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고개를 들어야 하늘이 보인다 (5)
그날 아침.
“헛! 지부장님, 밤을 새우신 겁니까?”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생각할 게 있어서.”
이건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깃들었다.
“오늘은 쉬시지요. 무역 연합 대표들은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괜찮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껏 바쁜 시간 쪼개 가며 무공까지 연마한 사람이 나일세. 너무 걱정하지 말게. 정 답이 안 나오면 칼이라도 뽑아야지.”
이건은 저도 모르게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차라리 검을 뽑으시지요. 누가 있어 지부장님을 막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
물론 이건 역시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생계가 걸려 한껏 날카로워졌지만, 그들 역시 피해자라면 피해자다.
“그럼 한 시진만 주무십시오. 오전 일은 제가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그럴까?”
“예.”
하지만 모용우는 자지 않았다.
분명 피곤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했다. 억지로 잠을 청할 필요는 없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군.’
모용우는 연호정을 떠올렸다.
이제 막 약관에 이르렀을까? 내공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생명력이 넘쳐 보였다.
전체적으로 날카롭지만 몹시 잘생긴 인상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뻣뻣할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외양에 한해서일 뿐이다.
‘도대체 정체가 뭘까.’
모용우는 사람의 겉모습보다 내재된 성향을 보는 데에 익숙했다.
당연했다. 모용세가는 권력을 얻기 위해 혈육도 죽이는 지옥의 무대였다.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사람 보는 안목을 키우는 게 첫째였다.
그런 그가 보았을 때, 연호정은 이미 일가를 이루어도 부족함이 없는 자였다.
무공보다도 강하고 소중한 힘. 그것은 천하의 흐름을 볼 줄 아는 눈이요, 그 흐름을 자신의 마음대로 좌우할 줄 아는 능력이었다.
‘오히려 그의 무공이 형님보다 강했다면 덜 놀라웠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충분히 놀라울 정도였다. 모용우가 보기에, 연호정의 무공은 자신이라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물 같은 재능이거늘.
‘사냥감이라……?’
모용우는 문득 불안함을 느꼈다.
연호정, 그자는 대체 무역 연합을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싹싹 빌게 만든다는 뜻은, 대체 어떤 뜻일까?
‘설마하니…… 무력으로 협박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진 않을 것이다.
거친 사람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인의는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모용우는 자신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해가 서서히 중천으로 이동할 무렵이었다.
“지, 지부장님!”
“무슨 일인가?”
“무역 연합의 대표들이 찾아왔습니다!”
모용우의 눈이 번뜩였다.
“알겠네.”
“한데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무슨 말인가?”
“모, 모르겠습니다. 어째서인지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설마……?
모용우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헉! 지, 지부장님!”
“오셨습니까!”
“아이고, 저희가 진즉에 찾아뵀어야 했는데…….”
모용우는 눈을 끔뻑였다.
뭐지, 이 비굴하기 짝이 없는 반응들은?
“왜들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으로 드십시다.”
세 사람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모용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제라도 있으시오?”
그중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괘, 괜찮으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그게 아니라…….”
“……?”
“저기, 여기에 계속 남아 주시는 것입니까?”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모용우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한데 그 기색이 조금 묘했다.
‘나?’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은 게 아니라, 모용우 자체를 어려워하는 듯했다.
‘여기에 남아 줄 거냐고? 그 말은……?’
그때, 오십 대로 보이는 최고 연장자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모용 지부장께서 얼마나 고생하고 계신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부장께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저희를 위해 일부러 힘든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셨지요.”
“…….”
“다 저희가 못난 탓입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다만, 앞으로 저희끼리 어떻게든 조율을 해 볼 터이니 그저 자리에만 남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용우는 내심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소. 내가 남아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용우 딴에는 이 상황을 몰라 내뱉은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은 세 사람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마디였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
“지부장님께서 떠나시면, 저희는 정말 굶어 죽습니다!”
“차라리 저희 지분을 떼어 드리겠습니다!”
뭐, 뭐야?
모용우는 상인 대표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동시에 머리는 차가워졌다.
‘연호정?’
그 사람이 뭔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한데 보아하니 무력으로 협박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연호정이 아니라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순간 모용우는 연호정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밥 내놓으라 따지러 오게 하지 말고, 미안하다며 싹싹 빌러 오게 만들어야지.’
‘기회라고 생각할 때, 바로 목줄을 물어뜯어라.’
……음, 뭔진 모르겠지만 한번 찔러 볼까?
모용우는 짐짓 모른 척 말했다.
“세 분은 무역상회의 대표분들 아니오? 나 하나 없어도 충분히 잘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오.”
순간 모용우는 일대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세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퍼렇게 변해 버렸다. 극도의 공포에 정신도 반쯤 날아간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지부장님!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크흐흐흑!”
“다시는 저희끼리 싸우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이권 다툼에 개입하는 놈들이 있다면 저희가 먼저 날려 버리겠습니다!”
모용우는 찔러 보는 걸 그만뒀다. 자칫 잘못하다간 사람 잡을 것 같았다.
그때, 오십 대 사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저희는 지부장님께서 외롭게 싸우고 계시다는 걸 모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저희가 나서서 지부장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말씀드립니다. 부디 모용세가가 절강에 오는 것을 막아 주십시오!”
