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발상의 전환 (4)
파아앙!
마지막 일장(一掌)으로 모든 내공을 소진한 연호정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우.”
며칠 동안 권박(拳撲)만을, 그것도 온종일 수련한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맨몸으로 펼치는 박투술은 권법가(拳法家)가 아니더라도 꼭 필요한 수련이다. 작게는 신체 단련에 용이하고, 크게는 반응 속도와 감각을 키우는 데에 좋다.
하지만 연호정의 권박은 단순히 그러한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도끼를 들지 않아도 전력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 권법만으로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바위에 기대앉은 연호정은 내공을 자연스럽게 풀어 두었다.
우우우웅.
들이쉬는 숨에 백호기가 저절로 일었다. 보다 많은 공기, 많은 자연기(自然氣)를 끌어온 백호기가 온몸으로 기를 퍼트렸다.
혈행이 빨라지자 심장의 주작기가 활발해졌다. 빠르게 도는 혈행으로 일정량의 탁기가 모이니, 신장의 현무기가 솟구치며 모든 탁기를 배출해 냈다.
우우우우웅.
삼신기가 육체를 빠르게 회복하자 벽라진기도 자연스레 일어 힘을 북돋웠다.
“이걸로 오늘 수련은 끝내도록 하고.”
가문으로 돌아온 뒤, 단 한 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무공을 되돌아보는 과정임과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끊임없이 확인해 보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에겐 연지평과 같은 재능은 없되, 아수라장을 거치면서 연마된 자신만의 도(道)가 있었다.
짧은 순간, 이만큼이나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제 슬슬…….”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선택해야지.”
회귀 후 그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가문의 멸문을 막는 것.
둘째, 광신삼교의 중원 침공에 대비하는 것.
당장 가문의 멸문은 막았다. 모용세가가 남아 있긴 하지만, 모용군은 무리해서까지 연가를 공략하진 않을 것이다. 즉,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광신삼교는?
그 역시 시간은 있다. 하지만 가문의 적이 명확하여 미리 선공을 날릴 수 있있던 것과 달리, 광신삼교의 침공을 대비하는 것은 너무나도 광범위하고 모호한 일이었다.
연호정은 그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몰랐다. 다만 새외 어딘가에 본거지를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힘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제한된 정보로는 완전한 대비가 힘들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할 뿐이다.
‘다만 불안한 것은.’
그들의 침공을 막으려는 이유는 하나다. 내 사람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험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모용군.’
무림맹주가 된 모용군과는 달리, 지금의 모용군은 가히 탐욕의 화신과 같았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자와, 모든 것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자의 차이였다. 모용군은 중원 정점이 되기 위해 어떤 악랄한 짓이라도 저지를 것이다.
그리고 이른 시일 내에, 반드시 연가를 치려 할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을 치려 할 것이다.
“모용가의 제어, 삼교의 대비. 둘 중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어. 동시에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모용우였다.
애초에 묵비가 아니었다면 명허림을 잡은 후 곧장 절강으로 향했을 것이다.
‘남궁을 부채질한 건 모용군이 확실해. 나와 남궁이 부딪치길 기대했겠지.’
아주 작은 갈등이라도 생기길 바랐을 것이다. 애초에 사이도 좋지 않았고, 연호정의 성격상 남궁이라고 살갑게 대하지 않을 걸 안 것이다.
그러나 묵비 덕분에 남궁의 시선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일석이조의 상황이 된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일석이조…… 모용우라는 대항마를 세워 모용군을 견제함과 동시에, 무림맹을 장악할 수 있도록 정치적 아군을 만들어야 한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결과를 위해 주변 모든 것을 이용할 것이다.
어떤 의미로는 과거 흑암제 시절보다도 더 독해져야 하는 것이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고소를 지었다.
“이러나저러나, 쉬엄쉬엄 살 운명은 아니로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수욕으로 몸을 깔끔히 한 후 가주실로 향했다.
“대공자님?”
“아버지를 뵈러 왔네.”
늦은 밤이지만 주무시지 않는 걸 안다.
수문검위가 고개를 숙였다.
“기다려 주십시오.”
잠시 후, 수문검위가 말했다.
“연락이 왔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수고하게.”
가주실로 향하던 연호정은 방향을 틀었다. 후원에서 아버지의 강인한 기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후원 연무장에 들어선 연호정의 눈에 빠르게 움직이는 두 사람이 보였다.
쉬이이이익! 쩌어엉!
“허억!”
강렬한 일검에 뒤로 물러난 연지평이 숨을 들이쉬었다.
연위가 중단으로 검을 세웠다.
“다시.”
파아악!
호흡이 그리 거친데도 접근 속도는 빨랐다.
벽에 기대 연지평을 보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한계를 넘었군.’
쩌저저저정!
