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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14화 (114/963)

114화. 모욕의 대가 (2)

모용연화는 내심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무슨 헛소리죠? 당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물끄러미 모용연화를 노려보던 연호정이 검지와 엄지를 튕겼다.

“묵비.”

“네?”

연호정이 탁자에 굴러다니던 젓가락 세 개를 던졌다.

젓가락을 받은 묵비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셋이다. 알고 있지?”

셋?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던 묵비는 순간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누군가가 이곳을 주시하고 있다?’

묵비가 창밖을 둘러보았다. 북, 동, 남방 세 곳이었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끼리의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는다.”

순간 묵비는 연호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퉁!

강하게 바닥을 밟은 그녀가 손에 들린 젓가락을 날렸다.

피이이잉!

세 개를 날렸는데도 하나를 날린 듯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툭! 쿠웅!

창밖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뭐, 뭐야? 사람이야?!”

“사람이 떨어졌다!”

모용연화의 눈이 흔들렸다.

“당신……?”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날파리 끼는 걸 별로 안 좋아해.”

황풍정 정보원들이다.

호선대희루는 자격이 되는 자들만이 입성할 수 있는 절강 최고의 주루다. 그래서 모용연화의 수행원들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고급 주루에 대기 중이었다.

하지만 황풍정은 달랐다. 그들은 매 순간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은신술이 제아무리 대단해다 한들 연호정을 속일 정도는 아니었다. 묵비 역시 한껏 감각을 개방하면 어떻게든 잡아낼 정도였다.

모용연화가 묵비를 바라보았다.

‘……!’

묵비의 두 눈은 어느새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고수?!’

모용연화는 깜짝 놀랐다.

그녀 역시 묵비가 무공을 익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느껴지는 내력이나 걸음걸이가 아무리 봐도 고수의 그것은 아니었다.

틀렸다.

묵비의 진신무공은 모용연화가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에 거하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신법과 보법의 경지가 너무 뛰어나 도리어 평범해진 것뿐이었다.

‘이럴 수가!’

사람을 잘못 봤다.

연호정이 데리고 다니는 평범한 여자 정도로만 생각했다. 얼굴은 그런대로 반반했지만, 워낙 순진해 보여서 세상 물정 모르는 이류 무인이라고 확신했다.

충격을 받은 것은 상인 연합의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순하고 멍청해 보여서 신분 낮은 천한 무림인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묵비에게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기파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말해 봐.”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왜 묵비를 건드린 거냐?”

모용연화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무슨 말이죠? 먼저 사고를 친 건 이쪽이지 제가 아니에요.”

“네가 직접 사고를 친 건 아니지. 다만 그 독사 같은 혓바닥으로 알아서 건드리도록 조종했겠지.”

모용연화의 눈이 깊어졌다.

“더는 날 모욕하지 마. 이러고도 당신이 멀쩡할 줄 알아?”

말투가 거칠게 바뀌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왜? 나 하나 묻는 건 쉽다 이건가?”

“당연히. 근래 연가의 위세가 제법 커졌다지만 모용가에 비할 바는 아니야. 본가가 작정하면 연가 하나 묻는 건 어렵지 않아.”

“그 어렵지 않은 일을 왜 아직도 못 하고 있는지는 생각 못 하나?”

“적어도 당신 때문은 아니지.”

“그러니 네 애비가 널 소가주로 책봉하지 않는 것이다.”

“……뭐라고?”

“똑똑하긴 하지만 아직은 본인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애송이잖나. 그러니 소가주로 책봉하지 않는 거다. 설마, 아직도 여자라서 소가주가 못 되는 거라고 위안 삼고 있는 건 아니지?”

모용연화의 볼이 씰룩였다.

상대는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분노가 치솟는 걸 느꼈다.

“한 번만 더 그따위 요언으로 날 모욕하면……!”

훅.

모용연화는 깜짝 놀랐다.

다섯 걸음 밖에 있던 연호정이 어느새 코앞에 서서 자신을 내려보고 있었다.

“모욕하면?”

“……!”

“이 자리에서 널 죽여도 보고할 놈들이 없는데 어쩌시게?”

모용연화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놈이!’

