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09화 (109/963)

109화. 고개를 들어야 하늘이 보인다 (3)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엄청나구나.’

육 척이 넘는 키에 일견 호리호리해 보이는 체형을 가진 자다. 안에는 무복을 입었지만, 겉에 걸친 하얀 장포가 날카로운 인상을 부드럽게 순화해 주는 듯했다.

키는 컸지만 체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그 모습이 전신에서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마치 한 그루의 대나무를 보는 것 같았다.

은연중에 흘러나오는 이 정제된 기도만 아니었다면 참 잘생긴 문사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토록 왕성한 기(氣)를 품고 있다니?’

언뜻 신비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기도였다. 모용우는 지금껏 이리도 비범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 도끼.

언뜻 보아도 신병이기(神兵利器) 소리를 들을 만한 보물이었다. 두꺼우면서도 서늘한 예기를 발하는 도끼날에서 웅혼한 패기가 넘실거렸다.

강호에서 보기 드문 기병이었다. 그런 기병을 호리호리한 청년이 들고 있으니 더 위압감이 넘쳐 보인다.

현재, 무림에서 저러한 외양을 묘사할 때 떠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이 청년은 자신의 입으로 당당하게 소개를 마쳤다.

“연호정이라면…… 벽산연가의?”

“그렇소.”

모용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짧게 포권했다.

“모용가의 절강지부장 모용우요. 명성 자자한 벽산의 호장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놀라운 인사였다.

모용우는 연호정보다 연상이다. 그것도 한두 해 차이가 아니라 십 년은 더 빨리 태어났다.

그런데도 격식을 갖추어 인사했다. 이 새벽에, 충분히 의심스러운 방문이라 볼 수 있는 이 순간에.

연호정 역시 도끼를 내려놓곤 정식으로 인사했다.

“강소 벽산연가의 장자 연호정이 모용가의 잠룡(潛龍)을 뵙소.”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가의 잠룡. 참으로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모용우가 입을 열려 할 때, 연호정이 도끼를 들었다.

“차 한잔 얻어 마셔도 되겠소?”

안에서 얘기하잔 말이었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시오.”

스륵.

연호정이 창가를 통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놀라운 신법!’

신체의 움직임이 상리를 벗어났다. 굉장히 유연하면서도 강단 넘치는 움직임이었다.

고작 하나의 동작을 봤을 뿐이지만, 연호정을 향한 경각심이 한층 더 진해졌다.

“좋은 찻잎이 없소. 이해해 주시오.”

“아무거나 잘 먹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알겠소.”

도끼를 놓고 의자에 앉은 연호정이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모용우는 아무 말 없이 한쪽에서 차를 타고 있었다.

궁금할 만도 할 것이다. 이 침묵이 어색해 괜히 한마디를 건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차를 타는 데에 열중했다.

정확히는, 차를 타는 와중 그의 의식은 끊임없이 연호정을 더듬고 있었다.

‘여전하군.’

신중하다.

왠지 모르게 날이 바짝 서 있지만, 그래도 몸에 밴 예의와 정기(正氣)는 그때 그대로였다.

아니, 그때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세파에 찌든 데다가 사음교의 난 덕에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때의 모용우보다 훨씬 더 사람다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다만 스스로가 그것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있을 뿐.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연호정의 동공에 푸른빛이 아른거렸다.

‘이 사람밖에 없다. 이 사람뿐이야.’

잠시 후, 모용우가 연호정 앞에 찻잔을 놓았다.

“오랜만에 타 보는지라 맛이 괜찮을지 모르겠소.”

“향이 좋소.”

연호정은 서슴없이 차를 마셨다.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마시다니.’

배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잘 아는 건지 모르겠다. 모용우에게는 상대에 대한 정보가 극도로 부족했다.

‘천하의 호걸이라 소문이 자자하지만…… 굳이 이런 야밤에 홀로 찾아온 걸 봐서는…….’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했다.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이미 온 자는 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강호 무림은 위험한 곳이다. 일면식도 없는 자가, 그것도 이 야심한 시각에 찾아왔다면 철저하게 경계해야 마땅했다.

설령 개방이 중간에 다리를 놔 주었다 해도.

“축하하오.”

“무슨 말씀이오?”

“맛난 차를 타는 데 성공하셨소.”

“다행이오.”

딱딱한 답변이었다.

목소리에서 절로 경계심이 느껴졌다. 솔직하다면 솔직한 반응이었다.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날이 제법 서늘해졌소. 언뜻 보아도 대단한 고수신 듯한데, 천하의 고수라도 고뿔은 피해 가기 어렵더이다.”

차디찬 새벽 공기 마시면서 온 이유가 무엇이냐.

빙 돌려 말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서운 말이다. 괜한 말장난은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연호정이 웃음을 거두었다.

“대화에 앞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리다.”

“경청하겠소.”

“나는 말을 돌려 하는 걸 좋아하지 않소. 다소 과격하게 들리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지금 많이 힘든 걸로 알고 있소.”

앞뒤 내용 다 건너뛰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모용우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고민하느라 대화가 끊겼다.

엇박자가 나 버린 틈을 제 것 삼아, 연호정이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절강 무역상들끼리의 이권 싸움으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들었소.”

“……!”

“그리고 지부장께서 절강 해상 무역의 이권 조율을 맡고 계신다는 것도 들었소.”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어떻게 아셨소?”

“그대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오래전부터 알아보고 있었소. 물론, 여기 오기 전에도 검토했었지.”

의아하면서도 섬뜩한 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시받고 있었다는 것,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용우는 기분이 언짢기보단 상대의 의중이 궁금했다. 이 젊은 호랑이는, 열혈의 협사라는 소문까지 도는 청년은 왜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을까?

