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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3화 (93/963)

93화. 동상이몽(同床異夢) (5)

신궁 묵비.

괴물 같은 궁술에 힘입은 출중한 전투 능력으로 흑제성의 실질적인 이인자라 불리던 이.

그런 그가, 아니 그녀가 저기에 있었다.

‘…….’

그러나 그녀는 연호정이 알던 묵비가 아니기도 했다.

마치 백궁천과 같다. 무뚝뚝한 얼굴 위로 솔직한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절망.’

콰앙!

대기를 가르고 쏘아진 철전(鐵箭)이 땅에 기다란 고랑을 만들어 내더니, 그대로 바위를 쪼개 버렸다.

폭이 반 장에 이르는 흔적이었다. 화살 한 대로 만든 광경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백소경!”

파바바바박!

백궁천의 몸이 무수히 많은 잔상을 일으켰다.

땅, 나무, 나뭇가지, 바위 등 사방팔방으로 움직이며 거리를 좁혀 간다. 그리 분노한 와중에도 극상의 경신술을 이용, 차근차근 상대를 압박해 가고 있었다.

평생 배우고 익힌 무공이 그러했다. 분노했다고 과격하게 돌진하지 않는다. 불타는 살기 속에서도 궁수 특유의 냉정함이 돋보였다.

“흥!”

중년 여성이 짧게 코웃음을 치며 시위를 당겼다.

퍼퍼퍼퍼퍼펑!

접근하는 백궁천 전방에 반경 삼 장 크기의 불꽃들이 솟아올랐다.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폭죽?!’

폭죽 달린 화살 여러 대를 날려 적과 나 사이에 거대한 원형 불꽃을 일으켰다.

백궁천 정도의 고수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는 폭죽의 벽이다. 하지만 상대를 당황시킴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시야를 차단하는 용도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터어어엉!

백궁천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퍼어어엉! 쐐애애액!

꺼지지 않은 폭죽의 방패를 쪼개며 쏘아진 철전이 백궁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속사(速射)였기 때문에 위력은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점을 한 움큼 뜯어내긴 충분했다. 용아포 수준의 공력이 담겨 있었다면 왼팔이 통째로 날아갔을 것이다.

“요사스러운 잡기(雜技)를 쓰다니!”

“한참 기다려도 안 오기에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도 살아 있었나?”

백궁천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는 고평이 준 상자를 들고 백소경을 저격하러 갈 생각이었다. 한데 인제 보니, 백소경도 그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쪽 작전을 다 알고 있는 상대에게 돌진한다? 무조건 죽는다. 실력 차이가 꽤 난다 한들 상대 역시 귀궁수다. 저격 솜씨만큼은 초일류인 것이다.

“너는 예신합전(羿神合戰)을 치졸한 술수가 난무하는 속세의 다툼으로 물들였다. 관일곡 역사에 너 같은 놈은 없었어!”

“웃기고 있군! 관일곡을 누구보다도 증오하는 주제에!”

“차라리 독살을 하지 그랬더냐!”

“하! 최강의 귀궁수 머리통에 화살 한 대는 박아 줘야 내 능력이 입증되지 않겠어?”

“이……! 너만은 반드시 죽인다!”

티리리리링! 퍼퍼퍽!

수십 대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일대를 죽음의 지대로 만들었다.

점입가경으로 들어가는 승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난전이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들의 싸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사박.

“헉!”

깜짝 놀란 여인, 백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각궁의 시위를 당겼다.

굉장한 속도였다. 백궁천에 필적하는 사격 준비 자세다.

백향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누, 누구?!”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묵비라는 이름을 부를 뻔했다.

‘여전하군.’

묵비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일 만큼 동안이었다. 공력의 경지가 깊은 덕분이기도 했고, 선천적으로 어려 보이기도 했다.

‘여전해, 그 자세는.’