이제야 이곳을 주시하던 황풍정을 없앤 이유를 알겠다.

연호정은 이곳을 완전히 독립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식사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 문제는 육대세가 자제끼리의 싸움이었다. 그들의 눈이나 의견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진짜로 자신을 죽이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압하거나 짓밟아 버리는 것 정도는 문제가 없다.

어차피 연호정 측에서 사실이 아니라 주장하면 할 말이 없을 테니까.

“참으로 치졸한 사내였군.”

“상대를 박살 내기 위해선 어떤 치사한 짓이라도 불사하지.”

모용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제기랄.’

적어도 지금은 연호정에게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연호정이나 묵비나, 그녀보다 몇 수 위의 무공을 지닌 고수였다. 게다가 황풍정도, 수행무사들도 없었다.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사실이 그녀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묵비를 건드린 이유가 뭐냐.”

모용연화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퍼어억!

모용연화가 입을 떡 벌렸다.

‘……뭐?’

그녀의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연호정의 무릎이 복부를 후려친 것이다.

연호정이 차가운 눈으로 모용연화를 내려보았다.

“마지막이라는 말을 허투루 들었군.”

“커헉!”

“잘 가라.”

터어엉!

모용연화가 피를 토하며 물러났다. 장타(掌打)로 턱을 맞은 것이다.

강력한 발경에 머리가 뒤흔들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턱이 부서지지 않은 게 다행일까.

‘이익!’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모용연화가 손을 뻗었다.

우우우웅!

고운 손에서 뿜어지는 경력이 몹시 날카로웠다. 모용세가의 삭풍신수(朔風神手)였다.

퍼어어엉!

연호정의 주먹이 그대로 수공의 경파를 박살 내곤 그녀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빠각!

“아아악!”

엄청난 통증이 하반신 전체를 휩쓸었다.

부러지진 않았지만, 무릎을 꿇기에 충분했다. 아예 하체 전체에 감각이 없었다.

모용연화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연호정의 주먹을 들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그의 주먹 주변으로 반투명한 백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헉!’

죽는다.

일순간 모은 공력이 무시무시했다. 일격에 머리통을 박살 낼 기세였다.

“넌 날 너무 가볍게 봤어.”

연호정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모용연화의 심장을 두 배나 빨리 뛰게 만들었다.

‘허세다.’

허세일 수밖에 없다. 지금 자신을 죽이면 연호정 역시 무사할 수가 없다. 아니, 연호정만이 아니라 연가 전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절대로 죽이지 못한다. 그저 위협에 불과할 뿐이다.

부아아아앙!

연호정이 귀신처럼 웃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모용연화의 동공이 확 작아졌다.

‘멈출 거야! 멈춘다!’

주먹이 닿기도 전에 이미 권풍으로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했다. 물결이 파랑을 일으키듯, 대기를 밀어 내며 쏟아지는 주먹이 느릿하게 보였다.

‘절대 날 죽이지 못……!’

그때, 모용연화는 연호정의 눈을 보았다.

진심 어린 살기로 이글거리는 그 눈빛. 특유의 푸른 기운 속에 드리워진 붉디붉은 살의가 엿보였다.

포악한 짐승의 살의.

모용연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유 없어!!”

콰지지직!

섬뜩한 소리가 층 전체를 울렸다.

“허억! 허억!”

모용연화가 숨을 헐떡였다. 천천히 뜬 두 눈에 솔직한 두려움이 어렸다.

진짜 죽을 뻔했다.

모용연화가 덜덜 떨며 뒤를 돌아보았다.

‘헉!’

그녀 뒤, 바닥과 벽이 묵직한 칼날 폭풍에 짓이겨진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이 자식……!’

살아났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중간에서 내공을 회수한 것도 대단하지만, 권압(拳壓)이 만들어 낸 광경 역시 섬뜩하리만치 대단했다.

힘을 거두지 않았다면 아예 상반신 전체가 짓이겨졌을 것이다. 힘으로 누른 권법이 아니라 전사(轉絲)를 걸어 내치는 내가발경권(內家發勁拳)이었다.

외부와 내부, 몽땅 갈아서 없애 버린다.

무시무시한 살수였다. 모용연화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릴 생각이 아니면 이런 공격을 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유가 없다고?”

