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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92화 (92/963)

92화. 동상이몽(同床異夢) (4)

이각 후, 고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두 사람은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냈다. 정확히는 백궁천이 그러했고, 연호정은 간간이 보조해 준 정도였다.

진실을 알게 된 후, 백궁천은 망연자실한 기색이었다.

“……속았군.”

연호정의 얼굴에 찝찝함이 어렸다.

보통 누군가에게 속았다면 미칠 듯이 화를 내야 정상이다. 한데 백궁천은 그렇지 않았다. 허탈함에 완전히 정신을 놔 버린 것 같았다.

“내가…… 나 때문에 가령이…….”

백가령은 백궁천의 딸이었다.

관일곡의 귀궁수는 혼인을 할 수도, 자식을 둘 수도 없다. 신(神)은 완전의 상징이기에 속세의 사람과 관계를 맺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궁천은 관일곡 몰래 속세의 여인과 연을 맺은 모양이었다. 다만 딸이 있는 줄은 얼마 전에야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딸이 아프다는 것도.

하필 경합 때 딸의 존재와 병을 알았다. 그래서 백궁천이 이 난리를 친 것이다.

연호정이 침상 위에 놓인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시커먼 단환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고평이 백궁천에게 준 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이 아니라 독이지만.

즉, 백궁천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도 전부 고평, 정확히는 그의 배후 때문이었다.

“백소경(白素輕)이라고 했지? 너에게 저 사기꾼을 보낸 사람이.”

“…….”

“예신이라는 게 그런 협잡을 써서라도 되고 싶을 만큼 굉장한 자리인 줄 몰랐군.”

백궁천이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멍했다. 넋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경쟁자가 보낸 사기꾼에게 속아 자신은 물론 딸까지 위험하게 만들었다. 단련된 무인의 정신력으로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넌 어때?”

“…….”

“네 딸이 더 중요하냐, 아니면 경합에서 이기는 게 더 중요하냐?”

순간 백궁천의 눈이 무서운 빛을 발했다. 일순간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예신 따위 바라지도 않았어! 나는 그저 죽은 아내를 대신해 딸을……!”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한테 안내해.”

“……뭐?”

“딸 상태를 봐야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 알 거 아냐.”

백궁천의 눈이 커졌다.

“뭐, 뭐라고? 가령을 살릴 수 있다고?!”

“살릴 수 있다고 하진 않았어. 상태를 봐야 하니까.”

“너, 설마 의원이었냐?”

“내가 고치는 거 아니다. 불러도 와 줄지 모르겠고. 그래도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할 거 아냐.”

백궁천의 얼굴에 생기가 돋았다.

“고, 고맙다! 만일 가령의 병이 고쳐진다면 너에게 내 목숨이라도……!”

“몇 푼 되지도 않는 목숨 필요 없다. 대신 내 부탁이나 하나 들어줘.”

“물론이다! 물론이야!”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계약, 성립이다.”

백가령은 이제 열 살도 되지 않은 여아였다.

백가령의 상태를 본 연호정은 아이의 상세가 꽤 나쁘되 당장 목숨이 위험하진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해당 마을 개방의 지부를 찾았다.

“소문난 명의 좀 청사루 후원 이 층 북쪽 끝방으로 보내 줘. 어린아이야. 내상이 극심하니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두고.”

“알겠습니다.”

“잠시 갈 곳이 있으니 애한테 믿을 만한 사람 좀 붙여 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서신을 제갈세가로 보내 줘. 마찬가지로 급해. 최대한 빨라야 할 거야.”

연호정이 부르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통천신의였다.

통천신의 정도 되는 의원은 아무나 부르지 못한다. 마침 제갈아연의 부탁으로 자신의 몸을 봐 주었으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부탁을 해 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조치를 마친 연호정은 백궁천을 데리고 나왔다.

“쿨럭!”

백궁천이 밭은기침을 뱉었다. 피는 토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극도로 창백했다.

연호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위치나 말해 주고 여기서 기다려.”

“나는 끝났어.”

“…….”

“내 몸을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 하나는 알고 있어. 내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래.”

“아마 놈이 건넨 약을 먹었다면 수명이 더 깎였겠지. 그나마 다행이야.”

“고통이 심할 거야. 그 약, 잘은 몰라도 진통 효과 하나는 뛰어나 보였어.”

“대신 목숨을 더 깎아 먹겠지.”

“…….”

“그간 내 딸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면 간지러운 수준도 안 돼. 그리고…… 용서할 수 없다.”

“백소경이라고 했던가?”

“나만 건드렸다면 모르겠지만, 내 딸까지 건드렸어. 백소경은 내 몫이다.”

“그거야 댁 마음대로 해. 다만 그 전에.”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백향이 있는 곳까지만 안내해 줘.”

“……알겠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안휘 팔공산을 향해 달려갔다.

파아악!

백궁천의 신법은 놀라웠다.

몸이 정상이 아닌데도 날렵하기가 창천을 노니는 새와 같았다. 빠르면서도 내공 소모는 최소로 줄이는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백궁천이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리며 달리고 있었다. 호흡에 이상은 없었지만, 그 이상 속도를 내기는 버거운 것 같았다.

“이상하군.”

“뭐가?”

꽤 빠른 신법을 펼치면서도 입을 연다. 백궁천은 신법의 경지가 뛰어났기에, 연호정은 엄청난 체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너의 무공은 굉장히 전투적이었다. 솔직히 구룡파천궁(九龍破天弓)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어 보였어.”

“…….”

“한데 신법은 별로군. 지닌 내력으로만 달리는 건가?”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체력은 좋은 편이라 괜찮아.”

“체력은 유한하다. 신법은 유용하지.”

“그러게 말이야. 쓸 만한 신법 좀 익혀 놓을 걸 그랬어.”

