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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00화 (100/963)

100화.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6)

“후우.”

얼마 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이슬에 젖고 마르길 반복한 옷은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그가 오랫동안 그 자세로 앉아 있었음을 뜻했다.

무아지경(無我之境). 무려 사흘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운공에 들어간 연지평의 눈은 고요한 호수와 같았다.

연지평이 한 줄기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끝났……드다다다! 아이고, 다리야!”

가부좌를 푼 연지평은 곡소리를 내며 다리를 주물렀다.

우우우웅.

서둘러 내공을 운용하니, 어느새 시린 백색 기운이 굳은 양다리로 향했다.

번쩍!

날카로운 기운이 섬전처럼 치닫는다.

비연기와는 전혀 다른 진기였다. 비연기가 순한 녹음(綠陰)의 빛을 만들어 냈다면, 이 진기는 신검보도(神劍寶刀)처럼 서늘한 백색 기운을 자랑했다.

날카롭지만, 동시에 순수하고도 영롱하다. 마치 검객으로서 연지평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 주는 듯했다.

“후우, 됐다.”

다리를 푼 기운이 일순간 온몸으로 치달았다.

굳을 대로 굳었던 몸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아직 관절은 녹이 슨 기분이었지만, 몇 번 몸을 움직이다 보니 금세 괜찮아졌다.

연지평은 가슴 앞에 양손을 모았다. 그러고는 기를 집중했다.

우우웅.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체외로 뿜어진 기가 뭉치고 뭉쳐 은은한 백광(白光)을 만들어 냈다.

연지평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돼, 됐다!”

체내의 진기를 발산, 정밀하게 다루어 압축시켜 체외에 고정해 두었다.

내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기공 제어였다. 열여섯 나이로 구현할 만한 경지가 아니다.

놀랍도록 선명하고 고고한 기운.

그것은 연가의 오대신공 중 하나 검극사기(劍極思氣)였다.

훅!

중단 앞에 만들어 놓은 기운을 그대로 흡수했다.

전신이 기로 충만해지는 듯했다. 뿌듯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히히히.”

혼자 키득거리던 연지평은 이내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꼈다.

“아니야, 여기서 만족해선 안 돼.”

그는 연호정, 형을 떠올렸다.

“형님은 뭔가를 얻었다고 절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어.”

형은 항상 위를 올려다보며 사는 사람이었다.

기실, 그것은 연지평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의 연지평에게는 그러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 형의 자세는 배울 점이 많았다. 그간의 노력이 빛을 발해 지금의 위치로 올라오게 되었다면, 충분히 다진 후 다시 위를 노려야 한다.

아마 강호를 살아가는 모든 무림인이 그러할 것이다. 더 강한 힘, 더 높은 경지를 위해 하루하루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 무림을 살아가는 자들의 숙명이었다.

연지평은 연무장 구석에 놓아 두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억!”

여전히 날이 잘 서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예전보다 광택이 죽었다. 보검(寶劍)이 아닌 평범한 철검인 바에야 며칠 동안 관리를 안 하면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연지평은 누가 볼세라 재빠른 동작으로 검신을 닦았다.

물론 옷자락으로 좀 문지른다고 광택이 돌아올 리는 없었다. 결국 연지평은 울상이 되어 검을 쓰다듬었다.

“미안, 수련 마치고 잘 닦아 줄게.”

생애 처음으로 받은 진검이었다. 이 검을 휘두른 지가 무려 일 년이 넘었다.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

자세를 낮추고 하단으로 검을 내린 연지평.

웃음기 가득하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 무심하게 돌변했다.

파바박!

전면으로 달려 나가는 보법이 빠르고 경쾌했다.

연가의 비전 보법인 천라신보(天羅神步)였다. 하늘 아래 모든 영역을 그물처럼 뒤덮는 절세의 보법, 화후는 낮을지언정 배운 것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 내는 천재의 실력이었다.

환상적인 보법으로 연무장 전체를 누비던 연지평이 비로소 검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퍼퍼펑!

검 끝에서 강한 발경이 터져 나왔다.