모용연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유가 없다는 것은, 그냥 내 일행이기 때문에 시비를 걸었다는 뜻이겠지?”

“…….”

“대답은?”

모용연화가 독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랬다!”

놀랍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모용연화는 진심으로 묵비를 괴롭히고 싶어서 시비를 걸게 한 것이었다. 거기에 거창한 명분이나 증오는 없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흑도의 파락호보다도 못한 년이군.”

부르르.

모용연화의 몸이 떨렸다. 공포가 아니라 분함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감정을 터트려 봤자 오히려 손해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애초에 그녀는 이런 애들 같은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용군이 그녀를 아끼는 것은 냉혹한 마음과 수준 높은 지략 때문이었다. 모용연화는 한 번도 모용군을 실망시켜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용군이 모르는 그녀의 모습이 있었다.

그것은 자격지심이었다.

모용군은 그간 알게 모르게 모용연화의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혔다. 그 대부분은 소가주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그녀의 자존심에 훨씬 더 큰 상처를 입히는 존재가 나타났다.

연호정.

모용연화는 아버지가 연호정을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라고 칭찬하는 걸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이 소가주가 되지 못하는 것이 성별 때문이 아니라 능력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상처 입은 마음은 사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벙어리가 되어 돌아온 황풍정 정보원의 모습은 그녀의 혈기를 머리끝까지 치솟게 했다. 연호정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정보원을 붙인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지도, 아니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흔들린 자존심과 분노가 사태를 이 지경까지 몰아갔다.

모용연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감히 대 모용세가의 장녀에게 살수를 쓰다니! 본가는 절대 연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힘내는 건 좋다만, 넌 평생 본가를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이……!”

툭!

모용연화가 그대로 쓰러졌다. 혼혈을 짚인 것이다.

연호정이 상인 연합 자제에게 말했다.

“알아서 챙겨라. 그리고…….”

그가 한 청년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동시에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 모용세가가?!”

연호정이 청년의 어깨를 두들겼다.

“쫄딱 망하고 싶진 않겠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는데 말이야.”

“그, 그게 사실이오?”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하겠나? 너희가 확인하면 당장 알 수 있는 사실을.”

“헉!”

“사고도 적당히 쳐야 용서가 되지. 거지꼴로 나앉고 싶은 생각 없을 것 아닌가. 부모 가슴에 그런 대못은 박으면 안 되지.”

“…….”

“현명하게 행동하게. 알겠나?”

“……아, 알았소!”

청년의 어깨를 몇 번이나 두들겨 준 연호정이 도끼를 들고 묵비에게 걸어왔다.

“배고파 죽겠구만 괜히 힘만 뺐군. 밖에 나가서 먹자.”

“괜찮겠어요?”

“엉?”

묵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모용연화와 상인 연합 자제들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저들이 앙심을 품으면…….”

“걱정하지 마. 저 앞뒤 분간 못 하는 년이 깨어날 때쯤엔 세상이 조금 달라져 있을 테니까.”

“네?”

“생각도 없이 저리 조져 놨을 리가 없잖냐.”

모용연화가 가기 싫다 해도, 억지로라도 모용우에게 보내야 했다.

마음 같아선 평생 재기불능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모용우의 먹잇감으로 모용연화 정도면 나쁘지 않겠지.’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연호정을 보던 묵비가 미소를 지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버님이 당신 때문에 골머리 많이 썩지 않으셨어요?”

“자식 아니었으면 죽었을지도 몰라.”

“헤에.”

“나가자. 가서 오늘은 술도 한잔 마셔 보자고.”

“사는 거예요?”

“돈도 없는 주제에 새삼.”

“나 돈 많아요”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아버님이 용돈 주셨어요.”

“뭐? 너한테?”

“네.”

“이런 젠장. 그럼 네가 사.”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어요.”

“나한텐 있어. 오늘은 네가 사.”

“그래요, 그럼.”

“껄껄껄.”

“꼭 그렇게 웃어야 해요?”

“웃는 걸로 트집 잡고 난리야.”

방금까지의 살벌한 분위기는 싹 잊은 모양이었다.

호선루를 나서는 두 사람의 얼굴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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