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6)
이틀 뒤.
“오, 자네 왔는가?”
“이렇게 또 뵙게 되는군요.”
“하하, 그러게 말일세.”
모용군은 여전했다.
더운 여름인데도 소매와 다리를 전부 덮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었다. 하기야 워낙 이룬 경지가 대단하니 한서(寒暑)의 영향을 받진 않을 것이다.
연호정이 탁자를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이제 갓 나온 음식이 대여섯 가지나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비싸고 화려한 요리들이었다.
모용군이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게.”
“그러지요.”
자리에 앉은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오늘은 따님과 함께 오신 게 아닙니까?”
“연화? 그 아이는 본가에 있네. 자네와는 달리 아직 배울 게 많은 아이거든.”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무공은 모르겠습니다만, 지략은 출중해 보이던데요.”
“허허, 자네 눈에도 그리 뵈던가?”
당연하지.
흑암제 시절의 모용연화는 지금의 모용군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의 지략을 선보인 여걸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내놓은 지략 덕에 사음교의 병력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다.
물론 흑제성 역시 알게 모르게 손해를 입었지만.
“잘 연마하면 천하의 보검으로 명성을 날릴 것 같습니다.”
“그리된다면 오죽 좋겠는가. 기실, 그 아이가 사내아이였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소가주로 삼았을 수도 있었겠지.”
“의외로군요.”
“음? 무엇이?”
“가주님께서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기에 핏줄은 물론, 남녀의 구별도 두지 않으실 것 같았습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어떻게 가주가 되었는지를 안다고 한다. 그 말에 내포된 뜻이 의미심장함에도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상관없다네. 한데 세상은 그렇지 않더군. 여아가 가주가 되면 많은 사람이 본가를 손가락질할 걸세.”
“그렇습니까.”
“가주란 능력만으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무공, 지략, 성품 모든 것이 중요하네. 다만, 사내일 경우에.”
“…….”
“시대에 맞는 재능도 필요한 법이지. 나는 성별도 재능의 일부라고 보네. 연화가 타고나지 못한 가장 안타까운 재능이지.”
거짓말이다.
모용군은 무림맹주가 된 후, 가문을 모용연화에게 물려주었다.
정확히는, 그때까지도 가주직을 놓지 않았다. 다만 가주 대행으로서 모용연화를 전면에 내세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형산 전투가 벌어지기 전, 모용연화에게 가주 자리를 안겨 주고 마지막 싸움에 임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싸움이라 마음이 약해졌다? 전혀.
그 싸움은 승률이 높은 싸움이었다. 아마 자신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견제하는 것이군.’
그렇다.
지금은 모용연화에게 가주 자리를 물려줄 생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용군은 성별을 재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상대를 안심시키는 것이다. 뛰어난 아이지만 안타깝게도 가주는 못 된다고. 출가외인(出嫁外人)이니, 크게 신경 쓸 것 없다고.
‘예전과는 달라. 조금 더 신경 쓰고 있다.’
명가를 묻어 버린 일련의 사건을 거친 뒤 자신을 향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그래서 숨기는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항까지도.
‘오늘 대화, 집중 좀 해야겠군.’
모용군이 술병을 들었다.
“몸은 다 나았나?”
“깨끗합니다.”
“허허, 젊음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야. 그리 큰 상처를 입었거늘 벌써 회복해? 자넨 여러모로 날 놀라게 하는구먼.”
이건 진심이었다. 모용군은 연호정의 회복력에 순수하게 놀랐다.
연호정이 씁쓸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말게. 욕먹는다네. 하긴, 쉽게 욕도 못 하겠군. 백도 무림의 썩은 고름을 도려내 버린 열혈의 남아가 아닌가.”
연호정이 얼굴을 구겼다.
“그것 때문에 얼마나 피곤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과정이 아닌 결과를 본다. 만일 명가가 아닌 연호정이 당했다면, 그 길로 연호정은 천하의 악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을 것이다.
그러나 명가는 무너졌고, 연호정은 살아남았다.
그제야 사람들도 과정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연호정이 왜 명가를 상대로 홀로 싸움을 걸었는지, 어떤 식으로 명가를 상대했는지.
그렇게 연호정이란 이름 세 글자는 당대를 살아가는 무림인들 머리에 콱 박혔다.
“피곤할 수 있지. 하지만 받아들이게. 사람들 시선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보면 할 일도 못 하게 되는 법일세.”
연호정의 미소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으로 인해 한 번 더 체감하게 되겠지.
“한잔하세.”
두 사람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한데 무슨 일로 절 부르셨습니까?”
“이 사람이? 허허, 자네와 내가 손을 잡고 명가를 무너트렸잖은가. 명가가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는 알고 가야지.”
