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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86화 (86/963)

86화.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4)

쩌어엉!

“큽!”

연지평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다시.”

연위는 한 그루의 대나무 같았다.

왼손은 뒷짐을 지고 오른손에 쥔 검은 하단을 향했다. 허리는 꼿꼿했고 두 눈은 전방을 주시했다.

연지평은 암담함을 느꼈다.

‘빈틈이 없다.’

아무 곳이나 공략하면 될 것 같은데, 그 어느 곳도 공략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무공은 가히 철벽과도 같았다. 대기를 가르는 검력은 파도처럼 강력했고, 공격을 흘리는 검결은 바람처럼 유연했다.

연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지평이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자세를 풀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비무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자세를 푼다?

‘포기하진 않았군.’

자세는 풀었지만 뿜어지는 기세는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더 날카로웠다.

연지평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쳤다.

터어엉!

전신을 유연하게 한 후, 순간적으로 근육을 조여 전진 속도를 끌어 올렸다.

파바바박!

정면으로 달려오는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무서운 탄력으로 갈지(之)자를 그리며 접근하는 연지평의 보법은 빠르고도 유연했다.

인상적인 접근이었지만, 연위의 표정은 냉정했다.

‘통하지 않음을 알 텐데.’

그때였다.

좌측 십 보(十步)로 접근했던 연지평이, 우측 칠 보(七步) 거리로 움직인 순간.

후웅.

경쾌한 장력이 연위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촤악!

연위의 검은 냉정하게 장력을 갈랐다.

그때 연지평이 좌중로(左中路)에서 치고 들어왔다.

종전보다 반 배는 더 빠른 속도였다. 완전히 좌측으로 빠지는 것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보법의 허초(虛招)요, 날카로운 심리전이었다. 상대에게 접근 방위를 익숙하게 만든 후, 결정적인 순간 예측하지 못한 방위에서 폭발적인 일격을 가하는 것이다.

연위의 검이 상단으로 치솟았다.

쩌어어엉!

연지평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강한 힘으로 일격을 날렸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물론 현재 연지평의 무공으론 연위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다. 하지만 다급하게 만들 수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통하지 않은 것이다.

연위가 입을 열었다.

“충분…….”

번쩍!

순간 연지평의 검이 벼락처럼 쏘아졌다.

참격이 아닌 자격(刺擊)이었다. 연위의 얼굴에 작은 놀라움이 어렸다.

카가강!

부자의 검이 부딪친 그대로 멈췄다.

서늘한 눈으로 아들을 내려다보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후우!”

연지평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친 일검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막혔다.

골반, 무릎은 물론 오른팔 전체가 저려 왔다. 그러나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납검한 연지평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제법이구나.”

깜짝 놀란 연지평이 연위를 보았다.

연위가 검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상대의 심리를 흔들고 결정적인 순간에 쾌속한 일검을 펼쳐 낸 것, 인상적이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아버지한테 이런 칭찬을 받은 적은 없었다. 연지평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연위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아이가 이런 전술도 쓰는군.’

실전에는 온갖 변수가 범람한다. 정직하게만 익힌 무공은 뿌리는 튼튼하게 만들지언정 실전에서 활용하긴 어렵다.

그간 연지평은 무인으로서의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앞으로 백 년이 지나도 뽑히지 않을 만큼 굵고 탄탄한 뿌리였다.

슬슬 변칙적인 무공도 가르칠까 싶었는데, 어느새 알아서 연구해 와 펼쳐 보였다. 그런 변화가 연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지막 일검 말이다.”

“아, 그거요?”

“그 검을 어떻게 펼쳤느냐?”

연지평이 쑥스러운 듯 코 밑을 훔쳤다.

“비연팔검(飛燕八劍)과 파랑구검(波浪九劍)을 연성하다가 깨달은 검이에요. 조금 조악하긴 하지만, 비연의 쾌검과 파랑의 연환검 묘리를 섞어 보니 벼락같은 강검(强劍)이 나오더라고요.”

“…….”

“완성이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승부에서 쓰려면 많이 다듬어야겠더라고요. 그래서 그간 보여 드리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아니, 완성할 수 있다.”

“네?”