“이 사람을 조사하셨다는 거요?”

“그렇소.”

맑은 눈으로 연호정을 주시하던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강소와 절강, 양 지역의 해상 무역을 통제하여 이권을 가져갈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는 게 좋을 듯싶소.”

“그 일은 굳이 지부장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가능하니, 딱히 포기할 생각은 없소이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모용우의 기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기도가 맑은 호수 같았다. 어지간해서는 물결조차 일지 않는 무거운 물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의문이구려. 굳이 나를 조사함은 물론, 예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없잖소.”

“도와 드리리다.”

“……돕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모용우를 보던 연호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지부장은 모용가주의 냉혹무비한 노선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오?”

“……!!”

“내 보기에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역시 본가에서 압박을 받고 있는 듯하오만.”

모용우의 표정이 돌변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군.”

“그걸 어찌……?”

“모용군이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연호정의 눈빛이 변했다.

모용군을 떠올리자 눈빛부터 돌변한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눈빛에, 모용우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모용군은 야망가요. 그의 욕심은 끝이 없지. 사람이 욕심을 갖고 사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그 욕심 때문에 죄 없는 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으니 문제요.”

“……!”

“하물며 그의 야망은 철저하게 개인적이오. 차라리 대의(大義)를 위한다면 참작의 여지라도 있겠지만, 모용군은 그조차도 안 되는 야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독하게 살아가고 있소.”

말을 하면서도 연호정은 괜한 씁쓸함을 느꼈다. 자신이라고 대단한 의기나 의협심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모용우의 얼굴에 솔직한 놀라움이 어렸다.

동시에 더 깊은 의심이 깃들었다. 자신을 조사한 사람이 형님이자 육대세가의 가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단다.

무슨 생각으로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극도로 경계해야 할 사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은 달라. 당신은 대단한 걸 원하는 게 아니오. 그저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걸 원할 뿐이오.”

“…….”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른다면 알려 드리리다. 정의(正義)와 의기(義氣)는 바로 거기서부터 나오는 것이오. 내 울타리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알아야 정의도 부르짖을 수 있는 거요.”

“정의, 의기라…….”

“나도 내 식구를 아끼지만, 그리 정의로운 사람은 못 되는 것 같소. 오히려 악인(惡人)에 가깝지.”

“…….”

“정도(正道)도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연호정이 한 모금 차로 목을 축였다.

“그러니 당신을 도와주겠소. 절강 무역 연합 건으로 가문의 압박을 받는다면, 그 부분은 확실하게 해결해 주겠소.”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돕는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소?”

“이유라…….”

“그렇소. 이유.”

모용우가 잠시 숨을 들이쉬었다.

한 번의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린 그가 강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난 몹시 혼란스럽소. 개방의 항주지부장에게 서신을 받긴 했소만, 한 번 본 적도 없는 청년 고수가 찾아와 느닷없이 날 도와주겠다 말하고 있소이다.”

“그렇소.”

“그 말이 전부라면 모를까, 당신은 나를 오랫동안 조사했다고 했소. 심지어 가주인 형님에 대해서도 상당히 잘 아는 것 같은데.”

“아주 잘 알고 있소. 어떤 의미론 당신보다 모용가주를 더 잘 알고 있을 수 있소.”

“나보다 더…… 좋소. 그렇다고 칩시다.”

모용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당신이라면 지금 내가, 당신의 도움을 선뜻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아무래도 그러긴 어렵겠지.”

반박할 줄 알았더니 대뜸 수긍한다. 모용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소. 게다가 당신은 벽산연가의 장자외다. 당신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게 알려지면 본가에서도 난리가 날 것이오.”

“무섭소?”

“무슨 말이오?”

“모용군이 무섭냔 말이오.”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모용우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소. 그리고 하나 더, 본가의 가주님에 대해 너무 함부로 부르시는 것 같소.”

“나에게는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니 당연하지.”

“……?!”

적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그는 명가와 손을 잡고 본가를 멸문시키려 했소. 모용군이 직접 세작을 침투시키기까지 했지.”

“뭐, 뭐라고?!”

“내 손으로 세작을 잡고, 명가를 풍비박산 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본가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을 수도 있소.”

모용우가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의 표정은 담백했다. 거짓을 말하는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형님……!’

더 무서운 것은, 그가 아는 모용군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대체 어찌 이러신단 말인가. 어찌 그런 무도한 짓을 자꾸만…….”

탄식에 탄식을 더하던 모용우가 일어나더니 대뜸 절을 올렸다.

“형님을 대신하여 사과드리겠소. 용서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혈육으로서 차마 면목이 없소이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우는 말없이 엎드려 있었다. 자신이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진심을 다해 사죄하는 것이다.

상대가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모용우의 안목은 진짜다. 그는 허실(虛實)을 파악하는 데 비상한 재능이 있다. 그것이 그의 무수한 장점 중 하나였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그가 무도한 야망을 접고 일선에서 물러난다면, 본가는 그를 용서할 수 있소.”

모용우가 상체를 세웠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은…… 그 부분에 관해서 내 직접 형님께 말씀을…….”

“하지만 모용군은 절대 포기하지 않겠지.”

“…….”

“당신, 방금 형님을 대신하여 사죄한다고 했소?”

“……?”

“그것이 진심이라면, 자질구레한 방법 따위 쓰지 말고 제대로 사죄해 보는 건 어떻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백도 무림의 정점에 서시오.”

“뭐, 뭐라고?!”

“백도를 좌우하는 천하제일의 거인이 되시오. 당신이 정파 무림을 석권하는 날,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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