연지평의 검속은 빨랐다.
그처럼 빠르고 격렬한 검결을 풀어 낼 실력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풀어 내고 있다.
연호정은 연지평의 눈을 보았다.
연지평의 눈은 흐리멍덩했다.
반쯤 정신이 날아가 버린 상태다. 체력도, 내공도 바닥을 드러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의식중에 펼쳐지는 철검대연의 초식들.
제아무리 천재라도 배운 지 얼마 안 된 검법을 무의식중에 구현해 낼 수는 없다. 연지평의 검은 그래서 그답지 않게 사나웠고, 흉포했다.
수십 번의 칼질을 막아 낸 연위가 일순 좌수를 뻗었다.
터엉!
연지평은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멀리 날아가 쓰러졌다.
스르륵.
동시에 연지평의 뒤에서 나타난 연위가 그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우우우우웅!
차갑고도 날카로운 기운이 연지평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후우.”
연지평의 호흡이 순식간에 정상을 찾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체내 온갖 경혈을 자극해 탁기를 몰아내고, 미량의 내공을 전이(轉移), 고농도의 검극사기로 내공 성장을 촉발했다.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격체전력(隔體傳力)?!’
기(氣)는 상위 질을 따라가려는 성질이 있다. 연지평의 몸에 남은 연위의 기는 손상된 혈맥을 치료함과 동시에 연지평의 기를 끊임없이 높은 차원으로 이끌 것이다.
‘역시.’
굉장한 내공 조예다.
정도 이상의 격체전력은 시전자의 내공을 손상시킬 수 있다. 연위는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며 연지평의 내공 수준을 끌어올려 주고 있는 것이다.
“가부좌를 틀어라.”
“쿨럭! 예? 아, 옙!”
정신이 돌아왔는지, 연지평은 곧장 가부좌를 틀고 내공을 운용했다.
순식간에 집중하여 운공 조식에 들어갔다.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놀라지 않을 집중력이었다.
“왔느냐?”
“예.”
연호정이 그제야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연위가 물었다.
“어떻게 보았느냐?”
“예?”
“이러한 수련 말이다.”
연호정은 솔직하게 평했다.
“더 독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
“지평은 알아서 잘 클 놈입니다. 다만 어중간하게 독한 수련으로 성장시킨다면, 훗날 본인의 수련 방법에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연위는 고개를 저었다.
“새삼 네 성정에 놀라게 되는구나. 나는 충분히 독한 수련이라고 생각했다.”
독하긴 독하다. 체력과 내공을 바닥까지 소모한 것도 모자라 정신이 나갈 때까지 몰아붙인 후, 무의식중에 검결을 풀어 내도록 유도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은 아니었다.
“무인은 생사의 간극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법이지요. 목숨을 내놓지 않는 자에겐 한계가 명확합니다. 제아무리 재능이 대단해도 생사의 갈림길을 겪지 못한 자는 반쪽짜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웃으면서 소름 끼치도록 냉정한 말을 한다.
연위가 연호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그리 성장한 것은 목숨을 내놓고 싸웠기 때문이더냐?”
“그렇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흑암제 시절에는 그러했다. 일 년 중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하고 피를 봤으니까.
다만 강해진 이후로는 꼭 생사결에 집착하지 않았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지평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생사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감한 결단과 송곳 같은 살기다.
언젠가는 강제로라도 배워야 할 마음가짐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어인 일로 왔느냐?”
잠시 뜸 들이던 연호정이 물었다.
“무림맹이 곧 창설되지요?”
“그렇다.”
“본가 역시 육대세가의 일원.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수장이라면 최소 무림맹의 장로(長老), 혹은 봉공(奉公)에 추대되실 겁니다.”
“그렇겠지. 무림맹이 계속 유지된다면.”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현재 창설될 무림맹은 임시다. 아직 백도의 전력을 집중할 것인지, 아닌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수장들 간의 회의를 거치고, 이후 여러 명사(名師)와 군소 문파의 대표자들을 불러 결정짓도록 하겠지요.”
“그렇겠지.”
바로 여기다.
연호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는 아버지께서 찬성에 한 표를 던지셨으면 합니다.”
연위의 눈이 커졌다.
“찬성?”
“그렇습니다.”
“찬성…… 찬성이라. 너는 무림맹이 꼭 필요하다고 보느냐?”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물론, 수많은 백도 문파를 제어할 의결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연위의 표정이 변했다.
“이번 명가 사태 때문이더냐?”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 이유도 없진 않습니다.”
“음.”
“그리고 하나 더.”
“……?”
“저는 아버지께서, 지금껏 펼치지 않았던 날개를 마음껏 펼치셔야 할 시기라고도 생각합니다.”
“……날개를 펼쳐라?”
“그렇습니다.”
