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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7화 (97/963)

97화.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3)

팔공산으로 정찰을 나간 남궁신은 개방에게 은밀한 정보 하나를 받았다. 그것은 바로 안휘혈궁을 키워 낸, 그런 이들이 득실거리는 마도(魔道) 문파에 대한 정보였다.

개방의 상세한 정보를 본 남궁신은 곧장 남궁본가에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무력이 여느 중소 문파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강호가 모르는 비밀 문파. 신비의 조직.

그런 문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강호에는 모래알처럼 많은 게 은자(隱者)라는 말처럼, 대외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문파도 많았던 것이다.

남궁가주 남궁인은 보통 사태가 아님을 직감, 장로 둘과 무력 조직 셋을 더 보냈다.

그 정도 병력이면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반 시진 내로 쓸어 버릴 전력이었다. 남궁인이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휘혈궁으로 인해 금검문이 멸문을 당했다.

금검문은 만인이 칭송하는 문파였다. 안휘 북부에서는 남궁세가보다도 인망이 높을 정도였다.

그런 문파를 멸문했으니, 안휘의 패자라는 남궁세가가 응당 복수를 해 주어야 함이 옳았다. 한데 오 년이 지나도록 안휘혈궁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그 와중에 개방에서 이런 먹음직한 정보를 주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남궁인은 이번 기회에 안휘의 분위기를 쇄신함과 동시에, 천하에 가문의 명성을 각인시키리라 생각했다.

출처는 개방.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한 인증이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렇게 남궁의 병력이 관일곡의 본산, 산동 태산(泰山)으로 향했다.

* * *

“중간에 날뛸까 싶어 미리 단전을 폐했네. 이대로 이송하면 될 거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황풍정 정보원의 말투가 바뀌었다.

그럴 만도 했다. 명허림은 이전에도 쌍룡삼봉으로 손꼽히는 절정고수였다. 그런 그가 마공까지 익혔으니 그 무위야 말해서 무엇 하겠나.

연호정은 그런 고수를 상처 하나 없이 제압했다. 경이로운 무력이었다.

“아, 그리고 이 말을 모용가주께 전해 드리게.”

“말씀하십시오.”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다고. 앞으로 내 선물도 기대하시라고 전해 드리게.”

“그것이면 됩니까?”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고생이 많네. 이만 가 보게.”

“그럼.”

그렇게 황풍정을 보낸 연호정은 곧바로 주루로 향했다.

“음? 안 자고 있었냐?”

묵비가 어색한 얼굴로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잠이 안 와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거 아냐? 밥은?”

“…….”

“밥도 안 먹었어?”

“생각이 없어서…….”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 묻자.”

“네?”

“너, 무림인이 될 생각이냐?”

이 질문은 중요했다.

연호정은 묵비가 자신과 함께하기를 바랐다. 과거의 인연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녀의 힘이 절실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림을 택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깨끗하게 보내 줄 생각이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음 없는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느니, 그 시간에 가능성 있는 자들을 하나라도 더 물색해 보는 게 낫다.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정하지는 못했어요.”

“틀렸어.”

“네?”

“그 부분만큼은 지금 정해야 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왜, 왜죠?”

“내가 무림인이기 때문이다.”

“…….”

“너는 무공을 익혔지만, 무림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해. 이유인즉, 강호 무림의 어떤 문파나 무인하고도 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당장 어느 마을로 가서 밭을 일구며 살아도 되겠지.”

“…….”

“하지만 날 따라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나는 무림인이다. 그리고 훗날 천하에 닥칠 재앙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다.”

천하, 재앙.

참으로 거창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부터 쳤을 것이다.

하지만 묵비는 그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연호정의 표정은 그만큼 진지했다.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목소리에는 힘과 위엄이 넘쳤다.

누구도 비웃을 수 없는, 비웃어서는 안 될 분위기였다.

“내게는 힘이 필요해. 모두를 지킬 힘이. 그것은 나 혼자 강하다고 이룰 수 있는 평화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미래를 만천하에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래 봤자 믿지도 않을 테니까.”

“나, 나는…….”

“만약 네가 무림인이 아닌 평범한 삶을 바란다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마.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

타인에게 강요당하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연호정과 손을 잡는 즉시 그녀는 무림이란 마물들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세상. 사소한 시비로 문파 대 문파의 국지전이 터질 수도 있고, 자존심 하나에 목숨이 오가며, 아무런 은원이 없어도 암살을 당할 수 있는 살벌한 세계.

또한.

많은 것에 얽매이면서, 동시에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세상. 사소한 도움에 목숨을 바치는 호걸들이 살아가고, 철천지원수조차도 용서할 수 있는 낭만의 세계.

만일 평범한 삶을 택한다면 더는 연호정과 함께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무림에서 살아가려면 연호정과 함께하면 된다. 적어도 당분간은.

“제대로 된 삶을 살아 보지도 않은 너에게 무리한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걸 안다. 그래도 해야 해. 지금의 이 선택은, 그간 네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내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연호정을 올려다보는 묵비의 눈이 떨려 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소 멍했던 초점이 점차 살아나고, 흔들리던 눈도 이내 고요를 되찾았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킨 묵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궁수예요. 기본적인 시서예화(詩書禮話)는 배웠지만, 그래도 제가 궁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관일곡은 너에게 있어 원수인가?”

뜬금없는 질문임에도 묵비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원수예요. 충분히.”

