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우연이 만들어 낸 필연 (1)
소청은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요?!”
“미안했다고,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는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 한 구를 바라보았다.
질 좋은 의복을 입은 채 양손을 곱게 모은 시체였다. 언뜻 드러난 가슴팍에는 동그랗게 파인 흔적이 나 있었다.
‘심장이 뚫렸다?’
소청이 여인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뜻 보아도 젊은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허리춤에는 화살통이 매여 있었으며, 등에는 제법 큰 각궁이 걸려 있었다.
“설마…… 소저가 이 자를?”
여인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여인을 보던 소청이 한숨을 쉬었다.
눈치가 빠르기로는 누구 못지않은 그였다.
“어떤 사이였소?”
“……제 오라비 중 한 분이셨습니다.”
“……!”
“많이 후회하셨습니다. 저 역시 사죄드리겠습니다.”
여인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심란한 표정으로 여인을 내려다보던 소청이 눈을 감았다.
“이만 일어나시오.”
“…….”
“거지에게 절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누가 볼까 무섭소. 일어나시오.”
그제야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청이 눈을 떠 여인을 보았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소? 이 사람 손에 죽은 거지들도 연고라곤 없소.”
“…….”
“다만 소저께서도 혈육을 해하였으니 마음에 큰 짐이 되었을 것이오. 내 아는 의원을 소개해 줄 터이니 심신(心身)을…….”
“괜찮습니다.”
뜻밖의 단호한 목소리였다.
잠시 침묵하던 소청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대신, 질문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질문?”
“연호정이라는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죠?”
순간 소청의 두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그를 어찌 찾소?”
완연한 경계심이었다.
여인, 백향이 말했다.
“저더러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연 공자가 찾아오라 했다고?”
“예.”
딱딱한 말투였다. 마치 처음 세상에 나온 사내처럼 말하는 백향이었다.
“증거는 있소? 연 공자는 본 방의 중요한 손님이오. 만에 하나라도 그분에게 해가 간다면, 본 방은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소.”
연호정에 관한 정보는 일급 기밀이었다.
후개는 연호정을 자신 대하듯 하라고 개방 전체에 명을 내렸다. 그만큼 연호정을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다.
소청이 보기에 이 여인은 위험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무의 기운. 오라비를 제 손으로 죽였다 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걸 제하고서라도 은근하게 번지는 기도가 오싹할 만큼 대단했다.
‘어쩌면 동 장로님에 필적할지도 모른다.’
동풍개(東風丐)는 가장 늦게 장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여느 장로들보다 한 수 혹은 두 수 아래로 평가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대개방의 장로다. 이제 이십 대 초반이나 될까 싶은 여인을 보며 개방의 장로급 무력을 떠올렸다면, 이는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백향이 고개를 저었다.
고갯짓에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묘하게 섬뜩해 보였다.
“저는 그런 건 몰라요. 다만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기다리는 수밖에요.”
기다린단다.
참으로 대책 없는 아가씨다. 소청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아.’
그가 젊은 나이에 지부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공보다는 안목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백향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 여인이 연호정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면?
고민을 거듭하던 소청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안내하겠소.”
“……?”
“소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소. 하지만 느낌만으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소. 그렇다고 소저를 천년만년 이 거지 소굴에 둘 수도 없는 노릇. 내가 직접 안내하겠소.”
백향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 인사하지 마시오. 행여나 당신이 나를 속이고 연 공자를 공격한다면, 당신은 개방의 제일 주적이 될 것이오.”
위협적인 언사였지만 백향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소청이 휘하 거지를 불러 몇 가지 지시를 내리곤 나섰다.
“미리 말하는데, 내 다른 건 몰라도 신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소. 부디 잘 따라오시길.”
“네.”
“자, 갑시다.”
* * *
콰앙!
무시무시한 경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큭!”
등판이 후끈거렸다.
마치 빠르게 번지는 산불에 삼켜지지 않도록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위력적인 무공이었다.
재빨리 몸을 날린 명허림이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일장(一掌)을 쳐 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퍼어엉!
명허림의 얼굴에 경악이 일었다.
‘괴물!!’
명가 최고의 영약을 세 개씩이나 취하면서 익힌 봉황신공이었다. 신공의 성취는 아버지보다 낮을지언정 내공량은 아버지에 필적한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강한 내공으로 내친 봉황수의 염격(炎擊)이 상대의 손짓 한 방에 흩어져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르륵.
시뻘건 화기가 흩어지는가 싶더니, 연호정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먹을 빨아들이는 종이와 같았다.
퍼어엉!
엄청나게 빨랐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보법이 내리꽂히는 벼락처럼 빨랐다. 오 장이나 떨어졌던 거리가 단숨에 이 장 거리로 좁혀졌다.
명허림은 맞서 싸우는 걸 포기했다.
파바바바박!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빨라.’
봉황비는 혈익휘천처럼 전투 중에 쓸 만한 보신경이 아니었다. 명천 정도의 고수가 아니면 전투에 활용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법을 신법답게 쓸 때라면 얘기가 다르다.
명천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 속도, 그야말로 한 줄기 새처럼 나아가는 명허림을 쫓기란 연호정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봉황신공, 비록 심신(心身)을 뭉개는 무공일지언정 순간의 위력만큼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젠장, 아직도 체력이 빵빵하단 말이야?’
파바박!
벽라진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신체의 부담을 막고 주작기를 개방했다.
펑! 펑! 펑!
세 걸음만으로 명허림과의 거리가 확 좁혀졌다.
연호정이 그 기세를 실어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앙!
폭풍과도 같은 경력이 전방을 휩쓸었다. 제법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박살 나고, 바닥에 깔린 나뭇잎과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일순 명허림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순식간에 자세를 바로잡은 그는 이전보다 더 빠르게 달려 나갔다.