“하나 가르쳐 줄까.”

연호정은 내심 깜짝 놀랐다.

“신법을 가르쳐 준다고?”

“문제라도 있나?”

“왜?”

“왜라니?”

반문하는 연호정이 더 이상하다는 듯 백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덕분에 좋은 의원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고 노인이 사기꾼이라는 것도 알았어. 은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기는 한데…….

‘뭐야, 이놈?’

생각해 보니 고평이란 작자가 사기꾼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궁천 정도의 고수에게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파악하는 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최소한 의심 정도는 해야 옳았다.

한데도 속았다. 너무나도 쉽게.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포자기를 했어도 한번 그런 일을 당했으면 자신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백궁천은 연호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한없는 고마움을 표할 뿐이다.

그것도 모자라 신법까지 가르쳐 준단다.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충분히 해 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망설일 수 있는 일이었다.

‘경험이 없어.’

이제야 연호정은 깨달았다. 백궁천의 이 바보 같은 순진함의 이유를.

‘세상에 나온 적이 거의 없었던 거다.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체감하진 못했군.’

남에게 속아 본 적도, 이유 없이 습격을 당해 본 적도, 하다못해 시비가 걸린 적도 없다.

말 그대로 투명하다. 평생 무공만 수련했지, 제대로 된 사회 경험이 없으니 이러는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사양하겠다.”

“왜지?”

“내 몸에 맞는 신법을 찾아서 익힐 생각이야. 당신 마음은 고맙지만 난 괜찮아.”

“하지만…….”

“정 속도를 내야 할 때 말해. 체력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백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궁금한 게 있다.”

“뭔데?”

“너, 백향을 어떻게 알지?”

“…….”

“그뿐만이 아니야. 너는 용아포를 알고 있었다. 용아포는 구룡궁의 비기 중 하나, 관일곡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해 주기 곤란하군.”

“알겠다.”

뜻밖에도 백궁천은 별말이 없었다. 은인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연호정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완전히 마음이 떠난 거야.’

관일곡에 마음이 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반응이 나올 리 없다.

‘신기하군.’

나름대로 인생을 바쳤던 곳일 텐데 이리 냉정하게 마음을 접는다. 관일곡이라는 곳이 썩 좋은 집단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호정은 관일곡에 관한 생각을 접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묵비, 아니 백향이니까.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팔공산의 한 능선을 오른 두 사람.

“저기다.”

백궁천이 가리키는 곳은 그나마 낮은 봉우리였다.

“아직 저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안내 고맙군.”

“아니다.”

“그리고…….”

“말해라.”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사정은 알겠지만 넌 개방도를 죽였어. 그리고 개방이 네 딸을 고쳐 줄 사람을 부를 거다.”

“…….”

“복수가 끝나고도 살아 있다면, 가서 사죄라도 해.”

백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내 목숨이 붙어있다면, 반드시 그리하도록 하겠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내가 전해 주지. 그래도 이왕이면 직접 할 수 있도록 해.”

“고맙다.”

그때였다.

펑! 쿠구궁.

두 사람의 눈이 굉음이 울린 곳으로 향했다.

나무 몇 그루가 산산이 터져 나가는 게 보였다. 엄청나게 먼 거리였지만 범부의 눈에도 보일 정도다. 그만큼 커다란 나무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궁! 우지끈!

수십 개의 살기가 교차한다 싶더니, 좌우로 돌풍이 일며 나무며 바위며 죄다 박살 내는 게 보였다.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내공을 이용한 파괴력 넘치는 궁사(弓射)였다.

백궁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구룡궁술!”

파아아악!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산 밑으로 내려갔다.

잠시 망설이던 백궁천 역시 연호정을 따라 몸을 날렸다. 혹시라도 그곳에 백소경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파바바바박!

뒤늦게 출발했음에도 순식간에 연호정을 따라잡은 그였다. 아무리 연호정이 신법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속도였다.

그때, 연호정의 몸에서 태양처럼 붉은 화기가 터져 나왔다.

쾅! 콰쾅! 쾅!

대지를 박찰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백궁천과의 거리가 또다시 확 벌어졌다.

백궁천의 눈이 커졌다.

‘저 신법은?’

아니, 신법이 아니라 보법이다.

목격자인 개방도를 사살할 때 보여 주던 보법이었다. 전투 영역 내에서만큼은 용비순행(龍飛瞬行)보다도 빠른 것 같았다.

저러한 보법을 연달아 쓰며 치고 나가다니.

‘굉장한 내공이야. 저런 보법이 있으니 신법을 받지 않겠다 한 것이군.’

파아악!

백궁천 역시 속도를 올렸다. 그가 순식간에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백궁천이 연호정을 추월했다. 혈익휘천을 연달아 쓰면 내공 소모가 극심하니, 체력과 내공을 조절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두 사람은 어느새 격전지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쾅! 콰지지직!

작은 바위 하나가 허공에 떠오른다 싶더니, 그대로 나무 몇 그루를 박살 내며 밑으로 떨어졌다.

팟!

백궁천이 굴러오는 바위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깃털처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콰앙!

무지막지한 권경(拳勁)으로 바위를 부순 연호정이 정면으로 치고 올라갔다.

그때, 어느새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간 백궁천의 사자후가 들렸다.

“백소경!!”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심장을 데우던 주작기가 일순 확 하고 조여들었다.

번쩍!

연호정이 단숨에 이십여 장 거리를 주파해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그가 수십 그루의 거목이 쓰러져 황폐해진 전장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대궁을 난사하는 백궁천.

엄청난 회피 능력으로 그 화살을 모조리 피해 내는 중년 여인.

그리고 구석진 곳, 부러지지 않은 거목 뒤에 숨어 각궁의 시위를 당기는 여인이 보였다.

“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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