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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8화 (98/963)

98화.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4)

“얼씨구? 저 거지 놈이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대? 드디어 방주직에서 쫓겨났남?”

“용두방주라는 자리는 누군가에게 쫓겨나는 자리가 아니라고 내 몇 번을 얘기했느냐?”

“킬킬킬.”

“괴상하게 웃지 좀 마라. 듣기 싫다.”

“듣기 싫으면 오질 말지.”

“이놈의 자식은 나이도 어리면서 말하는 싸가지가 아주.”

“나이 따져 가며 친구 먹는 시대는 지났다며?”

“그것도 정도가 있지, 인마. 아직 지천명(知天命)도 안 된 놈이.”

“그럼 거지를 형님으로 모실까? 어디서 개수작을.”

“너 그러다 진짜 한 대 맞는다.”

“쳐라, 쳐.”

퍽!

“억! 너 진짜 쳤어!”

“시끄럽고 술이나 한잔 내와 봐. 쓰벌, 힘들어 죽겠네. 하는 일도 없는 놈이 뭣 하러 이 높은 산에 도관을 지어 놨대?”

도사는 투덜거리면서도 일어났다.

부엌으로 향하며 구시렁대는 말을 들어 보니 가관이 따로 없었다. ‘도관에 와서 왜 술을 찾고 지랄이야?’, ‘근데 술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저 개놈 새끼 뒈지는 꼴을 꼭 보고 죽어야 하는데.’, ‘거지새끼가 명줄 하나는 오지게 길어요.’ 따위의, 듣는 사람 혈압 오르게 만드는 내용이었다.

화진천은 인내했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천하다는 거지가 아닌가. 그런 거지 중에 대왕이라 해 봤자 결국 거지다.

인내 없이는 이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그는 새삼 지난 세월을 버텨 온 자신의 인내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도사가 술상을 봐 왔다.

“얼래? 술만 가져오랬더니 그건 뭐여?”

“뭐긴 뭐야, 이 더러운 놈아. 육포다.”

“도사 맞지?”

“시끄러워.”

“나 오는 건 알고 있었나?”

“그럼 그것도 모르면서 점복(占卜)으로 밥 빌어먹고 살겠어?”

“어차피 점 보러 오는 사람도 없는 주제에.”

“아, 술상이나 좀 받아! 허리 아파!”

잠시 후, 도관 앞 공터에 술상을 차린 두 사람이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도사, 통천진인(通天眞人)이 물었다.

“그나저나 여긴 또 어쩐 일이야?”

화진천이 콧방귀를 뀌었다.

“점복사(占卜士)를 왜 찾아왔겠어? 뭣 좀 알아보려고 왔지.”

“미친. 천하제일방이라며? 천하 정보는 꽉 잡고 있다며? 근데 뭘 알아봐?”

“정보랑 점이랑 같냐?”

“복채는 넉넉하고?”

“재물도 많은 놈이 욕심은.”

“그거랑 그거랑 다르지, 이놈아!”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애들 시켜서 보낼 테니까.”

통천진인의 얼굴에서 서서히 장난기가 사라졌다.

장난기 넘치는 얼굴과 진지한 얼굴의 차이가 무척 심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구주가(九州家) 때문이지?”

화진천의 눈이 빛났다.

역시나 이놈은 알고 있었다. 높은 산 정상에 앉아서 천하를 보는 놈이었다.

“구주가도 엮였지. 하지만 묻고 싶은 건 좀 달라.”

“필시 구주가를 무너트리는 데의 선봉에 선 젊은 호랑이 때문이렷다?”

화진철의 얼굴에 진지함이 어렸다.

“그래, 그 녀석 때문에 왔다. 더 정확히는, 네가 말했던 것과는 세상이 다르게 돌아가는 게 의아해서 왔지.”

통천진인.

당대 강호에는 세 명의 기인(奇人)이 있다고 한다. 그 세 기인은 각기 한 분야에 정통했고, 그 수준이 하늘에 달했다 해서 통천(通天)이란 칭호를 받았다.

강호삼기(江湖三奇). 혹은 무림삼통(武林三通).

통천진인은 바로 그 삼기의 하나이자, 삼기 중 가장 만나기 힘들다는 최고 기인이었다.

“너의 점복술이 하늘의 경지에 달했다는 걸 모르지 않아. 그리고 그 점복이 철저하게 제한된 능력을 보인다는 것도.”

