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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12화 (112/963)

112화. 고개를 들어야 하늘이 보인다 (6)

터어엉!

유독 힘이 들어간 일 보(一步)였다. 거의 진각에 가까운 한걸음에 그의 신형이 칠 장 밖으로 뻗어 나갔다.

힘이 들어간 일 보였지만 그의 움직임은 몹시 유연해 보였다. 어깨에 팔십 근이 넘는 광룡부를 메고 있음에도 고양이가 달리는 것처럼 날랬다.

‘역시!’

예전보다 훨씬 더 빨라진 속도에 내공 소모는 삼분지 일로 줄어들었다.

확실히 전문적으로 신법을 배우니 효율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훗날 천종운행비를 대성하게 되면 한 호흡에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경쾌하게 달려 나가던 연호정은 순간 저 멀리 산길 가운데 있는 바위 하나를 보았다.

파아악!

부드럽게 움직인다 싶더니 어느새 산길로 접어든다. 기가 막힌 몸놀림이었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꽝!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바위가 옆으로 굴러갔다.

도끼의 널찍한 면으로 후려쳤지만, 백호기를 십 성 공력으로 끌어올려 친 일격이었다. 굴러갈 게 아니라 쪼개졌어야 정상이다.

한데도 바위가 깨지지 않고 굴러갔다. 그만큼 내공 조절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약간 더 손봐야겠어.’

굴러가는 바위 면에 실금이 간 걸 포착했다. 완벽하게 밀어 냈다고 생각했는데, 충격이 남긴 남은 모양이었다.

‘광룡 때문이다.’

광룡부 정도의 신병이 무인의 내공을 받으면 실력 이상의 힘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당연히 철부를 휘둘렀을 때보다 위력도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그때의 연호정과 지금의 연호정이 품은 힘의 크기도 달랐다.

‘신병의 힘까지도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도록 다듬어야 한다. 역시 아직 멀었어.’

완전히 제어할 수 없는 힘은 진짜 강함이 아니다.

그래서 연호정은 팔십 근 도끼를 들었고, 초식 운용 자체가 어려운 철삭을 휘둘렀다.

두 가지 기병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면, 외가무공(外家武功)에서 최고 경지를 구축했다 봐도 무리가 없다.

‘철삭이라.’

철삭을 생각하니, 문득 편일강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자네가 쓸 만한 철삭은 구하지 못했네. 단단하게 만든 철삭이라도 광룡을 매달면 금방 부서질 테니까. 자네 내공도 내공이고.’

‘그렇습니까.’

‘해서 직접 만들어 볼까 싶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관뒀네. 그건 광룡을 제작하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게 분명하니까.’

‘괜찮습니다. 광룡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니, 그럴 순 없지. 나는 자네가 휘두를 도끼를 만든 게 아니야. 연호정이라는 무인의 무기를 만든 것일세. 그렇다면 철삭까지 책임을 져야 하네.’

‘쩝.’

‘다행히 내 아는 사람 중 하나가 유상귀철(柔像鬼鐵)을 얻었다고 하네.’

‘예?’

‘들어 본 적 없지? 유상귀철은 천하에 산재한 철 중 가장 신묘한 철이라네. 품고 있는 금기(金氣)가 워낙 짙어서, 내력을 운용하면 형태가 변한다네. 늘어나거나 줄어들기도 한단 말이야.’

‘……그런 철이 있습니까?’

‘나도 믿지 못했네. 직접 보기 전까지는.’

‘세상에는 신기한 물건들이 많군요.’

‘여하간, 그 사람이 내게 은혜를 받은 게 있어 유상귀철을 조금 얻기로 했네. 그걸 다른 철과 합쳐 철삭을 만들어 줌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신 분이야.’

병기를 만드는 걸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

큰 은혜를 입었다. 좋은 무인에게 좋은 병기를 만들어 주는 게 큰 기쁨이니 돈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더 죄송하고 감사했다.

