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모욕의 대가 (1)
묵비의 얼굴에 은은한 반가움이 피어올랐다.
“연 공자.”
“후우, 힘들구먼.”
쿵!
광룡부가 바닥을 찍는 소리가 최상층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심상치 않은 등장이다. 거기에 엄청난 도끼로 바닥을 찍으니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어제 새벽부터 밥 한 끼 제대로 못 먹었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겠어.”
“잘 다녀왔어요?”
“잘 다녀온 걸로 보이냐? 피곤해 죽겠다니까.”
연호정이 모용연화와 십여 명의 남녀들을 힐끔거렸다.
모용연화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젊은 남녀들은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도 제법 태연한 기색이었다.
연호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물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사과하라니, 발을 핥으라니 별소리가 다 나오더구만.”
묵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재빨리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또 뵙네요. 이곳에서 며칠 지내실 모양이에요.”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모용연화가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저 소저분이 연 공자의 일행이었지요?”
연호정은 말없이 피식 웃었다.
거의 비웃음에 가까웠다. 그 웃음을 본 열 명의 남녀들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모용연화는 침착했다. 전혀 동요가 없었다.
“저 소저분이 우리 일행에게 실수를 좀 하셨어요. 다만 저분께서 워낙 세상 물정을 모르시는 분 같아서…….”
“네가 묵비냐?”
“……?!”
“난 너한테 질문한 적 없다. 지금은 너와 말 섞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괜히 말 걸지 마라.”
모용연화의 표정이 변했다.
비록 가까워지기 힘든 사이지만, 지금껏 나름의 예의를 갖추었던 그였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대뜸 평대를 하는 것이다.
“지금 그 말, 제게 하는 건가요?”
연호정의 안광이 서늘하게 변했다.
모용연화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는 여장부였다. 연호정의 싸늘한 시선에도 겁을 먹진 않았다.
하지만 입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괜히 상대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모욕을 당했다면 당한 거지만, 더는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뛰어난 인내심이었다.
연호정이 묵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묵비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마음이 많이 상한 것 같군.”
“……네.”
솔직하게 대답한다. 연호정은 묵비의 솔직함이 좋았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알겠다. 너, 저쪽 사람한테 실수했어?”
묵비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화가 난 것이다.
“나는…… 실수한 건 맞지만, 저쪽에서 먼저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순간 하석이 입을 열었다.
“저 천한 것이 아직도…….”
쾅!
“헉!”
최상층에 있는 모두가 깜짝 놀랐다.
어느새 광룡부가 하석 바로 옆 벽에 박혔다. 박힌 광룡부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슬슬 빠지더니, 이내 바닥에 떨어졌다.
쿠웅! 후두두둑!
바닥이 흔들렸다.
들고 있을 때도 그렇지만, 이렇게 보니 얼마나 엄청난 무게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정도가 되면 광룡부의 도끼날에 박히고도 터져 나가지 않은 내벽의 내구력이 신기할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연호정의 내공 운용 덕분이었다. 작정하고 휘둘렀으면 이미 최상층부 내벽 오분지 일이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천한 것?”
털썩!
서너 명의 남녀가 겁에 질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하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자신의 코앞을 지나간 도끼의 환상을 보았다.
조금만 옆으로 기울어졌다면 몸이 통째로 갈려 나갔을 것이다.
연호정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묵비는 연가의 사람이다. 내 아버지조차 귀빈으로 대우하거늘, 누가 감히 천하다 하는가. 벽산의 연가도 천하다고 이죽거릴 셈인가?”
모용연화와 상인 연합 자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호정이 차갑게 비웃었다.
“돼지 눈에는 돼지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너희 눈깔이 그 지경이니, 영화를 누리기는커녕 길 가다가 객사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귓가에 확 박이는 모욕적인 언사였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벙긋하지 못했다. 바닥에 떨어진 저 도끼가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하던 얘기 계속하지. 저쪽에서 먼저 실수했다고?”
묵비가 떠듬떠듬 말했다.
“저는, 저들과 동석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계속 동석하자고 했다?”
“네.”
“누가?”
묵비가 저도 모르게 동소방을 바라보았다. 묵비의 시선을 따라 연호정의 시선도 그녀를 향했다.
동소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십 대 후반의 소녀가 은은하게 번져 나오는 연호정의 존재감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둥이 관리 못 하는 놈 하나, 사람 귀찮게 한 망할 년 하나. 일단 둘은 잡아 족치는 걸로 하고.”
오싹!
분위기가 한층 더 살벌해졌다.
잡아 족친다? 삼류 파락호들이나 할 법한 말이지만, 그 노골적인 말에 담긴 무시무시한 의미는 모두가 체감할 수 있었다.
동소방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석은 애써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벽산호장 연호정.
벽산연가의 장자로 홀로 명가와 맞선 절정고수다. 그가 명가를 무너트린 건 아니지만, 명가를 무너트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열혈의 무사가 바로 연호정이었다.
말이 열혈이지, 수틀리면 앞뒤 가리지도 않을 것이다. 오죽하면 구주명가를 단신으로 상대하겠다고 날뛰었겠는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번지는 섬뜩한 분위기가 좌중을 압도했다.
모용연화가 나섰다.
“연 공자. 설마 이 일을…….”
“입 다물어.”
연호정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네 애비를 봐서 참고 있는 거다.”
“뭐, 뭐라고요?”
“내가 너부터 작살을 내 놓지 않는 것은 네 애비 때문이야. 하지만 한 번만 더 내 인내심을 시험하면, 그땐 모용가고 나발이고 봐주지 않아.”
모용연화의 눈이 차가워졌다.
