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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07화 (107/963)

107화. 고개를 들어야 하늘이 보인다 (1)

연호정과 묵비의 이동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과하다시피 빠르게 움직인 이유는 전적으로 연호정 때문이었다.

“후우. 나도 지치는군.”

연호정이 묵비를 힐끔거렸다.

묵비는 제법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다만 평소와 달리 슬쩍 나무에 기댄 걸 보니 피곤하긴 한 모양이었다.

“너도 다리가 떨리나 보지?”

묵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오랫동안 달려 본 건 처음이라서요. 한 번도 안 쉬었잖아요?”

“그래야 수련이 되지.”

“과유불급이라던데.”

“어디까지 해야 과한지 알아야 과유불급이지. 난 아직 멀었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묵비는 연호정의 얼굴에서 진지함을 느꼈다. 하기야 저 인간은 무공에 한해선 단 한 번도 진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묵비는 내심 치가 떨리는 걸 느꼈다.

‘정말 괴물이야, 괴물.’

신법의 대가인 묵비가 보기에, 연호정의 신법 경지는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하지만 습득 속도가 경이로울 만큼 빨랐다. 애초에 신법의 가장 중요한 요결을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빨랐다.

‘처음에는 거북이가 따로 없더니.’

하루가 다르게 속도가 붙었다. 처음에는 땅을 박찰 때마다 쿵쿵 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고양이가 움직이듯 날렵하고도 가벼웠다.

‘게다가 저 내공 운용은…….’

좋은 신법일수록 적은 내공으로 최대 효율을 추구한다.

연호정이 익힌 신법도 그러했다. 연가 최고의 신법인 천종운행비(天縱運行飛)는 연가가 보유한 검법만큼이나 수준이 높다.

‘성취가 그리 높지는 않아. 그런데도 벌써 극소의 내공 운용을 보이고 있어.’

신법 자체의 성취는 뛰어나지 않지만, 극도로 효율적인 내공 운용으로 빠른 속도와 굉장한 지구력을 동시에 챙겼다.

만일 연호정이 천종운행비를 대성한다면 자신보다도 빠를지도 모르겠다.

‘기(氣)에 대한 이해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거야.’

하긴, 그러니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저런 괴물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고수(內家高手)라는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안 되겠군. 얼마 안 남았지만, 조금만 쉬다 갈까?”

“그럼 안 쉬려고 했어요?”

“목소리에 바짝 날이 섰네.”

“배고프다고요.”

며칠 동안 물만 마시고 뛰어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연호정이 광룡부 창대에 묶어 둔 보자기를 풀었다. 보자기 안에는 다 식은 주먹밥과 육포, 벽곡단 등이 가득했다.

“자, 먹자고.”

두 사람은 냠냠쩝쩝 맛나게 식사했다. 다 식은 음식이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눈물이 나도록 맛있었다.

얼추 배가 차자 묵비가 물었다.

“지평도 봐요?”

“엉? 지평?”

“네.”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지평을 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절강에 있잖아요, 평이도.”

“어? 그랬어?”

“몰랐어요?”

“몰랐지. 아버지가 비응대 딸려서 아는 분께 보냈다고 듣긴 했는데…….”

묵비는 연호정의 무심함에 기가 차는 걸 느꼈다.

“절강 어디…… 막 무슨 산이라고 들었어요.”

“막간산(莫干山)?”

“아, 맞아요. 막간산, 거기로 간다고 했어요.”

연호정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막간산이라…… 멀진 않군.”

모용우는 그보다 더 남쪽인 소흥(紹興)에 있다. 절강 소흥이 바로 모용세가 절강지부의 본부였다.

‘여기서 더 가까워.’

지금 이 위치에서 산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막간산이 나온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일이 있으니 보내셨겠지. 우리는 우리 일에만 집중하면 돼.”

“그렇군요.”

“왜? 지평이 보고 싶냐?”

묵비가 흔치 않게 웃었다.

“귀엽잖아요.”

지난 두 달 동안 묵비와 연지평은 상당히 친해졌다. 그것은 전적으로 연지평의 친화력에 기인했다.

지금에 이르러 두 사람은 거의 남매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묵비가 연지평의 신법을 봐주기도 했다.

묵비는 연위를 어려워했다. 당연히 연위가 직접 가르치는 연지평의 신법을 봐주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녀가 얼마나 연지평을 위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뭐, 일 마치고 돌아갈 때나 한번 들러 보지. 그때 볼 수 있으면 같이 가자고.”

“그럴까요?”

“엉.”

“……히히.”

연호정은 못 볼 꼴 봤다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 그 요망하기 짝이 없는 웃음은?”

“왜요.”

“지평한테 배웠냐?”

“…….”

“지평이 웃을 때는 귀엽던데.”

네가 그리 웃어 봤자 귀엽지도 않다는 뜻이었다. 묵비는 연호정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다가 머리에 구멍 뚫리면 내가 그런 줄 알아요.”

“대가리에 바람구멍 뚫렸는데 생각이란 걸 하겠어?”

“그냥 그런 줄 알라고요.”

연호정은 낄낄낄 웃어 댔다.

묵비는 과거 그가 알던 묵비가 아니었다. 과거와 다른 그녀를 보니 자꾸 농담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쉬었으니 일어날까?”

“벌써요?”

“얼마 안 남았어. 얼추 반나절만 더 가면 항주(杭州)다. 개방에 연락해 뒀으니 좋은 숙소를 잡아 놔 줬을 거라고.”

묵비가 허벅지를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도착하면 오래 쉬는 거 맞죠?”

“그래.”

“알겠어요. 그럼 가죠.”

터어어엉!