“뒤처리까지 신경 쓰고 싶진 않습니다.”
“발라 먹은 닭 뼈에 묻은 살점은 신경 안 쓰는 성격인가?”
“애초에 살점을 남기지도 않습니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세. 명가는 천하제일이란 네 글자를 오랫동안 이고 살았던 세력이야. 무림공적으로 찍혔으니 도주한 놈들이야 어디 가서 자랑도 못 할 테지만, 최소한 몇 년은 주시해야 마땅하네.”
모용군은 모를 것이다. 연호정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단전을 폐해도 그들이 익힌 가짜 사신기는 몸에 남는다. 그리고 그 기는 진기의 특성에 따라 심장, 간, 폐, 신장 중 하나에 머물러 끊임없이 몸을 상케 할 것이다.
무림공적으로 몰리면 최소가 뇌옥 십 년이다. 그들 중 십 년 형기를 다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거야 무림의 높으신 분들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요.”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연호정이 진심으로 그 부분에 관심이 없음을 알았다. 동시에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말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녀석이야.’
보면 볼수록 탐이 났다.
그리고 경계심이 들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복속될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참 대단한 사람일세.”
“과찬이십니다.”
“좋네. 자네가 그렇게 두 눈 치켜뜨고 노려보고 있으니, 무서워서라도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모용군이 잔을 채우며 말을 이었다.
“자네, 회남마두(淮南魔頭)라고 아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음, 내가 깜빡했군. 그보다 더 유명한 별호로 불리고 있었지.”
“……?”
“안휘혈궁(安徽血弓)은?”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는 모양이군.”
알다마다.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이야.’
안휘혈궁.
그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그가 흑도 무림을 휩쓸던 시기였다.
가문이 멸문하기 전에는 듣지 못한 이름이었다. 애초에 세상에 관심도 없었던 시기였다. 제갈세가의 소천기단도 모를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멸문 후, 스승에게 무공을 배우고 흑도 무림을 휩쓸 적, 안휘혈궁의 악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안휘혈궁을 만난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 손속을 나눠 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훗날 흑제성을 세웠을 때.
연호정은 그를 흑제성 최강의 선봉장이라는 오대신장(五大神將)의 수장으로 세웠다.
‘묵비(墨飛)!’
안휘혈궁, 아니 신궁(神弓) 묵비.
무림에서 대성하기 어려운, 흔히 쓰지도 않는 궁술(弓術)을 극한까지 연마한 천하제일궁(天下第一弓).
백발백중의 저격수(狙擊手)이자, 맨손으로도 다른 오대신장과 겨뤄 동수를 이룰 만큼 괴물 같은 실력으로 악명을 떨쳤던 사신(死神)이다.
그 이름이, 별호가 왜 지금 모용군의 입에서 튀어나오는가?
“안휘혈궁, 간편하게 혈궁이라고 부르겠네. 혈궁이 세상에 악명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오 년 전 안휘 회남에서 일으킨 혈사(血事) 때문이네.”
“…….”
“그는 회남에 자리 잡은 금검문(金劍門)이라는 문파를 단신으로 멸문시켰네. 자네, 금검문은 아나?”
“……모릅니다.”
“음, 금검문은 안휘 북부에서 제법 명성을 날리는 문파였네. 무력도 상당하고, 특히 금검이라는 이름처럼 자금력이 대단했다고 하더군.”
“…….”
“금검문은 협의지도(俠義之道)를 아는 문파였다네. 뛰어난 자금력으로 기근 때마다 곡창(穀倉)을 풀어 양민들의 배를 불렸지. 금검문이 멸문했을 때, 안휘 북단의 백성들 모두가 땅을 치고 통곡했다지, 아마?”
“…….”
“당연히 안휘 무림도 들썩였지. 당장 혈궁을 잡아 죽이자고 난리가 났다네.”
“그랬군요.”
“하지만 혈궁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네. 전문 수색꾼과 수사관을 파견했지만, 그의 발자국 하나 찾질 못했네.”
당연하다.
궁사(弓師)란 무릇 신법(身法)이 뛰어나야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었다. 거리를 벌려 끊임없는 견제와 사격으로 적을 몰아치는 것이 궁사다.
‘그 양반, 확실히 신법 하나만큼은 천하제일을 논해도 될 정도였지.’
묵비에게는 신궁이라는 별호 외에, 유령귀(幽靈鬼)라는 악명도 있었다.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면 볼 수도,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안휘 팔공산(八公山)에 모습을 드러냈네.”
팔공산은 회남, 즉 회하 남쪽에 걸친 산이었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알 수 없네. 자신이 멸문시킨 문파의 터전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소위 악취미적인 이유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몰라. 중요한 건 그가 그곳에서 제법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겠군요.”
