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바람은 끊어지지 않는다 (2)
“끄응.”
자신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내가 이런 소리도 다 내는구나 싶었다.
‘제길.’
명천과 생사결을 벌인 지 보름이 지났다.
무공을 연마하지 않은 사람이면 사경을 헤맬 상처였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아수라장을 거쳐 온 그에겐 특별할 것 없는 상처였다.
‘열흘이면 얼추 운신이 될 줄 알았는데.’
우우웅.
내공을 운용하니 사지에 힘이 들어갔다.
소모한 내공은 팔 할 가까이 회복되었고, 삼신기(三神氣)도 왕성하다.
그런데도 이 지경이다. 이상할 정도로 상처가 잘 낫지 않았다.
‘왜지.’
힘도 넘치고 근력도 되찾았다.
그런데도 예상한 시기 안에 상처가 낫지 않았다면, 그건 전적으로 기(氣)의 문제일 것이다.
가부좌를 튼 연호정은 내부로 깊게 침잠했다.
잠시 후.
화르르륵!
붉은 화기, 주작기가 타올랐다.
가장 늦게 얻은 기운이면서도 왕성함으로는 삼신기 중 최고였다.
연호정은 그 이유를 자신의 성정(性情)에서 찾았다.
‘현무가 방패, 백호가 창이라면, 주작은 극형 그 자체다.’
상대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꺼내는 것 자체가 꺼려질 정도로 막강한 기운이었다.
즉, 주작기가 이리 커진 것은 그의 마음에 살심(殺心)이 짙게 남았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회귀한 후, 명천과 싸울 때처럼 죽음을 실감한 적이 없었다.
위기의 정도에 따라 주작기는 성장한다. 나 자신의 살심, 극단적인 위기감이 주작기를 이 정도로 키워 버린 것 같았다.
연호정은 백호기와 현무기도 점검했다.
‘역시 이상은 없는데…….’
백호, 주작, 현무 세 개의 기운 모두 괜찮다. 기의 성질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참 동안 몸을 살핀 연호정은 이내 가부좌를 풀어 버렸다.
“안 나오는 답을 굳이 찾으려 들지 말자.”
어쨌든 육체는 회복하고 있다. 그거면 된 것이다.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대공자님.”
“어, 신 대주.”
“저…… 손님이 오셨습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또냐.’
현재 연호정은 명가에서 제법 떨어진 의방에서 치료 중이었다.
거리는 꽤 떨어졌지만, 그래도 명가의 영역이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수많은 무림인이 찾아왔다. 명가가 무림공적 판정을 받았으니 궁금증이 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연호정을 찾아온 사람은 거의 백 단위에 가까웠다.
치료 중이니 면담은 불가능하다고 다 돌려보냈지만, 개중에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신모는 몇 번 검까지 뽑아야 했다.
“혼자 있고 싶어. 돌려보내 주게.”
“그것이…….”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해 보니 어지간하면 신모가 돌려보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데 그래?”
그때, 위풍당당한 목소리가 우레와 같이 튀어나왔다.
“나다!”
일부러 밀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신모 뒤에서 고개만 빼쭉 내민 여인이 보였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헤헤, 놀랐어?”
“…….”
“어머, 그렇게 놀란 거야? 헤, 이거 좀 의외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갈아연.”
“야!”
제갈아연이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벌써 내 이름 잊어버린 거야? 그런 거야? 사람 섭섭하게 이게!”
연호정은 피식 웃어 버렸다.
신모가 왜 난처해했는지 알겠다. 그래도 제갈아연은 회합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너 때문에 무림이 난리가 났는데, 친구로서 당연히 찾아와야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명가 때문에 난리가 난 거겠지.”
“은근슬쩍 피하는 것 보게? 그 시발점은 너잖아.”
연호정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사적인 갈등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없었어.”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다.
“처음부터는 없었지만, 나중에는 생긴 거네?”
“혼자서는 이길 방법이 없더군. 그럼 통째로 묻는 수밖에.”
담담하게 하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혼자서 이길 방법이 없다? 그 말은 애초에 혼자서 이길 생각을 했다는 뜻이다. 가불가(可不可)를 떠나,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 자체가 대단했다.
