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2)
연호정을 보는 남궁신(南宮信)의 눈은 솔직한 감탄으로 가득했다.
“자네가 연호정인가?”
“나를 아시오?”
후우우웅.
남궁신의 후방에 선 검사들의 몸에서 서늘한 예기가 뿜어졌다.
남궁신은 남궁세가 팔대장로 중 직계의 마지막 장로였다. 배분은 가주와 동급이란 말이다.
한데 이제 약관이나 되었을 법한 젊은 놈의 말투가 참으로 고약하다. 그것이 검사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하나 당사자인 남궁신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고 있다네.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엄청난 도끼만 봐도 짐작할 수 있지. 게다가 무의식적으로 전해져 오는 이 기도, 도저히 젊은이의 그것답지 않구먼.”
의외로 남궁신은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얼굴 위로 순수한 감탄과 기쁨이 가득했다.
“천하제일가를 홀로 상대하는 배짱을 보여 주었다고 하더니, 과연 대단한 인재일세. 벽산호장(碧山虎將)이라는 별호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려.”
벽산호장?
‘우습지도 않군.’
광풍사라고 불러 대던 게 언제인데 이번에는 또 벽산호장이란다. 자신도 무림인이지만, 정말이지 무림인들의 호들갑은 알아줄 만했다.
“아, 미안하네. 사람 세워 놓고 내 소개도 하지 않았구먼. 나는 안휘 남궁가의 신(信)이라는 사람일세.”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남궁신이 입맛을 다셨다.
“들어 본 적 없나?”
“내가 원래 남에게 관심이 없소.”
아무리 생각해도 무림의 선배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남궁신은 연가주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검사들의 눈빛이 점차 차가워졌다. 은근하게 뿜어내는 예기도 점점 강해졌다.
남궁신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호쾌한 청년이로세. 암, 사내라면 그만한 배포는 있어야지.”
“어쨌든 이만 가겠소. 길을 비켜 주시오.”
“그 전에.”
“……?”
“자네 옆구리에 든 그 자, 명허림이 맞는가?”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순간적으로 ‘어떻게 알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궁세가 역시 무림맹의 중추 세력이다. 명허림이 안휘로 향하는 것쯤은 충분히 알 만했다.
“그렇소.”
“역시 그렇구먼. 무림공적 명가의 민낯을 까발린 젊은 영웅이 도주한 공적의 아들까지 잡았어. 자네의 명성이 또 한 차례 대강남북(大江南北)을 뒤흔들겠구먼.”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귀찮음이 묻어 나오는 행동이었다.
“이만 길을 비켜 주시오. 갈 길이 바쁘오.”
“허! 그래야지. 우리 쪽에서 먼저 잡으려고 했거늘, 아쉽게 되었네. 하긴 누가 잡든 무슨 상관인가. 잡았으면 된 것이지.”
못내 아쉬운 듯 명허림을 힐끔거린 남궁신이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길을 터 주어라.”
서른 명의 검사들이 좌우로 도열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상당하군.’
좌우에서 느껴지는 예기가 굉장했다.
평범한 무력 조직이 아니었다. 아마 남궁에서도 손에 꼽히는 전투 부대가 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연호정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그는 뚜벅뚜벅 길을 걸어 나갔다.
그때였다.
“한데 자네.”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예전, 자네가 내 조카들을 제법 혼내 줬다고 들었네.”
“…….”
“허허, 긴장할 필요 없네. 비록 조카들이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 아이들이 심했어. 현이는 협잡을 저질렀고, 상화는 행실이 경망스러워 어린애들이나 저지를 법한 치졸한 모습을 보였지.”
“한데?”
“한데…….”
남궁신의 미소는 여전했다.
“그 두 사건이야 이해하는 바지만, 다른 하나의 사건은 제아무리 나라도 이해가 안 되어서 말일세.”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를 하시구려.”
남궁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리 시원하게 나와 주니, 나도 허례허식은 집어치우고 말하겠네.”
미소 가득하던 남궁신의 얼굴이 한순간 싸늘하게 굳어졌다.
“현이의 배필이 될 아이와 친분이 있다지?”
연호정은 금세 한 사람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갈아연?”
“그래, 제갈아연. 그 아이를 말함이네.”