강하지만 날카롭다. 순식간에 전방 공기를 거세게 뒤흔든 연지평이 무서운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물처럼 허공을 헤집는 검결, 그답지 않게 난폭하면서도 빠른 쾌검이었다. 철검대연의 난검술(亂劍術)을 펼치는 것이다.

‘어?’

스륵.

검결을 풀어 내던 연지평이 갑자기 자세를 바로 했다.

‘뭐지? 예전하고는 다른데?’

뭐가 달라졌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달라졌다.

그리고 그 변화로 인해, 적어도 지금은 검법을 펼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음, 체력 단련이나 하자.”

꼬르륵.

“……밥부터 먹고.”

스르릉!

“컥! 검도 손질해야 해! 바쁘다, 바빠.”

후다닥 검을 안고 사라지는 연지평.

잠시 후, 빈 연무장에 연위와 연호정이 나타났다.

연위가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어떠하냐?”

연호정은 혀를 내둘렀다.

“저 녀석 저거, 언제 저렇게 성장했답니까?”

“네가 보기에도 제법 하는 것 같으냐?”

“저걸 보고 고작 제법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느 누가 지평 나이에 저런 고차원적인 검도(劍道)를 구현할 수 있겠어요?”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검도(劍道)라. 역시 네가 보는 눈이 있구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몸이 다 성장하지 않아서 생기는 괴리일 뿐, 이미 지평의 검은 경지에 달했다고 봐야 합니다. 다만, 저대로 무공을 수련했다면 검리(劍理)와 육신의 괴리로 자칫 검로(劍路)를 헤맬 수도 있었겠지요.”

“그랬겠지.”

“한데 그걸 깨닫고 수련을 멈추었군요. 고작 칼질 몇 번으로 깨달음이 육체의 단련도를 넘어섰다는 걸 느낀 겁니다. 자신의 성장 지표를 훤히 보고 있다는 뜻이지요.”

연호정은 새삼 동생의 재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감각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천재. 흑제성에도 저런 천재는 없었어.’

단 몇 번의 칼질이었지만 연호정은 동생의 검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연지평이 깨달은 것은 중도(中道)의 검이었다.

그것은 아버지, 연위의 검이 추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검(劍)의 도(道)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은 올바른 길이었다.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거한 위치에서 어떤 수련을 해야 성장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지평은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이다.”

“누구보다도 빨리 강해질 겁니다. 어쩌면 저보다 더요.”

“다만 걱정은 된다. 가파르게 성장하겠지만, 다른 영역처럼 무공 역시 오르면 오를수록 힘들고 버거워지는 법이다. 한 번도 좌절한 적 없던 천재가 벽에 부딪혔을 때 망가지는 것을 많이 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도 연지평이 사라진 그곳을 보고 있었다.

“지평은 잘 해낼 겁니다. 저처럼 엇나가지 않을 거예요.”

연위가 연호정을 보았다.

큰아들은 미소 짓고 있었다. 동생을 보는 눈가에 대견함과 기쁨 외의 감정은 품고 있지 않았다.

마치 자식의 성장에 뿌듯해하는 부모의 표정과 같았다. 동생의 성장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게 느껴졌다.

연위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어렸다.

‘너 역시 엇나가지 않았다.’

한때의 엇나감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연호정은 자신을 이겨 내고 어느새 이만큼이나 성장했다.

결과적으로 연호정 역시 엇나가지 않고 곧게 잘 큰 셈이었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천하로 눈을 돌린 첫째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선 둘째보다도 더 큰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연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첫째가 돌아와서 그럴까? 불쑥 아내 생각이 났다.

무심했던 그의 두 눈에 언뜻 따뜻한 빛이 어른거렸다.

‘당신이 잘 지켜봐 준 덕분에, 우리 자식들이 이리 바르게 컸소.’

연위는 진심으로 자신이 한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먼저 떠난 아내가, 하늘에서 두 아들에게 힘을 주었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리 바르게들 컸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은 지금껏 자식들에게 해 준 게 없으니, 지금이라도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리라.

“올라가자.”

“예.”

부자가 연무장 중앙에 섰다.

연무장에 올라서자마자 두 사람의 분위기는 일변했다.

연위가 연호정이 지고 있는 도끼를 보았다.