게다가 혼자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명가를 그대로 묻어 버렸다.
무력이든 지략이든, 구주명가 정도 되는 단체를 단시간에 묻어 버리는 건 누구라도 하기 힘들다.
제갈아연이 한숨을 쉬었다.
“너, 어쩌다 그 나이에 그런 괴물이 된 거야?”
“사람 보고 괴물이라니, 말이 심하군.”
“심한 줄은 알고?”
“일없다.”
“또, 또. 그 나이 먹은 말투 좀 고치라니까.”
“일없다는 게 왜 나이 먹은 말투냐.”
“아, 갑자기 피곤해지려고 그래.”
“가라.”
제갈아연이 콧방귀를 뀌며 척척 걸어오더니 연호정 옆에 앉았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더워. 떨어져.”
“거짓말하네.”
“날씨 안 보여? 떨어져.”
“싫다! 호법 서 주는 거니까 고마워해.”
“운공도 다 끝났는데 호법은 얼어 죽을.”
“싸가지하고는.”
제갈아연이 소매 안에서 작은 금낭을 꺼내 들었다.
“자, 이거 받아.”
연호정이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이게 뭔데?”
“설마 독이라도 묻혔을까 봐 그래? 받으라면 그냥 받아라.”
연호정이 금낭을 받았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도 세상 호구시지.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단약까지 챙겨 주셨어.”
“단약?”
“소천기단(小天機丹)이라는 보물이다. 처먹어.”
말투가 좀 거칠어졌는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천기단이 뭐지?”
제갈아연이 입을 쩍 벌렸다.
“소천기단 몰라?”
“몰라.”
“소천기단을? 소천기단인데? 소천기단씩이나 되는데?”
“모른다고, 인마.”
“야! 그래도 같은 칠대세간데 각파가 자랑하는 영단 정도는 외워 둬!”
“알 게 뭐야, 안다고 훔쳐 먹지도 못할걸.”
“내놔.”
“줬던 거 뺏지는 말고.”
제갈아연이 씩씩거렸다. 열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때, 신모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기단은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영단입니다. 천기단은 대천기단(大天機丹)과 소천기단으로 나뉘는데, 소천기단만 해도 내공 연마에 굉장한 도움을 주는 보물입니다.”
연호정의 귀가 쫑긋거렸다.
영단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 기대감이 있었다. 한데 이렇게 듣고 보니 생각보다 더 괜찮은 물건인 모양이었다.
“그래? 이걸 먹으면 내공이 증가한다는 거지?”
“소위 대문파에서 연성하는 영단들은 하나같이 약력을 극한까지 응축시킨 보물들입니다. 강호에 떠도는 여느 단약과는 다르지요.”
“그으래?”
“예. 이번 전투로 손상된 대공자님의 내공 증대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이 그것 보라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연호정이 팔꿈치로 그녀의 팔을 툭툭 쳤다.
“대천기단은 없으시대?”
“……와, 잘 참았다. 너 방금 겨우 산 줄 알아. 진심으로 한 대 칠 뻔했으니까.”
“뭐, 어쨌든 고맙다.”
제갈아연은 기가 막혔다.
소천기단이 어떤 보물인가? 비록 내공 증가 면에선 소환단(小丸丹)보다 떨어질지언정 신체를 안정시키는 데에 특효인데다가, 내공의 성질을 따지지 않고 내력 증강을 꾀하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연호정이 멋쩍은 듯 웃었다.
멍하니 자신을 보는 제갈아연을 보니 확실히 대단한 물건인 것 같았다. 사실, 그 먼 길을 찾아와 이런 선물을 준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아무리 은인이라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은인?”
“아, 됐어! 처먹어, 빨리!”
“밥 먹고 먹을 거야.”
“이익!”
사람 열받게 하는 능력만큼은 당대 최고인 것 같다. 한참 씩씩대던 제갈아연이 끝내는 등을 돌려 버렸다.
신모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왕 친구분이 오셨는데,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하시지요.”
“얘랑?”
“그렇습니다. 만일 제갈세가가 힘을 써 주지 않았다면 대공자님께서는 그리 빨리 회복하지 못하셨을 겁니다.”