연위가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연팔검과 파랑구검, 그리고 소현대검(昭炫大劍)의 특성을 합쳐 고급의 무리(武理)를 담아 만든 것이 바로 철검대연삼십육식(鐵劍大衍三十六式)이다.”

“엣?!”

연지평은 깜짝 놀랐다.

철검대연삼십육식은 연가의 삼대검법 중 하나였다. 삼대검법 중 검력(劍力) 자체는 가장 낮지만, 검(劍)이 지닌 특성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구현해 낸 무공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철검대연은 검법이자 신공(神功)과도 같았다. 연위 역시 삼대검법 중 가장 먼저 연성한 것이 철검대연삼십육식이었다.

“철검대연을 연마하면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검을 얻을 수 있다. 방금 네가 펼친 한 수는 철검대연의 후반 십이식 중 전광일식(電光一息)이라는 수법이다.”

“아……!”

“가르쳐 주지도 않은 무공을 너 스스로 다듬은 검리(劍理)로 구현해 냈구나.”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연지평의 얼굴에 솔직한 기쁨이 어렸다.

가르쳐 주지 않은 무공을 홀로 깨우쳐 썼다는 것보다 아버지께 칭찬을 받은 것이 훨씬 더 기뻤다. 이제야 검사로서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변초와 합검(合劍). 더는 기본에 목을 맬 필요가 없겠다. 말이 나온 김에, 내일부터 검극사기(劍極思氣)와 철검대연을 전수하겠다.”

연가를 대표하는 신공과 검법을 모두 전수하겠다는 뜻. 연지평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믿고 있다.”

언제나 믿고 있지.

연위는 머릿속에 떠오른 뒷말은 굳이 뱉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로 워낙 부딪쳐서 그럴까? 첫째에게는 이따금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한데 둘째에게는 아직 그게 쉽지 않았다.

‘빨라.’

이유야 어찌 되었건 연지평의 무공 연성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자신도 전 세대에서 출중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연지평은 그런 자신을 한참이나 초월해 있었다.

‘오 년은 더 빠르군.’

검극사기는 열일곱 나이 때부터 연성했지만 철검대연은 스물을 훌쩍 넘어 연마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중급 검법들의 묘리를 합칠 생각 자체를 못 했다.

여러모로 뛰어난 재능이었다. 재능에 안주하지 않고 하루하루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으니, 참으로 미래가 기대된다.

게다가 둘째는 아직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개화한 것이 아니었다.

연지평은 천성이 순하고 착했다. 찰나의 순간 승부가 갈리는 검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성정이었다.

그 성정을 깎고 다듬어 하나의 옥(玉)으로 만드는 순간, 바로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

그러나 연위는 연지평의 저 순한 성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욕심 같아선 저 순수함을 오랫동안 간직했으면 싶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첫째 역시 세상의 때를 너무 탔다. 그래서일까? 연호정은 마음 한구석에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냉혹한 기질을 품고 있었다.

연위는 연지평이 그러한 냉혹함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강호의 무사에게 그것은 숙명이지만, 둘째만큼은 그 숙명에서 벗어났으면 싶었다.

연위는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랐다.

“오늘 수련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자.”

“네! 고생하셨어요!”

“그래.”

부자가 거치대에 검을 놓았을 때였다.

“가주님!”

이백현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서신입니다! 대공자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연지평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혀, 형님이요?”

연위가 이백현의 손에서 서신을 받았다. 거의 빼앗듯 가져왔지만 그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서신을 펼쳤다.

연위가 서신을 펼치자 연지평이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연위 옆에 붙어 섰다.

죄송합니다. 워낙 일이 바빠서 연락도 자주 못 드렸습니다. 개방에서 따로 연락을 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일은 잘 풀렸고, 저도 무사합니다.

서신에 눈을 고정한 연위가 입을 열었다.

“평아.”

“네?!”

화들짝 놀란 연지평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연위가 담담하게 말했다.

“훗날 네가 강호에 나가게 될 때, 네 형과 같이 행동해선 안 된다.”

“……네?”

연위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심한 놈.’

뭐 얼마나 바쁘다고 서신 하나 제때 못 보내나 싶었다.