연호정이 저도 모르게 외쳤다.
“미치겠네, 저놈!”
남은 체력, 내공을 쥐어짜 신법을 펼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필생의 도주였다.
‘내 생각이 짧았어.’
애초에 명허림에 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질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묵비였고, 명허림은 덤이었다.
물론 가볍게 보지는 않았다. 다만, 수십 일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도주했으니 몸 상태가 정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쉽지는 않지만 딱히 어렵지도 않은 상대. 그렇게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문제는 놈의 신법 경지가 이렇게까지 뛰어날 줄은 몰랐다는 것이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을 펼칠 수 있었다면.’
흑암제라 불리던 때의 그는 막강한 내공과 궁극의 깨달음으로 허공섭물까지도 구사했던 고수였다. 허공섭물이라면 달려 나가는 상대를 붙들어 속도를 늦추는 것도 가능했다.
하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직 그의 몸과 무공은 허공섭물을 펼칠 만큼 고차원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다가 놓치겠군.’
점점 거리가 벌어졌다. 혈익휘천을 펼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한 수로 잡아야 해.’
푸른빛이 일렁였던 연호정의 눈빛이 서서히 붉은 화광을 뿜었다.
명허림이 필사의 도주를 감행 중이라면, 연호정은 필사의 추격을 감행 중이었다.
마침내 연호정도 자신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주작기가 불타오르며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일 보(一步)를 선물했다.
콰콰콰쾅!
연호정이 밟은 땅이 무차별로 터져 나갔다.
번쩍!
명허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느새 머리 위를 뛰어넘어 자신을 앞지른 상대였다. 무리한 듯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흉흉한 눈빛만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연호정이 일권(一拳)을 내질렀다.
콰앙!
“컥!”
쇠망치로 가슴을 맞은 것 같았다. 명허림이 피를 토하며 후방으로 날아갔다.
파바박!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와 자세를 잡은 연호정이 명허림을 노려보았다.
“후우, 이 정도면…… 아, 저 미친놈이!”
못해도 갈비뼈 두어 대는 부러졌을 텐데 또다시 반대편으로 달려 나간다. 확연히 느려졌지만 그렇다고 아주 느리다고 볼 수는 없는 속도였다.
생(生)에 대한 집착이 무시무시했다. 뼈가 부러지고 내상까지 입었는데도 저 속도로 달아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연호정의 몸에서 백색의 바람이 휘몰아쳤다.
콰앙!
산 전체를 뒤흔드는 야수왕의 발걸음.
‘이번엔 잡는다!’
백호군림보로 뽑아 올린 강력한 힘을 전부 양손에 담았다. 연호정이 그대로 철부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백호기를 가득 담은 육 척 철부가 고속으로 회전하며 명허림을 향해 날아갔다.
명허림의 눈에 절망이 일었다.
‘피할 수가…….’
퍼어억! 쾅!
“크아아악!”
명허림이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자세를 낮췄지만 완벽히 피하질 못했다. 그의 왼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 나갔다.
툭! 투둑!
서둘러 혈을 눌렀지만 완벽한 지혈은 되지 않았다. 이미 내공 소모가 극심한 데다 내상까지 입었기 때문이리라.
연신 비틀거리는 명허림.
그리고 그 앞으로 연호정이 섰다.
“엉망이군.”
순간 명허림의 안광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개자식!”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모르겠다. 갑작스레 일어난 명허림이 남은 오른손으로 연호정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어억!
연호정의 몸이 흔들렸다.
그게 전부였다.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봉황수를 쳤지만, 이번 일격도 상대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
명허림이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 너는 대체 뭐냐? 괴물이냐?!”
퍼억!
연호정의 발끝이 명허림의 명치에 꽂혔다. 명허림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연호정은 씁쓸한 얼굴로 가슴을 털었다.
“괴물은 너희 아니냐? 무공 하나 얻자고 그 난리를 친 것도 모자라 죄 없는 가문을 몰살하려 했으니.”
“쿨럭!”
쓰러진 명허림의 코와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연호정이 단숨에 그의 마혈을 짚었다. 기력이 많이 쇠한 듯, 혈을 찍어도 저항이 없었다.
“후우, 빨리 그럴듯한 신법이나 찾아서 익혀야겠어. 이런 애송이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해서야.”
명허림의 입장에선 기가 막힌 말이었다.
자신이 누군가? 쌍룡삼봉의 일인으로 손꼽히는 당대 무림 최고의 기린아가 아닌가? 이미 구파일방 장로급에 가까운 실력을 쌓아, 훗날 성천십삼좌에 오를 거란 기대를 받는 천재 중의 천재다.
그런 자신을 애송이라 부르는 이놈은 대체 어떤 괴물인가?
쿵!
땅에 박힌 철부를 들고, 명허림을 짐짝처럼 옆구리에 낀 그가 길을 따라 이동했다. 서둘러 황풍정에 맡기곤 길을 떠날 요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음?’
연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인기척?’
그것도 범부의 인기척이 아니었다.
단련된 보행, 칼 같은 기도.
놀랍도록 날카롭게 연마된 검(劍)의 기도가 그가 걷는 산길 너머에서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도였다. 이유인즉, 저와 비슷한 기도를 이전에 느껴 봤지만 수준 차이가 극심했던 것이다.
잠시 후.
“어허?”
초로의 사내 한 명과 삼십여 명의 검사들이 연호정의 맞은편에 섰다.
“굉장하도다. 그 젊은 나이에 벌써 무도(武道)를 깨달았단 말인가? 놀랍구먼.”
연호정의 표정이 묘해졌다.
“남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