“많이 거칠어졌구나.”

연호정이 도끼날을 두들겼다.

“한번 손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명가를 상대로 워낙 여러 번 부딪쳐서 그런지 날이 꽤 상했어요.”

“날만 상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만.”

“예. 아직은 괜찮지만, 창대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무공 충돌의 여파가 컸다 한들, 그 큰 중병이 벌써 그리 손상되기는 어렵다.”

“예.”

“그만큼 너의 내공이 극강(極强)하다는 증거다. 한없이 강하기만 한 기질(氣質)은 필연코 몸에 부담을 주게 되지. 만일 너의 내공 제어가 완벽했다면, 그 정도로 훼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주작, 백호, 현무.

사신무의 세 기운을 얻었고, 각 기운을 완벽하게 제어한 그였다.

하지만 그것은 진기를 다룸에 있어 어떠한 문제도 없었음을 뜻한다. 진기 자체를 올바르게 갈고 닦는 시간을 따로 두진 않았다. 알아서 다듬어질 테니까.

다만, 여느 보병(寶兵)을 휘두르지 않는 한 어떤 병기를 쥐더라도 수명은 짧을 것이다.

“내일 편 신공께 가 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스르릉.

연위가 검을 뽑아 들었다.

예전, 연호정을 상대로 휘둘렀던 수련용 중검이 아닌 삼 척 반 길이의 철제 장검이었다.

연호정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후웅.

자연스레 이는 바람에 무시무시한 검기(劍氣)가 실려 있었다.

‘진심이시군.’

애검(愛劍)을 들진 않으셨다.

하지만 진심이다. 예전처럼 수준에 맞는 비무가 아닌, 벽산연가의 가주이자 명숙의 반열에 오른 판관검으로서 이 자리에 선 것이다.

“네가 얻은 것들, 오늘 이 자리에서 전부 풀어 보아라.”

“알겠습니다.”

“아들의 몸에 생채기를 내고 싶진 않다. 하나, 진신진력을 뽑아내지 않는 한 다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도록 하라.”

쾅!

연무장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듯했다.

츠츠츠츠츠.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진각으로 힘을 뽑은 연호정은 도끼를 우하단으로 내렸다.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놀라운 기!’

첫째의 발밑에서부터 새하얀 기운이 연기처럼 올라오는 듯했다.

그 기운이 놀랍도록 강인하고 서늘했다. 천하 어디에서도 저런 기운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사신무에서 가장 공격적인 기운. 경인(庚寅)의 금신(金神), 바람의 지배자 백호가 포효하고 있었다.

후우우우우웅!

사방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연호정이 도끼 끝에 맺혔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연위는 아들의 열린 입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새하얀 폭풍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만…….”

훅!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세로 상대를 압박한다.

벽라진기를 기반으로 한 백호의 기세가 끝 간 데 모르고 퍼져 나갔다.

쩌저저적!

연호정이 선 땅 주변이 원을 그리며 깨져 나갔다. 연무장의 단단한 땅이, 쏟아지는 기의 압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연위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이럴 수가.’

기압만으로 외물에 영향을 주는 경지다.

설마설마했거늘 정녕 아들의 경지는 대문파 장로라 해도 승부를 결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올라서 있었다. 고작 몇 달 만에!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콰아앙!

지극히 전투적인 일 보였다.

강력한 진각과 함께 힘을 받은 연호정이 폭풍 같은 기세로 도끼를 휘둘렀다.

부아아아앙!

어찌나 강하게 휘두르는지 강철 쇠봉이 휘어질 것만 같다.

놀랍게도 목표는 연위의 쇄골이었다. 몸통째 사선으로 갈라 버릴 기세, 상대를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한 사람의 무인으로 보고 있다는 증거였다.

찰나지간, 연위의 얼굴에 묘한 설렘이 일었다.

이 투기(鬪氣), 이 압박감.

검사로서 얼마 만에 받아 보는 압력이던가. 연가의 가주로서 생사(生死)라는 두 글자를 떠올린 지금, 그는 긴장보다 들끓는 전의(戰意)를 느꼈다.

‘좋구나!’

연위의 검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두 사람의 병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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