통천진인은 천하의 흐름과 이치를 본다. 가끔 미래를 예지하기도 했고, 사람의 운명을 알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한정된 능력일 뿐이다. 통천진인과 만난 사람도 거의 없을뿐더러, 만났다 해도 그날의 운수에 따라 점복을 못 보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한 번 입 밖에 낸 점복은 틀리지 않는다. 지금껏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통천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경지에 달했다니, 우스운 소리지. 그저 타고난 신기가 너무 강해서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을 뿐이야.”

“뭐가 됐든.”

“나는 하늘의 틈새를 겨우 엿보고 있을 뿐, 통달하지는 못했네. 하늘의 이치에 통달했으면 진즉 신선이 되었겠지.”

“신선이라는 게 있기는 있나?”

“믿으면 있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의 눈에는 없겠지.”

“됐다. 말 같지도 않은 선문답은 사양이야.”

“이게 왜 선문답이야?”

“시끄러워.”

“참나, 이놈의 거지는 도통…….”

“됐으니까 말이나 해 봐. 왜 달라진 거냐? 아니, 왜 틀렸냐?”

통천진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나도 모른다.”

“몰라? 천하의 통천진인이?”

“비꼬는 거 아니지?”

“농담하지 말고 얘기해. 진지하니까.”

“쩝, 나도 몰라. 말했다시피, 그런 것까지 다 알면 그게 사람인가? 신선이지.”

“음…….”

“다만 걸리는 건 하나 있지.”

“뭔데?”

가득 채운 술잔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은 통천진인이 대번에 트림을 뱉었다.

“작년 언제인가…… 그래, 아마 가을이었던 것 같군. 그즈음에 뭔가가 달라졌어.”

“작년 가을?”

“천기(天機)라고 해야 할지, 천기(天氣)라고 해야 할지.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하늘 저편에서 잔뜩 일그러지는 걸 봤다네.”

“천기라…….”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네. 사실 지금도 정확히는 몰라. 다만 그때의 그 변화가, 과거 내가 예측한 것과는 다른 미래가 그려진 시발점이라고 추측하고 있네.”

“……어렵군.”

“어렵진 않지만 절망적인 얘기 하나 해 줄까?”

“뭔데?”

통천진인이 씁쓸하게 말했다.

“앞으로 자네가 여기 올 일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안 보여, 그때부터.”

“……뭐?”

“안 보인다고. 점복이 안 돼.”

화진천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점복이 안 된다고?”

“응, 안 돼. 오만 애를 써도 안 보이더라고.”

“……그럴 리가? 잠깐만! 자네, 내가 오늘 찾아올 것도 알았잖나? 구주명가가 무림공적이 되어 사라진 것도, 명가를 무너트리는 데 앞장선 놈의 정체도 알고 있었잖은가?!”

통천진인이 코웃음을 쳤다.

“자네 정말 개방의 수장이 맞나?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바보가 되었어?”

“잉?”

“명가가 무림공적이 된 거야 천하에 파다한데 그걸 모르는 게 말이 돼? 생필품 사러 저자에 내려갈 때마다 사방에서 그 얘기더구먼. 그리고 그 누구야, 연가의 장남 놈?”

“연호정.”

“그래, 그놈 얘기도 여태 들려오더구먼. 강동의 젊은 호랑이, 손책과 육손이 한 몸으로 환생한 남자. 요새는 벽산호장이라 불린다고?”

“그, 그렇지?”

“내 높은 산에 산다 해서 속세에 내려가지 않는 건 아니야. 다 알면서 그래.”

화진천이 다급히 물었다.

“그럼 내가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거?”

통천진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품에서 얇은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여기 적어 놨지.”

“그게 뭐야?”

“어느 순간 안 보인 게 아니야.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안 보이기 시작한 거지. 혹시 몰라서 보인 것들은 다 적어 놨다네.”

“……!”

“그리고.”

통천진인이 책자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멀리 날아간 책자가 바람에 날려 절벽 밑으로 떨어져 버렸다.

화진천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무, 무슨 짓인가?!”

“자네가 오는 게 저 서책의 마지막 줄이었다네.”

“이런…….”

통천진인이 피식 웃었다.

“뭘 그리 놀라나?”

“아니…… 설마 자네가 점복술을 상실할 줄은…….”

“점복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리 호들갑이야?”

“뭐?”

“신기가 들어 도사가 되었고, 상단전(上丹田)을 수습했어. 하나, 나는 어디까지나 도인일 뿐이야. 그저 점복에 재능이 있어 이런저런 사실을 알려 줬지만, 그마저도 원하는 것만 골라서 보는 게 아니었더랬지.”

“……!”