“왜 그리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겠다. 오지랖일 테니까. 다시 묻겠다. 넌 원수들이 네게 안겨 준 힘을 갖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묵비가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내 손으로 해치지 않고 남의 손을 빌리기까지 한걸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의미 없다는 거죠. 그런 건.”

“하하.”

유쾌한 한 방이었다. 연호정은 사심 없이 웃었다.

“그래서, 궁수에게는 궁수에게 맞는 세상이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 삶은 최고가 되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내게 어울리는 삶은, 밭을 일구고 글을 읽는 삶은 아니죠.”

연호정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너를 설득할 거다. 네가 내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할 수 있도록.”

묵비가 그 손을 잡았다.

“그렇다고 내 호기심을 죽이진 말아요. 그럴 능력도 없겠지만.”

연호정의 손을 잡은 묵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꼬르르륵.

“아…….”

묵비가 얼굴을 붉혔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네 인생을 선택하기에 앞서 속부터 관리해. 무림인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의 몸 상태를 유지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알겠어요.”

“그리고 너, 안 씻은 지 얼마나 됐냐?”

“……냄새나요?”

“야인인 줄 알았다.”

목까지 빨갛게 익었다. 하긴 팔공산에서 나온 이후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도통 씻지를 못했다.

“밥부터 먹고, 싹 씻고, 잠 한숨 죽은 것처럼 때린 뒤에 가 보자고.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술은 할 줄 아나?”

“술이요?”

“못하는군. 됐다, 그럼. 밥만 시키지.”

“아, 아니에요. 먼저 씻고 올게요.”

“그러든가.”

문을 열고 나간 묵비는 문득 복도 곳곳의 창가를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무척이나 상쾌해 보였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새들이 떼를 지어 하늘을 날았다.

멍하니 새들을 바라보던 묵비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짧지만 격렬했던, 그랬기에 화인처럼 박인 지난 생이 떠올랐다.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고문에 가까운 무공 연마로 평생을 보냈다. 누구도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죽이라고 강요하는 이들의 억압 속에서 벌벌 떨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유를 원했고, 사람다운 삶을 원했다. 귀궁수가 될 생각이 없으면 살 가치도 없으니, 그 자리에서 죽이겠다고 말하는 어르신들을 끔찍하게 증오했다.

결국 자신을 증오했던 형제들도 다 죽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은 세상에 홀로 남게 되었다.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세상에 나가기가 싫었다. 그냥 아무 산에나 들어가서 자연과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살면, 정말 망가져 버릴 것을 직감했기에.

좌절과 고독에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지만, 그래도 웃으며 나아가야 미래가 보일 것이라는 걸 알기에.

‘오라버니, 언니들. 죄송해요. 하지만 저, 한번 열심히 살아 볼게요.’

홀로 살아남은 것이 죄스러웠다. 그래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크게 심호흡한 묵비가 애써 활짝 웃었다.

“누구보다 멋지게 살 거야. 누구보다도.”

그때, 문이 열리며 연호정이 말했다.

“뭐 해, 인마. 복도에 냄새 퍼트리지 말고 얼른 씻으러 가.”

묵비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욧!”

다음 날 새벽.

“준비 끝났어?”

“네.”

“좋아, 슬슬 움직여 보자고.”

“그런데 어디로 가요?”

“원래는 만날 사람이 있어서 절강에 가려고 했는데, 일단 집부터 가려고.”

“집이요?”

“그래, 집. 가서 뜨신 밥 먹고 푹 쉬다가, 재정비 좀 하고 나올 생각이다.”

“아…….”

“왜? 벌써 손이 근질거리나? 시위 당기고 싶어 죽겠어?”

“아니에요. 그저…… 집으로 간다고 하기에.”

“걱정하지 마라. 우리 아버지, 말수는 없어도 좋은 분이야. 동생은 워낙에 착하니까 어울리는 데에 무리가 없을 거다.”

“아, 알겠어요.”

“그나저나…….”

연호정이 묵비의 등에 걸린 각궁을 바라보았다.

“이거 시위가 좀 늘어난 것 같은데?”

묵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내공이 크게 늘어서 힘 조절을 못 했나 봐요.”

“흐음, 그러신가.”

연호정은 어떻게 내공이 늘었는지를 굳이 묻지 않았다.

그는 문득 자신의 도끼를 바라보았다.

도끼날은 거친 흉터로 가득했다. 워낙 파괴력 넘치는 공방을 주고받다 보니 날이 상한 것이다. 하기야 창대가 부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리고 창대 끝.

그곳에는 고리도 없었다. 어차피 ‘그’ 물건은 따로 구해야 할 것이나, 혹시나 괜찮은 물건이 있을 수도 있었다.

“가는 길에 대장간도 들러야겠군.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준비해야겠어.”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았다.

무공은 물론 병기도 갖춰지지 않았다. 사음교를 막기 위한 사전 작업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음교, 아니 광신삼교의 광기 어린 진격을 막기 위한 첫걸음.

흑도를 지배했던 흑암의 제왕이 벽산의 호장으로 둔갑하여 미래를 대비한다. 예전에는 없었던 가족과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만난 전우(戰友)가 범의 등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과거와는 완전히 다르게 쓰이고 있는 역사.

연호정은 자신이 만들어 가고 있는 새로운 역사가 평화로운 미래의 토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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