“네가 참으로 위험한 소리를 하는구나. 설마하니 네 말은……?”
연호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한마디를 뱉었다.
“맹주 자리는 그에 걸맞은 사람을 위해 비워 놔야 합니다. 다만, 맹주와 함께 천하를 휘어잡을 뜻있는 지사(志士)들이 필요합니다.”
“……!!”
“저는 그 지사 중 아버지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놀라운 발언이었다. 연위는 아들이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연호정을 주시했다.
연호정의 얼굴에는 어떠한 결의와 긴장마저 엿보였다. 하지만 맑고 깊은 두 눈에는 어떠한 탐욕도 보이지 않았다.
‘……욕심은 없는가.’
아들의 뜻은 천하에 있었다. 하나 천하제패(天下制霸)라는, 호쾌하게 들리지만 피와 죽음만이 가득한 길을 걷지 않길 바랐다.
다행히도 아들에게선 천하를 손에 쥐려는 야심가의 기질이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러했다.
한참 아들을 주시하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네가 그러한 부분에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한다.”
“…….”
“행여 오해할까 싶어 말한다. 이 애비는 결코 네 능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야. 무공은 둘째 치고, 명가를 상대하며 보여 준 너의 안목과 대응 능력은 능히 천하에 이르러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런 건.”
“허튼소리. 그것은 무재(武才)나 군략지재(軍略智材)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거하는 또 하나의 재능이다. 재능이라 말했지만, 기실 그것은 재능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미지의 그것이었지.”
“…….”
“넌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의 흐름을 읽었고, 스스로에 대한 강한 자신을 가진 채 홀로 세상과 마주해 이겨 냈다. 그것은 재능의 범주를 넘어선, 가히 신안(神眼)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이다.”
아버지는 모른다. 자신이 수십 년간 세상과 드잡이질을 하며 살아왔다는 걸.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살기 위해 싸웠고, 강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연마했던 흑암제로서의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그것을 재능이라고, 신안(神眼)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써 가며 칭찬해 주시는 것이다.
“너는 지평과는 다른 의미로 천재다. 하지만 너의 재능은 위험을 동반한다.”
“위험…….”
“그래, 위험. 평생을 수양에 힘썼던 도사도, 승려도 타락시킬 수 있는 마물에 노출될 위험이 있는 재능이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는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지 마음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제가 욕망에 휘둘릴까 두려우십니까.”
냉엄한 연위의 얼굴에 따스한 기색이 어렸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면, 넌 정말 대단한 것이다. 내 아들이지만, 도무지 혈기 넘치는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제가 욕심에 휘둘릴까 싶어, 그런 부분에 신경 쓰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그럴 리가. 넌 엇나가지 않을 것이다.”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내가 믿으니까.”
“…….”
“다만, 벌써부터 네가 지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 그것을 부모의 아집이라 불러도 좋고, 한물가 버린 세대의 지나친 걱정이라 말해도 좋아.”
“…….”
“너를 믿기 때문에, 내가 이고 가도 되는 짐을 굳이 아들에게 맡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연호정이 눈을 떴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여유가 없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입을 연 것은 일각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말해라.”
“언제고 힘이 들 때, 절대 홀로 해결하려 들지 마시고 절 불러 주십시오.”
연위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서 절강에 널 보내는 것 아니더냐.”
“……하긴, 그것도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가슴 한편에 드리워졌던 걱정이 사라지자, 왠지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가 유쾌해진 얼굴로 말했다.
“누가 뭐래도 저는 제 갈 길을 갈 겁니다. 나중에 아들놈 말을 들을 걸, 하고 후회하지 마십시오.”
“내 언제 너의 말을 무시한다 했더냐?”
“예?”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창설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 깊게 고민해 보마.”
광신삼교의 파멸적인 힘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대비해도 모자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연호정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얼기설기 기워 입은 옷은 금세 해지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선택이 자신의 선택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급하지만, 괜찮다. 아버지가 자신을 믿고 있듯 연호정 역시 아버지를 믿었다.
아버지가 깨달은 삶의 지혜가 통하리라 믿었다.
“괜히 걱정만 많았나 봅니다. 이런 걸 보면 저도 멀긴 멀었어요. 아버지 덕분에 큰 걸 깨달았습니다.”
“그러하냐?”
“그렇습니다.”
“하면, 이 애비가 네 덕에 깨달은 것을 말해 주랴?”
“예?”
“너의 변화를 체감하며, 이 세상이란 무대에서 부모의 역할은 두 가지면 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입니까?”
“내 가족을 지키는 것, 그리고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는 것.”
“…….”
“너는 내가 지켜 주지 않아도 될 만큼 컸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연위가 몸을 돌려 연지평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마. 무엇이라도 품어 주겠다. 힘들 땐 언제고 애비에게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