순간 모용우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용세가? 갑자기 본가의 이름이 왜?’
모용우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본가 사람이 절강으로 오는 게 그리 두려우시오?”
“크흐흑! 저희가 참으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건 모용우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니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이대로 둬선 안 되는 건 알겠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오.”
세 사람은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 콧물을 훔치며 객당으로 들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지부의 대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있었다. 개방도였다.
“연 공자의 서신입니다.”
모용우가 서둘러 서신을 펼쳤다.
당신이 제대로 마음을 먹었다면 굳이 이런 도움도 필요가 없었어. 하지만 당신 역시 나름대로 고뇌 가득한 시간을 보냈을 테니 충분히 이해가 가. 이번 건은 거래에서 빼도 된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이 정도 일은 언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듯, 패기 넘치는 발언이 눈을 사로잡았다. 다른 건 몰라도 뛰어난 사람과 연을 맺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용군의 성격이라면 필시 무역 연합에 속한 상인들을 몽땅 베어 버릴 생각이겠지. 그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 줘선 안 돼. 겉으로는 유약해 보이지만, 그들은 독하게 살아온 사람들이야. 막간에 몰리면 오히려 발톱을 세울 거다. 그럼 여러모로 귀찮아지겠지.
모용우는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
이 정도면 연호정이 이쪽에 세작이라도 심어 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리 훤히 꿰뚫어 볼 수가 없다.
‘무시무시한!’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알겠다.
연호정은 절대로 적으로 돌려선 안 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지략은 이미 천하를 논하고 있었다. 그러한 지략에, 무서운 행동력은 덤이었다.
설마 형님은 이미 연호정을 적으로 돌린 걸까?
그들에겐 모용세가가 자금을 풀어 절강의 무역 사업을 통째로 거머쥐려 한다고 말해 뒀다. 그리고 그것을 일선에서 막고 있는 자가 당신이라고 이해시켰어. 나중이라면 모를까, 당분간은 당신 머리 아프게 할 일 없을 거야.
“허!”
모용우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모용세가가 작정하고 무역 사업에 관여한다?
그럼 절강 무역상들은 끝장이 난다. 그간 자신들이 쥐고 있던 이권들을 모조리 모용세가에게 빼앗길 것이다. 음으로든, 양으로든.
천문학적인 자금력을 갖춘 단체에게 이권을 빼앗기면 죽어 나가는 건 중소 상인들이다.
상인 대표들이 저리 설설 기는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모용세가가 그들을 집어삼키려는 걸, 정작 모용세가의 핏줄인 모용우가 막고 있었다고 하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일인가.
한데 그들의 행태에 질려 이제 떠나 버리겠다고 한다. 상인들로서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 몇 마디로 판을 흔든다……. 세상에, 이런 걸 실제로 행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
휘휘 고개를 젓던 모용우가 일순 표정을 굳혔다.
내가 왜 굳이 모용세가를 끌어들였는지 알겠나? 모용연화가 가면 당신은 선택을 내려야 해. 저들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안고 갈 것인가. 당신의 판단에 저들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이다.
모용우의 콧잔등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정 가문을 뒤엎고 싶다면, 절강부터 휘어잡아라. 그럴 마음도, 능력도 없다면 모용연화에게 꿇어라.
전자를 택하면 본격적으로 연호정과 함께하게 된다. 후자를 택하면 그때부터는 적이다.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상황이었다. 연호정은 대놓고 모용우의 그릇을 시험하고 있었다.
‘무서운!’
모용우를 시험함과 동시에, 시험을 통과하면 절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했고, 나아가 한참 예민한 시기의 절강 무역 시장을 한방에 휘어잡았다.
절강이 안정되면 자연히 강소성도 안정된다. 그렇다면 벽산연가도 일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이 한 번의 수로 이중, 삼중의 이득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인재는 인재를 알아보는 법.
모용우는 연호정이 이번 일로 얻게 될 무수히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혀를 내둘렀다.
‘만약 내가 실패하면…… 그땐 연가의 병력을 끌고 와서 점령해 버리겠지.’
최악의 상황이라도 챙길 건 챙긴다는 뜻이다.
대단하다. 모용우로서는 감히 떠올려 볼 생각도 못 하는 파격적인 수법이었다.
모용우가 서신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었다.
절강 시장 조사차 한 달 정도 호선대희루에 머물 생각이야. 성공하면 나들이 삼아 놀러 와.
서신을 접은 모용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감당키 힘든 사람과 손을 잡은 건 아닐는지.’
그때, 이건이 달려왔다.
“지, 지부장님!”
“왜 그러시는가?”
“상인 대표들이 지부장님을 무역 연합의 대봉공(大奉公)으로 추대하고 싶답니다! 저들이 갑자기 왜 이럴까요?”
“대봉공이라…….”
모용우가 쓰게 웃었다.
“기회가 오면 목줄을 물어뜯으라더니, 송곳니와 이빨을 다 뽑아서 보내 놨군.”
“예?”
“아닐세. 들어가세.”
크게 숨을 몰아쉰 모용우의 눈에 결의의 빛이 새겨졌다.
“어쩌겠는가. 가시 돋은 꽃이라도 향이 좋으면 꺾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