“승려가 팔 하나 잃었다고 부처를 못 모시고, 도사가 눈이 안 보인다고 도를 못 닦나? 그렇게 안타까워할 것 없네.”

화진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소식통 하나 사라졌구먼.”

통천진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가 그간 너무 요령을 부린 것이지. 고백 하나 하자면, 자네가 점 보러 올 때 빤히 보였음에도 말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네.”

“뭐? 이 미친 도사가 날 속였어?”

“말해 주는 거야 어렵진 않지만, 그랬다간 천기가 어그러지는걸?”

“……?!”

“자네의 영향력을 무시하지 말게. 용두방주가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천하가 흔들리잖는가. 그런 자네에게 운명을 가르쳐 주고 미래를 예지하면, 그 자체로 역천(逆天)이 아니겠는가?”

화진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술을 한 모금 홀짝인 통천진인이 담백한 어조로 말했다.

“인생에 답안지가 어디 있나? 앞날을 모르기에 오늘이 소중한 것이지. 그게 삶이라네. 고로, 점복에 의지하는 건 좋지 않아.”

“염병, 도사라고 문자 좀 읊는구먼.”

“하하하!”

통천진인의 웃음은 무척이나 듣기가 좋았다.

가히 신기(神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점복술을 잃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 낸 듯도 보였다.

화진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친구 놈이 제 장기를 잃은 건 당사자에게도, 자신에게도 손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저리 기뻐하니 어쩌겠나? 함께 기뻐해 줄 수밖에.

“앞으로는 더 자주 옴세.”

“오? 위로해 주는 건가?”

“위로는 무슨. 조만간 제자 놈한테 방주직을 물려줄 생각이야. 늘그막에 적적하니 술친구나 되어 주라고.”

“그 망나니 놈이 벌써 그리 컸나? 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멀어도 한참 멀었어. 그래도 품고 있는 의기(義氣)와 정심(貞心)은 그럴듯하더군.”

“자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걸물이 다 된 모양일세.”

“무공 단련만 제대로 하면 뭐, 더할 나위 없지.”

화진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가야겠네. 좀 바쁘거든.”

통천진인이 손을 흔들었다.

“언제든 찾아오시게.”

“조만간 그 옆에 방 하나 만들 테니 쫓아내지나 말게.”

“하하하!”

* * *

“음.”

오늘 하루도 무척이나 바빴다.

무공의 고수가 고작 하루 업무로 몸에 이상이 오진 않지만, 심력 소모는 상당했다. 심지어 이 일을 십 년이 넘도록 하고 있다.

연위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딱히 목이 굳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주물러 주면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것 같았다.

옆에서 연위를 보던 이백현이 문서들을 정리했다.

“나머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만 쉬시지요, 가주님.”

“그러지.”

“아, 그리고 총관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슬슬 사람을 뽑으셔야 할 텐데요.”

연위가 이백현을 힐끔거렸다.

“괜찮다면 자네가 해 보지 그러나.”

“저, 저요?”

이백현이 손사래를 쳤다.

“저 정도 능력으로 어찌 연가의 총관이 되겠습니까? 저는 그저 보조하는 정도면 족합니다.”

“충분히 잘해 주고 있네.”

이백현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설마하니 가주님께서 저리 어마어마한 칭찬을 해 주실 줄은 몰랐다. 너무 당황했는지 이백현은 얼굴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 저, 저는 절대로…… 느, 능력이 부족하고…….”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가 보시게.”

“헉! 옙!”

이백현이 후다닥 가주실을 나섰다. 마치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움직임이 대단히 빨랐다.

연위가 의자에 등을 묻었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가 보람찼다. 강소의 사업 안정도 그랬고, 가내 공사도 순조로웠으며 특히 둘째의 성장이 놀라웠다.

내일도 오늘과 같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힘들어도 보람이 있는, 희망찬 내일을 꿈꿀 수 있는 하루를 바랐다.

‘둘째는 아직 운공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 첫 무아지경(無我之境)이니, 그럴 만도 한가.’

연위가 눈을 감았다. 운공으로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것이다.

아들은 큰 고비이자 기회를 맞아 싸우고 있다. 자신 역시 가주이자 아버지로서 힘을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가, 가주님!”

운공을 멈춘 연위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대, 대공자가 왔습니다!”

순간 연위의 눈이 번쩍 뜨였다.

“호정이 왔다고?”

“예! 그, 그런데…….”

“왜 그러시는가?”

이백현의 말은 압권이었다.

“예쁜 소저를 데리고 와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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