이것도 불효라면 불효다. 그저 몇 글자라도 적어 보내면 성의 없다고 꾸짖기라도 하겠는가?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신변에 이상이 없는가다.

첫째는 다른 건 다 좋은데, 참 이런 데에서 문제였다.

괘씸한 놈이다.

아무래도 이번 사태의 참고인으로서 조사를 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금방 끝나겠지요. 하지만 돌아갈 때까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별일은 아니고 세상 좀 둘러보려는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더더욱 괘씸한 놈이다.

일이 끝나면 돌아와서 인사부터 하고 다시 나가면 된다. 첫째의 문제점을 또 하나 알게 된 것 같았다.

가문 공사는 끝났는지 궁금하군요. 지평도 잘 있겠지요? 얼마나 성장했는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연지평이 히죽 웃었다.

연위가 둘째를 힐끔 보았다. 연지평이 서둘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그가 다시 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리고 명가 놈들이 동해 무역상들을 협박하여 불법으로 취득한 염전세(鹽田稅)의 증빙 자료 좀 따로 보내 주십시오. 서역(西域) 상인들을 납치해 암시장(暗市場)에 노예로 판 문서도 함께 동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위가 이백현에게 말했다.

“서고에 적단서책(赤檀書冊)이라 적힌 장부가 있네. 그중 제일 두껍게 엮인 문서를 철곤개 지부장에게 건네주게. 임시 무림맹으로 보내면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가주님.”

이백현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혼자서 일을 벌여 죄송합니다. 벌은 돌아가서 받겠습니다. 날이 무척 덥습니다. 부디 건강에 유의하시길.

서신 맨 밑에는 불효자(不孝子) 호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알긴 아는군.”

연지평이 눈을 끔뻑였다.

서신을 접은 연위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이 제법 흩어져 있었지만, 하늘은 맑았다. 정말 여름이 온 것이다.

‘이왕 세상에 나갔으니, 더 크게 커서 돌아와라.’

* * *

“어? 뭐야? 어디 가?”

가득상이 의아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깔끔하게 세탁된 무복을 입은 연호정은 도끼까지 들고 있었다. 외양만 보면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기세였다.

“하남 뜨려고 그러오.”

“뭐? 지금?”

“문제 있소?”

“어…… 아니 뭐, 문제는 없지만.”

참고인으로 사건 조사도 다 마쳤다. 며칠이 지나 운신도 가능해졌으니, 더는 하남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내가 안 찾아왔으면 말도 안 하고 떠났겠네?”

“아마도?”

“이런 정나미 없는 인간!”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후개도 본업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소? 나중에 연이 닿으면 또 만나겠지.”

“내 본업이 댁 감시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오?”

“울 사부가 그러더만. 이거이거 위험한 놈이니까 사도로 빠지면 대가리를 날려 버리라고. 말하자면 특명이 떨어진 거지.”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후개 자리가 그렇게 여유로웠소? 안 바쁘오?”

가득상이 힘없이 웃었다.

“조금 바쁘지. 그래서 당장은 같이 못 따라가겠소.”

“어차피 같이 다녀 봤자 피곤한 일밖에 없을 거요.”

“몹쓸 인간. 냉정한 인간.”

“나중에 봅시다.”

“잠깐.”

가득상이 품에서 때가 꼬질꼬질 묻은 주머니 하나를 건넸다.

연호정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받으쇼.”

“…….”

“왜? 더럽냐?”

“받겠소. 근데 이게 뭐요?”

“오정패(汚精牌)요.”

“이름 한번 걸작이군.”

가득상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 가서 뭐 할지는 모르겠지만, 뭔 일 생기면 그거 들고 아무 지부나 찾아가시오.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연호정이 미소 지었다.

“고맙소.”

“됐소. 그걸로 댁 감시하려는 거니까 되도록 많이 써.”

“알겠소.”

연호정이 문을 나섰다.

“그럼 먼저 가겠소.”

“연 공자.”

“음?”

가득상이 포권을 취했다.

“무운을 빌겠소.”

연호정은 그 인사를 가볍게 받지 않았다.

도끼를 내려놓은 그가 마주 포권했다.

“나중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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