“잘 보았네. 혹 그 소문이 퍼지면 혈궁이 도망칠 수도 있잖은가? 정보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네.”
연호정은 술을 마시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데 안휘혈궁이란 작자는 왜 언급하시는 겁니까?”
“명허림(明虛林).”
“……?”
“도주한 명가의 대공자 놈이 안휘로 향했다 하네. 한데 그놈이 도주할 곳이 하필이면 팔공산이라더군.”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연입니까?”
“우연이라고 볼 수밖에. 나도 명가의 총관이었던 명우산이란 작자에게 들은 거거든.”
우연이라…… 이게 과연 우연일까?
“명가는 중원 전역에 그들의 비밀 거처를 세워 두었다고 하네. 살수의 안가(安家) 같은 곳이라 볼 수 있지.”
“그건 다른 칠대세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모용군이 볼을 긁적였다.
“뭐, 그렇지. 물론 명가만큼은 아니겠지만.”
“하면 팔공산에 명가의 안가가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하남에도 있다고 했네만, 현재 하남은 헤아릴 수 없는 무림인들이 도주한 명가의 무사들을 잡아들이고 있네. 하남을 제외하고 가장 가까운 곳이 팔공산이라고 하더군.”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모용군의 미소가 짙어졌다.
“왜 그렇게 보는가?”
“솔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무림맹 건립을 추진 중이십니까?”
모용군은 감탄 이전에 섬뜩함을 느꼈다.
‘이런 귀신 같은 놈이 있나.’
대화의 몇 단계를 건너뛰어 버리더니,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 들었다.
문제는 그 말이 맞았다는 것이다. 조만간 알려지겠지만, 지금은 대회의에 참석했던 수장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맞네.”
“명가의 대공자, 명허림의 목을 축배 삼아 새로운 무림맹의 개최를 축하해 볼 생각은 아니겠지요?”
모용군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흑도 나부랭이라도 되는 줄 아는가? 끔찍한 말을 잘도 하는구먼.”
“…….”
“그래, 자네 말마따나 곧 무림맹이 세워질 걸세. 자네는 나의 꿈이 무림맹주라는 걸 알고 있지?”
“이번 명가 사태를 빌미로 본격적으로 추진해 보시려는 겁니까?”
“허허허.”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연호정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좋아.’
단체도, 직책도 없는 곳에 사람을 앉힐 순 없다.
그는 모용우를 떠올렸다.
누구보다도 무림맹주라는 직책에 어울릴 협사를.
‘차라리 이 기회에 무림맹이 생긴다면 나야 좋지. 잘 됐어.’
쾌재를 부르는 연호정과 달리 모용군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안 되겠군. 이번 일을 끝으로 어떻게든 해야겠어. 너무 위험하군, 이 녀석.’
연호정이 물었다.
“이 중요한 정보를 제게 말씀해 주신 것은, 저와 다시 한번 손을 잡고 싶으시다는 뜻입니까?”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두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역시 이놈은 나와 같은 부류야.
내심을 숨긴 모용군이 문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뭡니까?”
“허가증일세.”
“허가증이요?”
“무림공적으로 선포된 가문의 모든 것은 무림맹으로 귀속된다네. 재산도, 무공 서적도, 보유하고 있던 영약까지도.”
“……?”
“자네가 명허림을 잡아 오면, 명가의 무공 서적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해 주겠네. 이것은 바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허가증일세.”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물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네. 그건 그때 가서 자네에게 필요한 것으로 대체하면 되겠지.”
“…….”
“어떻게 하겠나? 명허림 한번 잡아 보겠는가?”
“그 전에 하나 묻겠습니다.”
“말씀하시게.”
“왜 저입니까?”
모용군이 재차 빙긋 웃었다.
“강동의 젊은 호랑이. 가문을 위해 홀로 천하제일가와 싸운 희대의 풍운아. 소패왕 혹은 육손환생.”
“…….”
“다 자네를 수식하는 말일세. 자네는 백도 무림에 본인의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단 말일세. 내게는 말할 것도 없지.”
“…….”
“자네도 야망이 있을 걸세. 우리, 과거의 잔재는 다 털어 내고 도울 게 있다면 서로 도우면서 커 가야 하지 않겠나?”
투명한 눈으로 모용군을 보던 연호정이 일순 미소를 지었다.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수락이었다.
모용군이 크게 웃었다.
“역시 호탕하군. 자네가 수락할 줄 알았네. 자, 자네도 한 잔 받게나.”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리며 술잔을 나누었다. 서로를 보는 눈빛에는 진한 동질감과 호의마저도 엿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둘은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 주는 모습이 철저한 연기이자 거짓이라는 것을.
그렇게 인연과 악연이 점철된 또 하나의 사건이 연호정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