“친분이라…… 대단한 친분이랄 건 없소만.”
“허허, 그런 말로 자연스레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곤란하네. 기실, 자네와 제갈아연 그 아이의 친분이 얼마나 깊든 굳이 관여할 바 아니지만, 상황이 묘하게 나쁘군.”
남궁신이 눈살을 찌푸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런 일에 끼어들기는 떨떠름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가문의 장로로서도, 숙부로서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본가에선 제갈세가에 매파를 보냈다네. 제갈아연, 그 아이에게 말이지.”
“알고 있소.”
“알고 있다? 허허, 그렇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남궁신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제갈가의 장녀와 만나지 말게. 그 아이는 본가 이공자의 아내가 될 처자이니.”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남궁신의 눈이 깊어졌다.
“왜 그리 웃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제갈세가에서는 남궁세가와의 혼담을 거절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한데 남궁세가에선 며느릿감이라고 잡소문을 내지 말라고 한다.
괜한 시비를 걸고 싶어 하는 말인가, 싶었지만 딱히 그건 아닌 듯했다.
‘어찌 되었든 알고는 있었군.’
연호정에게 중요한 건 제갈아연과 남궁현의 혼사 따위가 아니었다.
‘이놈들은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알고 있었어.’
이번 일은 모용군과 자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남궁세가 역시 명허림을 잡으려 병력을 파견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 만남이 우연이라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모용군.’
뻔히 보이는 수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모용군이 저지른 게 확실했다.
이유인즉, 알아도 따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증거도 없고, 괜한 분란을 일으켜 잡소문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남궁세가 측과도 마찬가지였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애초에 내가 먼저 그 녀석을 만나자고 한 적은 없소이다. 그 녀석이 먼저 날 찾았지.”
다행이었다.
다행이긴 다행이되, 묘하게 기분 나쁜 말이었다. 차라리 연호정이 제갈아연에게 마음이 있다면 모를까, 그 반대가 되면 남궁 쪽에서도 골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리 눈에 힘주실 것 없소이다.”
츠츠츠츠.
검사들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 진기가 일렁였다.
창궁기(蒼穹氣)였다. 이들 모두가 남궁세가의 절정 무공인 창궁기를 익혔다.
그것도 하나같이 깊게 익혔다. 좌우에서 짓쳐 드는 기세의 파도가 놀라우리만치 강렬했다.
한참이나 연호정을 노려보던 남궁신이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자네는 오만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 같진 않군.”
필요하다면 언제든 하지.
“자네 말을 믿겠네. 앞으로는 주의해 주시게.”
“걱정하지 마시오. 나도 남의 혼삿길 망치는 놈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
“허허, 말귀를 알아듣는 청년이로다.”
남궁신이 손을 들었다.
동시에 좌우에서 흘러나오던 기파가 잠잠해졌다.
“괜히 붙잡아서 미안했네. 이만 가던 길 가시게.”
“수고하시오.”
“그러게. 아! 이것 하나만 더 물어보세.”
남궁신이 얼굴을 찌푸렸다.
“혹시 이 근처에서 궁술(弓術)의 고수를 본 적이 있는가?”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궁술?”
“그렇다네. 자네도 아는지 모르겠네만 안휘혈궁이라고, 오 년 전 금검문을 멸문시킨 마두(魔頭)가 있다네. 그 마두가 근래 팔공산 인근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더군.”
“……!”
“명허림이야 아쉬운 대로 자네가 잡았으니 되었네만, 안휘혈궁은 꼭 우리가 잡아야 하거든.”
남궁신이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과격한 흔적들을 보았네. 자세히는 살피지 못했지만, 기공(氣功)을 접목한 엄청난 궁술이었어. 필시 안휘혈궁의 무공이라 생각하네.”
“…….”
“자네, 명허림을 잡기 위해 대기하지 않았나? 혹시 그와 같은 강력한 기파를 느끼지 못했나?”
연호정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본 적 없소. 나도 하루 전에야 왔던지라.”
“그런가?”
남궁신이 입맛을 다셨다.
“알겠네. 혹시라도 활을 들고 다니는 수상한 자가 있다면 인근 지부에 말해 주게나.”
“알겠소.”
“이만 가 보시게. 명허림을 잡은 것, 축하하네.”