‘돌아갈 때 감사 선물이라도 사 가야겠군.’

마음 깊이 다짐한 그가 속도를 올렸다.

파아아아앙!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니,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신법 수련을 병행하며 나아가니 어느새 항주가 보였다. 그리고 항주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호선대희루도 보였다.

터엉!

연호정이 단 두 걸음 만에 담을 타 넘었다.

그 높은 담을 너무도 쉽게 넘었다. 신법을 배우기 전이라면 대여섯 번은 박찼어야 할 것이다.

“후우. 하루 동안 열심히 뛰어다녔더니만 피곤하군.”

오늘은 반드시 맛난 걸 푸짐하게 먹고 푹 쉬리라.

숙소로 들어간 연호정은 묵비의 방문을 두들기려다 멈칫했다.

‘응?’

기감을 집중하니, 방에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이 녀석? 벌써 밥 먹으러 갔나?”

하기야 벌써 석양이 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으니 이참에 많이 먹어 두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꼬르륵.

연호정은 배를 쓰다듬었다.

“치사한 것 같으니. 조금만 참고 같이 먹지.”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그가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렸다가 같이 먹는단 말인가.

연호정은 투덜대며 최상층으로 올랐다.

‘저기 있군.’

다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곧바로 묵비가 보였다.

워낙 사내놈 대하듯 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묵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어딜 가도 눈에 띌 미모였다.

웃으며 손을 들려던 연호정이 멈칫했다.

“어서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 대체 얼마나 한미한 집안 출신이길래.”

“이봐.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한다고 일이 해결되나?”

묵비의 앞에는 십여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대놓고 화를 내는 사람도, 경멸 가득한 표정을 한 사람도 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묵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묵비는 다소 난처한 얼굴로 주춤거리고 있었다.

남녀 무리의 선두에 선 청년이 이죽거렸다.

“왜 대답이 없어? 잘못을 저질렀으면 사과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묵비가 떠듬떠듬 말했다.

“사과했잖아요.”

“사과? 그게 사과야? 미안했다, 이거 한 마디로 끝이란 건가?”

청년, 하석(河晳)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대죄를 저질렀으면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를 박아야지. 그래야 사과인 거지.”

묵비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관일곡이라는 폐쇄적인 집단에서 성장한 그녀였다.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배웠지만 워낙 사회와 단절되어 살았고, 심지어 유년 시절 대부분을 친구도 없이 활만 쏘며 지냈다.

막상 갈등이 생기니 머리가 하얘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무공의 강약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절을 하라고요?”

“왜? 자존심 상하나? 사람을 상처 입혔으면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지. 그런 것도 몰라?”

묵비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처라뇨. 게다가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그쪽이잖아요.”

“무례라…… 이거 완전히 정신 나간 년이었구먼.”

꽤 상스러운 말이었다.

제아무리 묵비라도 화가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벌게진 얼굴로 말했다.

“사과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사과했어요. 오히려 그쪽이야말로 저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지간한 일이라면 먼저 자리를 피하는 그녀였다. 묵비가 얼마나 억울한지 알 수 있었다.

하석이 피식 웃었다.

“천한 것과 더는 입씨름하고 싶지 않아. 당장 무릎 꿇고 동 소저한테 사과해. 그게 싫으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를 내놓던가.”

“……뭐라고요?”

“우리는 절강 최고 명문가의 후예들이다. 너 같은 얼치기 무림인이 함부로 해도 될 만한 신분이 아니란 말이다. 우리가 지금껏 참아 준 건 네 일행의 신분 덕분이지.”

묵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행이라 하면 연호정을 뜻하는 것이다. 이들 역시 연호정을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잘못은 네가 저질렀으니, 마땅히 네가 직접 책임져야겠지?”

“그건 당연해요. 하지만…….”

“정 사과가 싫으면 동 소저 발이라도 핥아라. 그게 예의지.”

