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동상이몽(同床異夢) (1)
자정이 넘은 시각.
연호정을 보낸 모용군은 다 식은 음식들을 보며 홀로 술을 걸치고 있었다.
“크, 술을 이리 많이 마셔 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애써 내공을 억누르고 취기에 젖어 본 그였다. 덕분에 목부터 얼굴까지 붉게 물들었다.
모용군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근데 이 허가증 말입니다. 이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허!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인가. 모용가주의 직인이 찍혀 있거늘.’
‘저는 상대를 믿지 않으면, 상대가 건넨 증거도 믿지 않습니다. 또한 상대방을 믿기에 앞서 상황을 분석하지요. 저나 가주님이나, 서로를 믿고 일을 진행하기엔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들 아닙니까?’
‘…….’
‘이건 놓고 가겠습니다. 나중에 술이나 한잔 사십시오.’
모용군은 한옆에 놓인 허가증을 바라보았다.
“……구렁이 같은 녀석이로다.”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을 몇 번을 해도 모자란, 정말 대단한 인재다.
“이보게, 호정. 한데 말일세. 자네는 다 좋은데 하나를 간과했네.”
츠츠츠.
일렁이는 살기에 허가증이 훅 날아가더니 기름기 가득한 음식 위로 떨어졌다.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지. 낭중지추(囊中之錐)라, 뛰어난 자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아도 결국 모두가 알아준다지만, 강호에서는 통용되는 말이 아니라네. 왜인 줄 아는가?”
마치 옆에 연호정이 있는 것처럼 중얼거린다.
모용군이 씨익 웃었다.
“무림인들은 걱정이 많거든. 튀어나온 송곳을 가만 놔두질 못하지. 한 번 삐져나왔다 싶은 송곳은 그대로 잡아 비틀어 버린다네.”
그냥 놔두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나다.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르다. 단번에 일의 맥락을 짚을 줄 알며, 상황과 상황을 조합하여 흐름을 만들어 낼 줄도 안다.
이런 놈에게는 절대 많은 정보를 줘선 안 된다. 정보와 정보를 분석, 합산해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진의(眞意)를 파악해 내기 때문이다.
더하여 시간도 많이 줘선 안 된다. 정보가 없어도 어떻게든 알아내어 무슨 일이 생겼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까다로운 놈이었다. 그래서 가만 놔둬선 안 된다.
“이왕이면 안휘에서 쓴맛 좀 봤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런가?”
모용군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방 구석진 곳에 사십 대 장한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알고 있었소?”
“하하! 당연하지. 자네 특유의 그 바람 같은 내공을 어찌 못 알아보겠는가.”
장한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인기척을 드러내는 순간, 안개처럼 은근한 위압감을 풍겨 내고 있었다.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차라리 좀 빨리 오지 그랬나. 자네도 연호정, 그 친구를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관심 없소.”
“허허, 여전하군.”
“그래서, 남궁세가에만 뿌리면 되는 거요?”
“그렇다네. 알고 있겠지만 절대 정보 출처가 드러나서는 안 되네.”
“남궁가주는 날카로운 자요. 출처도 없는 정보를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외다.”
“동시에 당하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지. 호기심이 동해서라도 움직여 줄 걸세.”
“하나만 물어도 되겠소?”
“묻게.”
“연호정이란 놈, 왜 그렇게 신경 쓰는 거요?”
모용군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너무나 뛰어나니까.”
“그 정도요?”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놈일세. 그런 놈에게 내가 긴장하고 있다네. 내 형제들을 몰아내고 가주직을 손에 넣었을 적에도 저런 놈은 없었어.”
“…….”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저 나이에 내가 보는 걸 똑같이 볼 줄 아는 괴물이란 말일세. 심지어 무공도 뛰어나지.”
“…….”
“이대로 성장한다면 향후 얼마나 무시무시한 괴수가 될지 모르네.”