‘감히!’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따위 말을 하다니, 화가 나길 앞서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
“그래서, 저 망할 년이 어쨌는데?”
모용연화를 싹 무시해 버렸다. 더는 말도 섞기 싫다는 의미, 그녀의 얼굴이 기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아니에요. 이제 그만하죠.”
“그만하자? 왜?”
묵비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굳이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의미도 없는 것 같고.”
“의미가 없다니?”
“화는 났지만…… 이미 저들은 다 겁을 먹었잖아요. 겁먹은 자들 가슴에 화살을 박을 필요는 없어요.”
참으로 그녀다운 비유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상인 연합 자제 중 몇몇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감히 우리를 무시하다니!”
내가 아니라 우리다. 화를 내는 와중에도 은연중 함께하고 있다는 기색을 비치고 있었다.
“벽산연가면 다인가! 이곳은 절강이다! 아무리 강호의 육대세가라도 무사할 성싶은가!”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강호의 육대세가는 무공 좀 강하다고 꼽히는 게 아니었다. 무공은 당연하고, 무공 못지않은 명성이 중요한 법이었다.
그들은 벽산연가가 육대세가 중 가장 세력이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었다.
세력은 약할지언정, 벽산연가의 협명(俠名)은 육대세가 중 수위를 다툰다. 연호정이 명가를 상대하기 전에도 그러했다.
소문만 접하고 세상을 제대로 겪지 못한 자들. 그들은 묵비를 세상 물정 모른다고 비웃었지만, 정작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 자신들이었다.
“봤냐?”
“…….”
“저것들은 저런 놈들이야. 세상 넓은 줄 모르는 쥐새끼지. 모용가의 자손도 얌전히 입 다물고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머리도 없는 것들이란 말이다.”
점입가경이었다.
그들은 재차 노호성을 터트리려다가, 문득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말에서 느껴지는 게 있었던 것이다.
모용연화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강호를 살아가는 놈들이 다들 그렇지.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않아. 저놈들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버릇을 가르치지도 않고 보내면 언젠가 널 골치 아프게 할 거다.”
“…….”
“그런데도 여기서 끝내고 싶나?”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지친 기색이었다.
“무공도 모르는 자들과 더는 드잡이질하고 싶지 않아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좋지.”
“……네?”
“너의 그러한 성정으로 인해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는 순간이 있을 거다. 하지만 너의 선택을 존중해. 이 세상에 너처럼 순한 사람도 있어야지.”
묵비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그녀는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나는…….”
“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뒤를 봐주마. 후회해도, 그 후회로 인해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겠다. 그 정도 각오 없이 널 데리고 온 게 아니야.”
묵비의 눈이 일렁였다.
연호정이 묵비의 어깨를 두들겼다.
“사람은 관계와 갈등 속에 성장한다고들 하지. 잘 참았어.”
웃으며 묵비를 대하던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그의 두 눈에는 귀화(鬼火)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럼 우리끼리 얘기 좀 해 볼까?”
묵비는 당황했다.
“왜, 왜 그래요?”
“난 너와 달리 천성이 지랄맞아서.”
“네?”
“내 사람을 협박하고 조롱한 놈들,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지 않고는 못 넘기는 성격이다.”
하석이 이를 악물었다.
“이보시오, 연…….”
퍼억!
하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꺄아아악!”
“헉!”
벽에 박힌 하석의 눈은 몽롱했다. 부들부들 떨던 그의 몸이 주르륵 쓰러졌다. 피범벅이 된 입에서 허연 이빨 서너 개가 흘러나왔다.
전신 근육 한 올 한 올에 진기가 어리는 경지다. 내공심법을 개방하지 않아도 주먹질 한 방에 나무를 부순다.
그 힘으로 뺨을 쳤으니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누가 멋대로 기절하라 했느냐.”
터벅터벅 걸어가 하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 연호정이 다시 손을 휘둘렀다.
퍼억! 퍼억!
“크악!”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지만, 차라리 안 차리느니만 못했다.
하석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이빨 몇 개가 더 부러지고, 양 볼은 찢어져서 흉한 상처가 남았다. 오른쪽 눈도 순식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연호정의 살기 어린 안광이 하석의 눈을 주시했다.
하석의 얼굴에 극심한 두려움이 어렸다.
“사려…….”
퍼어억!
재차 벽에 처박힌 하석이 정신을 잃었다. 아마 다시 깨어난다 한들 연호정의 연 자만 들어도 덜덜 떨 것이다.
연호정이 동소방을 바라보았다.
동소방이 딸꾹질을 했다.
“나, 나는…… 대천금방(大天金房)의…….”
“대천금방? 절강 특산 요리냐?”
퍼어억!
“컥!”
연호정은 자비가 없었다.
건장한 청년을 초주검으로 만드는 과정도 끔찍했지만, 나이 어린 여인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 같지 않았다.
퍽! 퍽! 빠각!
동소방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하석도, 동소방도 죽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만큼 흉한 상처를 안겨 주었다.
잔혹한 손속이었다.
상대의 신분이 어떻든, 무공도 모르는 범부를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았다. 벽산호장의 협명에 어울리지 않는 무자비한 폭행이었다.
연호정이 남은 이들을 돌아보았다.
츠츠츠츠.
귀신의 눈처럼 파랗게 빛나는 안광에 흑암의 살기가 실렸다.
“허억!”
그들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저절로 다리에 힘이 빠진 것이다.
한참이나 그들을 노려보던 연호정이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모용연화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당신, 실수한 거야.”
“설명해 봐.”
“뭐?”
연호정이 손으로 무릎 꿇은 상인 연합 자제들을 가리켰다.
“이 얼치기들을 이용해서 묵비를 건드린 이유, 설명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