하석의 말에 함께했던 남녀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묵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세상 경험이 없는 그녀라 해도 지금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특히나 주변 분위기도 묘했다.

‘피하고 있어.’

최상층에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이 식사 중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중 누구도 지금 상황에 끼어들지 않았다. 몇몇은 아예 관심도 없어 보였지만, 그중 대다수가 애써 무시하는 기색이었다.

‘이게 강호인가?’

화가 났고, 화가 난 것 이상으로 실망했다.

동시에 조심스러워졌다.

‘연 공자.’

이들은 연호정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들과 연호정 간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절대 손을 써선 안 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고를 칠 순 없었다.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연호정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녀가 아는 도리였다.

“그럼…….”

하석이 입이 열려 할 때였다.

“하 공자.”

십여 명의 남녀가 옆을 돌아보았다.

제법 떨어진 창가 자리에서 모용연화가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저 소저의 잘못이 크기는 하지만, 하 공자도 너무 짓궂으셨어요.”

“그, 그랬습니까? 하하!”

하석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묵비 앞에선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더니, 모용연화에게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힘의 우열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상대의 잘못이 크다고는 해도, 괜히 이런 일에 휘말려 여러분들의 명성에 흠집이 나는 것도 아쉬운 일 아니겠어요? 이 일은 여기서 묻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모용연화가 하석 뒤에 있는 소녀, 동소방에게 물었다.

“소방 동생은 어때? 괜찮지?”

동소방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녀가 손등을 매만졌다.

“아직 좀 아프긴 하지만…… 뭐, 괜찮아요. 개한테 물렸다고 치죠.”

“동생도 짓궂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

모용연화가 묵비를 보며 말했다.

“이분들이 워낙에 놀랐나 봐요. 보시다시피 절강 명문의 자제분들이라 속세의 다툼에 익숙지 않으세요.”

“…….”

“소저도 만만치 않게 놀랐을 텐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죠.”

묵비는 말없이 모용연화를 바라보았다.

하석이 혀를 찼다.

“정말 예의라곤 하나도 없는 계집이군.”

“하 공자.”

“하지만 너무 하잖습니까. 모용 소저에게 마땅히 감사 인사라도 올려야 하는 건데.”

모용연화가 웃으며 말했다.

“저분도 속세의 다툼에 익숙지 않으신가 봐요. 여러분들이 이해해 주세요.”

“커험!”

그때, 묵비가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런가요?”

모용연화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가요?”

“네.”

“뭐라고 말씀하셨죠?”

“원래 이러냐고 물었어요.”

“무엇이요?”

“강호라는 게, 원래 이렇게 치졸한 곳인가요?”

순간 하석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이년이!”

“하 공자.”

모용연화의 목소리에 하석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크게 화가 났는지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일어난 다른 남녀들도 마찬가지였다. 묵비를 보는 눈빛에 칼날이 달려 있는 듯했다.

모용연화가 다소 진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발언이세요. 말씀드렸듯, 이분들은 절강 명문의 자제분들이랍니다. 하지만 대답을 드리자면…….”

“…….”

“글쎄요? 이건 치졸한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일 소저가 진심으로 사과했다면, 이분들이라고 이리 화를 내셨을까요?”

“난 진심으로 사과했어요.”

“사과는 말과 표정이 전부가 아니랍니다. 때론 신분에 따라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라는 것도 있는 거예요.”

모용연화는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분인 것 같아 일을 키우지 않았어요. 하지만 알아 두세요. 이분들이 작정하고 일을 키울 생각이었다면, 한도 끝도 없이 커질 일이었다는 걸요.”

“…….”

“충분한 답이 되었길 바라요. 자, 식사 마저 하세요.”

그때였다.

“굳이 그럴 필요 있어?”

모용연화의 얼굴이 굳어졌다.

묵비가 목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연호정이 있었다.

연호정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일이 터졌으면 끝장을 봐야지 왜 중간에서 끊나? 일 더 키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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