장한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모용군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능력과 성품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믿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천하의 모용군이 긴장할 정도의 인재…….’
장한이 입을 열었다.
“녀석이 알아채면 어떻게 하오?”
“상관없네. 설령 함정임을 알아도 반격은 안 할 테니까.”
“그것을 어찌 확신하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녀석도 여론의 무서움을 알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도 남궁가에게 정보를 흘리는 거 아니겠나?”
“…….”
“애정이란 참 무서운 것이야. 그리고 그 애정만큼이나 무서운 게 자존심이지. 남궁가에게 있어 연호정은 그런 놈일세.”
“…….”
“자, 슬슬 시작해 보세.”
모용군이 잔을 들었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갈등이지. 죽든, 박살이 나든, 살아서 돌아오든, 아주 재미있는 관람이 되겠어.”
* * *
창응대를 연가로 돌려보낸 연호정은 모처럼 혼자의 몸이 되었다.
터어어엉!
산길을 타고 오르는 연호정의 움직임은 경쾌했다.
팔십 근 철부를 어깨에 지고 달리는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다. 능히 일류의 신법이라 불릴 만했다.
‘역시 좀 힘들군.’
최소의 내공만 써서 신법을 수련 중이었다.
후기지수 회합에서 돌아와 진각을 수련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최대의 힘으로 무겁게(重) 끌어 올렸지만(引), 지금은 최소의 힘으로 가볍게(輕) 밀어 내고(推) 있었다.
경(輕), 추(推), 산(散), 발(發), 유(柔)의 다섯 글자는 경신술(輕身術)의 요체다.
다섯 가지 요체를 완전히 몸에 익히고, 그 모든 걸 무의식적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경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부족해.’
연호정이 익힌 사신무는 천하제일이라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따로 신법을 익히지 않았다. 흑암제 시절에도 그러했다.
중요한 것은 싸우고 죽이는 것이지, 추적이 아니었다. 게다가 신법은 특출나지 않아도 체력만큼은 중원제일이었던 터라, 며칠을 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신법의 보강이 필요하다. 옛날과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나마 흑암제 시절 때는 믿고 맡길 부하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했다.
‘다 할 줄 알아야 해. 만능이 되어야 한다.’
터어어엉!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연호정은 멈추지 않았다. 정 힘들면 물을 마시고 주먹밥을 먹었다. 잠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째가 되고 나서야 그는 이름 모를 야산에서 대자로 뻗었다.
무식한 수련법이었다. 그러고도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다음 날, 여섯 시진을 넘게 잔 그는 또다시 신법을 수련하며 팔공산 쪽으로 달려 나갔다.
며칠이 지나, 마침내 안휘로 접어들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
폭우가 쏟아졌다.
앞으로 사나흘은 내리 쏟아질 기세였다.
연호정은 신법 수련을 중단키로 했다. 안휘에 접어들었다면 슬슬 전권(戰圈)에 진입했다고 봐도 좋았다. 이제부터는 체력을 올리고 만전의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철퍽! 철퍽!
물에 젖은 산길을 내려오다가 몇 번을 넘어졌다.
한참 동안 산을 내려온 그는 마침내 안휘 태화현(太和縣), 산음정(山陰停)이라는 큰 주루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원 최상층 남향 방 하나 주시오. 목욕물도 좀 받아 주고.”
“아, 알겠습니다.”
혹시나 거지 취급할까 봐 금원보 하나를 꺼냈다. 점소이들의 눈빛과 자세가 완전히 변했다.
주루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연호정을 소문 속의 그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위압감 넘치는 도끼를 들고 있었지만, 꼴이 너무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피곤한 건 딱 질색이니까.
“으아아.”
두 시진 후.
목욕이 끝나고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까지 싹 먹어 치운 연호정은 그대로 침상에 쓰러졌다.
“……진짜 무식하게 수련한다. 너 정말 흑암제 맞냐?”
다음 날.