느리던데.
“그게 뭔 말이야?”
“전투가 벌어지기 전, 혹시 몰라 하남 최고의 의원들을 미리 섭외해 주었습니다. 당시 대공자님의 상세가 몹시 위중하지 않았습니까?”
가만뒀어도 뭐…….
“그랬지.”
“대공자님께서 정신을 잃은 날, 통천신의(通天神醫)께서 봐 주고 가셨습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통천신의는 그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소위 신의(神醫) 소리 듣는 의원 중에서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이로, 강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의였다.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바라보았다.
제갈아연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팔짱까지 옹골차게 낀 걸 보니 삐지긴 삐졌나 보다.
연호정이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밥 한 끼?”
“헉! 야! 이놈 새끼가 미쳤나! 어딜 만져?!”
“맛난 거 살 테니까 먹지?”
제갈아연이 헛기침을 했다. 얼굴이 조금 붉어졌지만 귀가 쫑긋거리는 걸 보니 회가 동한 모양이었다.
“어험! 맛난 거 사 주는 거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 줄게.”
사실, 제갈아연에게는 여러모로 미안한 게 많았다.
이번 도움을 떠나, 그는 제갈아연을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뿐이 아니라 칠대세가 전원을 의심했다.
유독 얽혔던 사람이 제갈아연이라 다소 냉정하게 대한 게 많았다.
“으히힛.”
푼수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제갈아연을 본 신모는 속으로 웃었다.
‘한창 좋을 때군.’
그때, 연호정이 물었다.
“한데 명가 쪽 사정은 어때?”
“아…….”
신모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회복에 악영향을 줄까 그간 일부러 말씀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보니, 이제는 말씀드려도 될 것 같았다.
“대충은 알아. 의원들이 오가면서 하는 소리는 들었으니까. 다만 더 상세하게 듣고 싶을 뿐이야.”
“알겠습니다. 하면…….”
그때였다.
“어쩌긴 어째, 이놈아. 거의 초상집 분위기지.”
차아아앙!
신모의 발검이 빛살처럼 후방으로 향했다.
“어허? 기세 보게? 광풍검, 광풍검 하더니만 정말 놀라운 검기를 지녔구먼?”
신모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누구시오?”
노인이 씨익 웃었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나이인데도 가득상처럼 치아가 몹시 하얗다.
“거지 대장일세.”
“……?”
“내 제자가 저 몹쓸 놈 때문에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었다고 해서 말이야. 어떤 놈인가 싶어서 찾아와 봤지.”
“……!”
신모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용두방주십니까?”
“그렇다네.”
탁!
곧바로 납검한 신모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벽산연가의 창응대주 신모입니다. 개방의 용두방주를 뵙습니다.”
용두방주, 화진천(華振泉)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군자의 가문이라더니, 휘하 무사들 관리도 아주 잘되어 있구먼. 내 아직 연가주와 사담을 나눠 본 적이 없는데, 자넬 보니 그 사람 성격을 알겠구먼.”
“과찬이십니다.”
“허허.”
“이만 나가 주십시오.”
“……이잉?!”
잘 이어져 오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긴 느낌이었다.
신모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공자님께서 회복 중이십니다.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들일 수 없습니다.”
화진천의 눈이 반짝였다.
천하의 용두방주가 왔는데도 허가받지 못했으니 나가라고 한다.
‘딱딱하군.’
딱딱한 성격이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화진천이 웃으며 입을 열려 할 때.
“신 대주.”
“예, 대공자님.”
“괜찮아. 어차피 이미 들어오셨는데 뭘.”
“……알겠습니다.”
신모가 한옆으로 물러났다.
화진천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가부좌를 틀고 담담하게 앉아 있는 연호정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신비로운 기도가 그의 전신을 에워싸고 있었다.
화진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눈에 은근한 감탄이 깃들었다.
‘상이가 휘둘릴 만해.’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연가의 연호정입니다.”
화진천이 연호정을 지그시 주시했다.
담담하고도 여유가 있는 모습.
“천하의 개백정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생각보다 멀쩡하게 생겼구먼?”