도와주면 돼. 그뿐이다.”
상당히 냉정한 말이었다. 사람에 따라선 상처를 받을 수도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모용우에게는 전혀 상처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반색하며 웃는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아우.”
연호정은 쓴웃음을 짓다가 문득 자신이 주먹을 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한 대 치려고 했나.
연호정은 쥐가 날 것 같은 주먹을 살살 풀며 말했다.
“이제 좀 건설적인 얘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
“그러세.”
“…….”
“왜 그러시는가?”
“아니야. 왠지 그 계집애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서.”
“응?”
“있어, 눈치 빠른 애. 내 말투를 두고 애늙은이 같다고 하더군.”
“재미있는 친구군.”
글쎄? 그게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네?
연호정이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대처했는지 설명 좀 해 봐.”
모용우의 얼굴도 자연스레 진지해졌다.
“그게…….”
모용우는 모용연화와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되었네.”
“…….”
“왜 그러시는가?”
멍하니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댁 말은, 모용연화를 반쯤 작살내 놨다는 거 아냐?”
“허험! 아우 말투가 좀 거친 것 같네.”
“……이 인간아.”
연호정이 관자놀이를 있는 힘껏 눌렀다.
“그냥 알아서 하겠다, 결과로 보여 주겠다, 그 정도로 하고 돌려보내면 되지 그런 위험천만한 발언을 했단 말이야?”
모용우가 냉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네.”
“왜 그럴 수가 없어!”
“아우가 내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연화 앞에서까지 내 진심을 숨길 순 없었네.”
“허!”
“가문이 모르게 힘을 모은다? 그래,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아슬아슬한 줄타기일 뿐이야. 그런 식으로 해서는 본가를 언제 정상으로 돌릴 수 있을지 모르지.”
“…….”
“아우에게는 미안하네. 어쩌면 아우의 말대로 하는 게 더 안전하고 빠른 길일 수 있어.”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나 역시 결심한 이상, 미적지근하게 움직이고 싶진 않아. 나는 아우의 말대로만 움직이는 괴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네.”
“……그런가?”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이 일은 아우와 나, 둘 다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렇지.”
“함께 고민하고, 함께 판단하세. 어느 한쪽의 의견만 광신한 채 따라가다가는 훗날 반드시 문제가 되리라 믿네.”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면목이 없게 되었네.”
“아니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진심 어린 그 미소는, 언뜻 기분 좋은 상쾌함마저 깃든 것 같았다.
“괴뢰로 살고 싶지 않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모용우의 말을 들으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야지.’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 정도 주관과 배짱은 보여 줘야 함께 일할 맛이 나는 것이다.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는 사람은 언제나 시키는 데까지밖에 못 한다. 하지만 모용우처럼 주관을 갖고 일하는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찾는다.
그 차이는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크다.
“마냥 순진한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군. 그래, 그 정도는 해야지. 차기 무림맹주가 될 사람인데.”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얘기는 그만하세.”
“계속할 테니까 듣기 싫으면 귀를 막아.”
할 말 없게 만드는 언변이었다. 모용우는 귀를 막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연호정이 팔짱을 끼었다.
“그나저나 일이 좀 바쁘게 됐군. 댁이 그렇게 나왔으면 모용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음?”
“모용연화가 댁과 나누었던 대화를 고스란히 전할 거 아냐. 모용군은 절대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늦어도 두 달 안에는 모용가의 병력이 절강으로 진입할 거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왜? 모용군 성격상 절대 참지 않을 텐데?”
“가주 형님은 현재 본가에 계시지 않네.”
“뭐?”
“임시 무림맹.”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무림맹 설립 건으로 공사가 다망하시다네. 시간 여유는 더 있어.”
“그랬군.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맞는 말일세. 그래서 말일세.”
연호정은 이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모용우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흑암의 제왕이라 불리며 흑도 무림을 휩쓸었던 연호정조차 한순간 움찔할 정도로 빛나는 눈은 비상(飛上)의 때를 노리는 잠룡의 용트림과도 같았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형님께 서신을 보냈네.”
“서신?”
“그렇다네.”
“어떤?”
“절강을 제대로 키워 보겠노라고. 내년까지 무역 사업을 두 배로 키워 보겠다고 했어.”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배……?”
“그렇다네.”
“실제로 그럴 생각인가?”
“그러지 못할 거라면 서신에 적어 보내지도 않았네.”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사업을 두 배로 키워 보겠다고?’
그것 참 배포 넘치는 서신이지만, 문제는 모용군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모용연화는 이쪽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전부 토설할 것이다.
모용우가 말을 이었다.
“형님은 이문에 밝은 사람이야. 사업 계획서까지 보낸다면 충분히 시간을…….”
“아니, 그렇게 말랑말랑한 작전으로는 안 되지.”
“음?”
연호정이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당신.”
“말씀하시게.”
“나와 거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그때, 이미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해도 좋겠지?”
“물론일세.”
“그럼 이번에 제대로 한번 걸어 보겠나?”
“따로 묘수라도 있는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나온 연호정의 말에 모용우는 깜짝 놀랐다.
“십 년 이상 엇나갔다면, 이제 삐딱선은 그만 타도되지 않겠나?”
“……?”
“모용군 밑으로 들어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