“무운을 빌겠소.”
그렇게 연호정은 남궁세가 병력과 멀어졌다.
산에서 얼마나 내려왔을까.
“헉헉! 여, 연 공자?”
연호정이 눈을 크게 떴다.
“소청 지부장?”
“커헉! 헉헉! 자, 잠시만 숨 좀…….”
소청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선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소청 뒤에는 고요한 신색의 백향이 있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묵…… 백향?”
백향은 말없이 연호정을 보았다.
초점을 잃은 눈이었다. 전신에서 어우러져 나오는 허무의 기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소청이 헐떡이며 말했다.
“이, 이 소저가 연 공자를 찾기에 데려왔습니다. 허억! 허억!”
연호정이 명허림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빨리 날 찾을 줄은 몰랐군.”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백향이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하러 왔어요.”
“인사?”
“관일곡으로 돌아갈 거예요.”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그 예신인가 뭔가가 되려고?”
“아니요.”
“……그럼?”
백향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었다.
“내 손으로 없애기 위해서예요.”
“……!”
연호정의 얼굴이 굳어졌다.
“궁천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셨어요. 당신이라면 날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관일곡은 강해요. 그리고 그들은 도망친 예신을 어떻게든 잡으려 하겠죠.”
“그런가.”
“네. 나는 강호를 모르지만,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문파 정도가 아니면 관일곡을 상대할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네 손으로 그들을 전부 없애 버리겠다?”
백향의 눈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 짙고 짙은 어두움 아래 은은한 분노와 살기가 깔려 있었다.
“나는 그들을 증오해요. 어차피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은 다 죽었고, 그들은 어떻게든 나를 잡으려 들겠죠.”
“…….”
“그럴 바에야 다 없애 버리는 게 나아요.”
참으로 독하다.
어지간해서는 저런 다짐을 하기 힘들다. 그래도 그녀에게 관일곡은 고향이 아닌가.
연호정은 백향의 눈을 보았다.
마치 천하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려는 듯했다. 그만큼 어둡고도 어두웠다.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야.’
이번 예신합전이 격발추가 되었을 뿐, 그녀 역시 관일곡을 증오하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추측이지만.
“혼자 상대할 수 있겠나?”
“그곳의 지형지물에 통달했으니까요. 고수가 여럿 있지만, 경합에 참여한 자들보다 뛰어난 고수는 없어요.”
“그래도 힘든 싸움이 되겠군.”
“…….”
“다시 돌아오기 힘들 수도 있는 싸움이지? 그래서 인사하러 온 거 아닌가.”
“……맞아요.”
백향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궁천 오라버니가 편히 가셨어요. 나 역시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 정도는 하고 떠나고 싶었어요.”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생을 주도적으로 살라 조언했더니, 정작 그 당사자는 죽으러 간다고 하는군.”
“죽기 싫어요.”
“음?”
“난 죽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을 없애지 않는 이상, 살아도 산 게 아닐 거예요.”
“…….”
“그만큼 그들은 독해요.”
“그러니까,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말이지?”
“……네.”
“그으래?”
뭔가 능글맞은 대답이었다.
연호정은 대뜸 백향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백향이 움찔했다.
“이봐, 묵…… 아니, 백…… 아, 됐어! 넌 이제부터 묵비다. 묵비라고 부를 거야.”
“네, 네?”
“나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겠나?”
“……좋은 생각이라니요?”
연호정이 저 멀리 산등성이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앞으로 세상에 나올 널 위해 충고 하나 할까?”
“……?”
“이왕 손을 더럽힐 거면 자신의 손으로 하는 게 낫다. 하지만, 껄끄러운 일이라면 남의 손에 맡겨 버리는 것도 괜찮지.”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해야 할 일을 못 했다고 해서 떨떠름할 필요 없다는 얘기야. 상대가 죽어 마땅한 적이라면 더더욱.”
연호정이 소청에게 말했다.
“지부장. 명허림 좀 들고 와 주시오. 난 이 친구랑 할 얘기가 있어서.”
“헉헉! 제, 제가 듭니까?”
“부탁하오.”
“허억! 헉헉. 아,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웃으며 백향을 돌아보았다.
“너, 차도살인지계라고 들어 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