종일 자고 해 질 녘에야 눈을 뜬 연호정은 문득 창밖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끄응. 누구요?”
놀랍게도 창밖 위, 지붕 쪽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풍정(荒風亭)에서 왔소.”
“황풍정?”
“모용세가의 정보 조직이요.”
“아.”
모용군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했었다. 그중 하나가 정보였다.
안휘성은 남궁세가가 꽉 휘어잡고 있는 지역이었다. 다만 워낙에 크고 넓었기에 하나하나 전부 확인할 수는 없었다.
황풍정의 정보원이 안휘성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중간 보고서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소.”
“수고.”
스륵.
창밖에서 잘 매인 서신 한 장이 날아 들어왔다.
개방과는 일 처리 방식이 다르다. 개방은 이들보다 더 산만했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훨씬 조직적이고 전문적이었다.
왜 개방을 백도 제일의 정보 조직이라고 부르는지 알겠다.
연호정이 서신을 펼쳤다.
“음.”
잠과 피로가 한순간에 싹 달아났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산길을 골라 신법 수련을 하며 왔는데도 명허림보다 빨리 왔다. 명허림은 현재 하남도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명허림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주변을 신경 쓰며 이동 중일 테니까.
물론 황풍정의 정보원들도 명허림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다. 그의 흔적을 보고 대략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만 알고 있는 것이었다.
‘뒤에서 추적을 시작하면 놈은 팔공산에 들르지 않을 거야. 차라리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지.’
서신에는 팔공산에 있는 안가의 위치도 적혀 있었다.
물론 위치를 알아도 들어갈 순 없다. 출입을 위한 고유의 방법이 필요할 테니까. 그저 그 앞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미리 만나 볼 수 있겠군.”
사실 이번 일을 굳이 수락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게는 명허림 따위보다 모용우가 만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묵비가 이곳에 있다는데 외면할 수는 없었다.
연호정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그 양반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까.”
묵비는 과묵한 사람이었다. 당연히 과거지사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항상 가면을 썼다. 묵비의 본 얼굴을 본 사람은 연호정밖에 없었다.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연호정의 얼굴이 조금씩 무심하게 변했다.
“금검문이라.”
묵비는 왜 금검문을 멸문시켰을까?
그가 아는 묵비는 이유 없이 화살을 날릴 사람이 아니었다. 흑제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극한의 무공을 갖고도 함부로 살생하지 않았다.
절제를 알고 책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연호정은 묵비를 아꼈다.
연호정이 손목을 돌렸다.
우두둑, 소리가 나며 팔 전체가 시원해졌다.
“슬슬 움직여 볼까.”
곧 묵비를 만날 거란 생각에 배도 고프지 않았다. 하긴, 어제 자기 전에 워낙 많이 먹기도 했다.
그가 창가에 발을 올렸다.
터어어엉!
며칠이라도 정신 놓고 수련했다고, 확실히 신법의 탄법(彈法)이 경쾌해진 느낌이었다.
태화현의 중심에서 단숨에 외곽으로 나아간 그는 이내 허름한 거지 소굴을 발견했다.
파아아악!
“끄아아악! 깜짝이야! 응? 누, 누구시오?”
연호정이 품에서 시커먼 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일순 거지의 눈빛이 변했다.
“중원 전 지부가 후개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연 공자를 뵙습니다.”
“알고 싶은 게 있어서 들렀소.”
“황풍정은……?”
모용가의 황풍정과 함께 온 것도 안다. 과연 대단한 정보력이다.
“그치들하고는 손발이 영 안 맞아서. 정보는 역시 개방이지.”
거지가 씨익 웃었다.
“어떤 정보 때문에 오셨습니까?”
“팔공산에 그 안휘혈…….”
그때였다.
크아아악!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희미한 비명이 터졌다.
연호정과 거지의 안색이 돌변했다.
터어어어엉!
두 사람이 거지 소굴을 박차고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