과거로 돌아온 연호정은 지금 이 순간 광기와 폭력으로 지배하던 흑암제 시절로 다시 소환된 듯했다. 묵비의 변하지 않은 얼굴이, 자세가 그를 흑암제로 만들었다.

동시에 그는 흑암제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떼어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묵비의 눈빛 때문이었다.

‘무서워하고 있군.’

두려움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 솔직한 감정이 그녀의 두 눈에서 여과 없이 전달되고 있었다.

백향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연호정에게 외쳤다.

“누, 누군진 모르겠지만 어서 도망쳐요!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요!”

감정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네가 그리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었나.’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활을 내려.”

“내 말 안 들려요? 당장 도망쳐요!”

“알겠으니까 활 내려. 나는 적이 아니야.”

“아…….”

그제야 자신이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백향이 활을 내렸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막상 이렇게 만나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 안 돼. 피해라.”

“뭐, 뭐라고요?”

“피하라고.”

두려움과 당황으로 물들었던 백향의 얼굴에 결심의 기색이 어렸다.

“산 밑까지 호위해 줄게요. 어서 움직여요!”

그때였다.

퍼어억!

백향의 머리 위쪽 나무에 동그란 구멍이 뚫렸다.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자세를 낮추었다.

퍼엉!

나무를 뚫은 철전이 연호정의 발 앞에 박혔다.

백궁천이 아닌 백소경의 화살이었다. 적을 상대하면서도 백향을 죽이려 화살을 쏜 것이다.

모두를 죽여야 살 수 있는 생사전이자 경쟁이다. 경합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살기 넘치는 접전이었다.

파악!

백향이 연호정을 향해 뛰어왔다.

‘역시.’

흑제성의 오대신장이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하지만 역시나 빠르다. 철저하게 연마된 기본기, 궁술만이 아니라 신법으로도 천하제일을 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안해요!”

번쩍!

백향의 몸이 연호정의 뒤에서 나타났다.

전방으로 달려왔으면서 갑자기 후방에서 나타났다. 기가 막힌 신법이었다.

백향의 손이 연호정의 목덜미로 향했다. 기절을 시킨 후, 업어서 내려갈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 연호정의 손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회귀 후 첫 실전에서 남궁상화를 무력화시켰던 그 수법이었다.

터어억!

“악!”

백향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맥문이 잡힌 것이다.

“흡!”

짧게 숨을 들이켠 연호정이 엄청난 속도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백향의 몸도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콰앙!

백향의 몸이 땅에 처박혔다.

꽤 큰 소리가 났음에도 백향이 받은 타격은 전혀 없었다. 벽라진기가 그녀의 몸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향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연호정의 손이 움직였다.

파바박!

“헉!”

백향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마혈 세 곳을 짚인 것이다.

연호정이 손가락을 보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굉장한 내공이군.’

내공량이 무시무시했다. 엄청난 반탄력 때문에 손가락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 명천을 제외, 명가에서 파견한 어떤 고수들보다도 질 좋고 풍부한 내공량이었다.

현무기를 응용한 침투경이 없었다면 제대로 짚지 못했을 것이다.

연호정이 백향의 몸을 어깨에 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적과 교전할 생각이 없는 병사는 전쟁터에 필요 없어.”

백향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말마따나 그녀는 백궁천과 백소경에게 활을 겨누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그녀에게 저 두 사람은 가족이요, 친구이자, 스승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둘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경합에 참여한 모든 귀궁수가 그러했다.

“내려 줘요! 어서 마혈을 풀어 주라고요!”

“그러다 죽어, 너.”

콰아앙!

연호정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그가 서 있던 곳에 큼직한 구덩이가 뚫렸다.

“저건 또 뭐야?”

파라라락!

백소경이 무서운 속도로 접근했다. 그런 그녀의 뒤를 백궁천이 쫓고 있었다. 피범벅이 된 몸, 비틀거리는 신법이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까드드드득!