두 사람이 재차 신법을 펼쳤다.

반나절 뒤, 그들은 항주에 들어설 수 있었다.

“……!”

묵비가 입을 쩍 벌렸다.

연호정이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어, 엄청나네요!”

항주는 아름다웠다.

멀리서 봤을 때도 그랬지만, 그 안으로 들어서자 항주라는 도시가 주는 분위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실제로 사람도 많아서, 석양이 지는 시각에도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거리에 사람이 많으면 답답하고 시끄러워야 하는데, 그 시끌벅적함조차도 하나의 매력이 되었다. 묵비는 항주가 주는 신비로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사람 많은 거 싫다더니.”

“와아…….”

“너 턱에 침 닦아라.”

“쓰읍.”

“주접 그만 떨고 숙소로 가자.”

“수, 숙소요?”

“그럼? 안 가게?”

“아니요, 가야죠.”

쉬고도 싶고, 이 분위기에 더 젖어 들고 싶기도 하다. 항주엔 피곤조차 잊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거대한 건각이 모인 곳에 도착했다.

묵비는 거의 혼이 달아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반면 연호정의 표정은 묘했다.

“호선대희루(湖鮮大喜樓). 여기구먼?”

백여 년 전에 지어졌다던 항주의 명물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한 번도 본 적 없던 주루였다.

‘이런 외양을 하고 있었군.’

흑암제 시절 항주에 들렀을 때, 호선대희루는 없었다. 엄청난 혈사(血事)에 휩쓸려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과거에 보지 못했던 항주 최고의 주루를, 더욱 이전의 과거로 돌아와 보게 된 것이다.

‘…….’

이 주루가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녀석’ 때문이었다.

오대신장의 하나였던 그 녀석에게는 세 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호선대희루에서 일 년 동안 숙박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자신이 먼저 와 버렸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 녀석들과도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묵비는 운이 좋아 이렇게 만나게 되었지만, 다른 오대신장까지 그러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유인즉, 오대신장 중 셋이 흑도 뒷골목의 파락호들이었기 때문이다.

흑도인의 인생은 부평초와 같다. 여기서 살았다가 저기로 흘러가고, 저기서 살았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번 일이 끝나면 한번 알아봐야겠어.’

녀석들의 재능은 발군이다. 차라리 묵비처럼 빨리 만나서 단련시킨 후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상념을 접은 연호정이 묵비를 끌었다.

“들어가자.”

“네!”

기합이 잔뜩 들어갔구먼.

두 사람이 들어가자 곧바로 점소이가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항주의 거리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의 점소이도 연호정과 묵비를 보면서 개의치 않았다.

연호정은 엄청나게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었고, 묵비는 붉은 활을 들고 있었다. 천하에 강호인이 많다지만 이런 조합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을 보는 눈에 아무런 놀라움이 없었다.

“어떻게 모실까요?”

“개방, 항주지부장이 연호정이라는 이름으로 방 두 개를 예약해 놨을 거요.”

그때였다.

“벽산호장?!”

떠들썩하던 주루 일 층이 일순 조용해졌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사람도, 맛난 음식에 취해 있던 사람도, 조용히 차를 마시던 사람도.

그들 모두가 연호정을 보았다.

“헉! 도끼 엄청 커!”

“아니, 그나저나 누가 벽산호장이라고 하지 않았어?”

“벽산호장? 연호정?”

“연가의 대공자다!”

갑작스레 찾아든 침묵이 그만큼 순식간에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화려한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참.’

사람 눈을 신경 쓰지 않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거의 이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니 그로서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점소이는 연호정의 심경을 눈치챈 듯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각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각 전에 연락을 받았단다. 자신이 항주에 들어서자마자 알았다는 뜻이리라.

과연 개방의 눈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두 남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호선루의 후원으로 들어섰다. 귀빈들만이 쓸 수 있다는 화려한 공간이었다.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깔끔하게 씻은 두 사람은 미리 구비된 무복을 입고 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년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최상층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묵비가 불편하다는 듯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헛기침했다.

“그냥 받아들여.”

과연 유명한 주루라더니 뭐가 달라도 다르다. 묵비는 이러한 대우가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최상층에 도달했다.

“어헉!”

묵비가 입을 떡 벌렸다.

연호정은 작게 중얼거렸다.

“금으로 도배를 했군.”

실제로 금을 도배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정도로 호화로웠다.

게다가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는 그야말로 선경(仙境)이 따로 없었다.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으로는 중원제일을 논한다는 서호(西湖)가 훤히 보였다.

‘진양(秦揚), 그 녀석이 왜 그리 오고 싶어 했는지 알겠군.’

화려함이 지나치면 부담스럽기 마련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 앉으시지요.”

중년 사내는 두 사람을 창가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서호의 풍경이 가장 잘 보이는, 최상층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였다.

자리에 앉던 연호정은 문득 자신에게 향한 시선 중 하나가 꽤 묘하다는 걸 알아챘다.

워낙 쳐다보는 사람이 많다 보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 시선은 달랐다.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는 안광이었다.

차분하게 도끼를 한옆에 세워 둔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모용연화?!’

모용연화는 십여 명의 남녀들과 자리하고 있었다. 이십 대에서 삼십 대 사이로 보이는 젊은이들이었다.

‘왜 여기에?’

호선대희루, 그것도 최상층은 돈이 많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돈 못지않은 명성이 필요했다.

물론 모용연화라면 당연히 최상층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왜 하필 지금 이곳에 있냐는 것이다.

잠시 후, 모용연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설마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모용연화가 화사한 미소를 띠었다.

“얼마 만이죠, 우리?”

……이건 좀 위험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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