그 빠른 신법을 펼치면서도 시위를 당기는 자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각고의 노력으로 완성한 궁수(弓手)의 무공이었다.

백소경이 버럭 외쳤다.

“그년을 내놔!”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티이이이잉! 쾅!

연호정 뒤에 있던 나무가 폭발했다.

백소경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무조건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백향을 들쳐 멘 사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한데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어디로?’

그때였다.

‘……?!’

몸이 무거워졌다.

시커먼 안개가 사지로 파고들어 뼈마디를 결박하는 듯했다. 공기가 텁텁해지고 움직임이 느려지고 있었다.

‘이건?’

살기(殺氣)였다. 엄청난 살기가 하늘 위에서부터 소나기처럼 퍼붓고 있었다.

파파팡!

속도를 늦춘 백소경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파라라라락!

유연하게 올라간 다리가 발뒤꿈치부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도끼처럼 내리치는 무자비한 각법이었다. 다리가 아니라 실제 도끼가 휘둘러지는 듯했다. 엄청난 살기와 내력이 느껴졌다.

가만히 있다가는 그대로 얼굴이 박살 날 것이다. 백소경이 재빨리 후방으로 몸을 날렸다.

연호정의 발이 땅을 밟았다.

콰아앙!

바닥에 깔린 나무의 파편과 나뭇가지, 나뭇잎들까지 몽땅 하늘로 떠올랐다. 무려 반경 오 장에 가까운 너비였다.

백소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런 괴물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고수였다. 귀궁수 중 가장 강하다는 백궁천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훅!

물러난 동시에 시위를 걸었는데, 어느새 연호정이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삼 장 거리를 눈 깜짝할 새에 줄여 버렸다. 귀궁수 중 용비신행을 가장 깊게 익힌 백향도 이런 속도를 내진 못한다.

백소경이 시위를 놓았다.

동시에 연호정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카드드득!

화살은 시위를 떠나지 못했다. 활대 중간에 걸쳐진 채 연신 웅웅거렸다.

화살이 제대로 힘을 받기도 전에 연호정의 손이 화살의 깃대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살을 잡아 공격을 막은 연호정이 그대로 팔을 접어 백소경의 빗장뼈를 밀어 쳤다.

퍼억! 콰앙!

“커헉!”

거목이 움푹 파였다. 백소경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때, 한 줄기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우레와 같이 터져 나왔다.

“죽이지 마! 쿨럭! 내, 내 몫이다!”

파아악!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연호정의 어깨를 밀치고 달려온 백궁천이 그대로 백소경의 복부를 걷어찼다.

퍼억!

“컥!”

왈칵 피를 토한 백소경이 다시 한번 나무에 부딪히곤 쓰러졌다.

백궁천의 왼팔이 백소경의 어깨를, 오른 무릎이 백소경의 복부를 짓눌렀다.

“커허……!”

순식간에 전투 불능이 되었다.

연호정이 화살을 잡은 순간, 활시위가 끊어지고 손뼈가 온통 으스러졌다. 팔뚝을 휘두른 단순한 일격에는 빗장뼈가 부러졌다.

결정적으로 백궁천의 막강한 각법은 장기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이었다.

까드드득!

백소경의 코앞에 화살을 겨눈 백궁천이 헐떡이며 이를 갈았다.

“망할 년. 죽여 주마!”

“쿨럭! 카악!”

백소경이 씨익 웃었다. 입가에 피거품이 이는데도 악독한 미소를 짓는다.

“저 개자식만 없었다면 내가 이겼어.”

“닥쳐라! 애초에 네년이……!”

“글쎄? 머리를 과하게 쓰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멀쩡한 상태로 붙었어도 제 혈육 하나 못 알아보는 병신한테 졌을 것 같진 않은데?”

“……뭐?”

백소경이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 계집애가 네 딸년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백궁천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었다.

충혈된 두 눈에 눈물이 어렸다.

“으아아아!”

퍼어억!

백소경의 머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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